63화. 어땠을 거 같습니까?
하무백은 연하민을 떠올렸다.
아무리 봐도 연가와 무슨 관련이 있는 듯한데.
당진산도, 남궁지후도 남궁지유도 연하민을 알아보지 못하는 걸로 봐서는 호북연가 출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몸에는 분명 연가 특유의 수련법 흔적이 있었다.
“오대세가에서 아무래도 교관님에게 악감정을 지닌 듯합니다.”
남궁지후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였던 듯하다.
“뭐, 고맙다. 그럼 다음에 보지.”
하무백은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남궁지후조차도 아직 자신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만큼 영감들이 나에 대해 숨기고 있다는 건데…….’
새로 오는 부관주는 과연 어떤 인물이 올 것인가.
자신에 대해 아는 이일까 모르는 이일까.
궁금했다.
***
호북연가의 가주, 연자경이 서탁을 탁탁 두드렸다.
정천맹 장로원의 단 네 명만이 있는 대장로 중 한 사람으로 서열은 세 번째였다.
이번 장로원 회의에서 결정 난 교룡관 부관주의 발령. 그 귀찮은 일을 연가에서 떠맡은 것이다.
교룡관은 맹에서 떨어진 무창에 위치한 데다, 핏덩이들을 가르치는 곳.
당연 한직으로 여겨 가려는 이가 없었다.
팽도율이 괜히 그 오랜 세월 관주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번 일로 인해 팽가의 힘을 더 빼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해서 팽도율을 견제하기 위해 부관주의 발령을 결정한 터.
가뜩이나 능력 있는 사람들이 꺼리는 자리다. 능력이 있다고 함은 곧 출세의 욕망도 있음이니.
그런데 그곳에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재해 같은 녀석이 있었다.
‘하무백…….’
기실 팽도율의 견제라는 핑계로 실상은 하무백 역시 견제하기 위함이다.
정확히는 하무백의 꼬투리를 잡아 그를 정천맹에서 축출하려는 의도.
다만 고양이 목에 방울을 누가 다느냐로 눈치 싸움이 치열했고, 결국 결정된 것이 연가다.
지금껏 연가가 교룡관의 운영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누구를 보내야 하나…….”
당연히 다들 가기 싫어할 것이다.
게다가 소가주라는 아들놈은 벌써 몇 개월째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있다.
“못난 놈. 쯧.”
아들 연백량을 떠올리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죽은 동생의 양녀를 욕심내는 놈이라니.
영웅은 호색이고, 어차피 밖에서 들인, 피도 섞이지 않은 천출의 아이인지라 딱히 제지하지 않기는 했다.
어차피 가문을 위해 이용하려던 아이였으니.
다만 그놈의 욕심이 너무 적나라했기에, 그 아이가 도망가 버린 게 문제다.
미색이 제법이라 상당히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아이였건만.
그런 아이를 도망가게 한 것도 모자라, 지금은 그 아이를 찾겠다고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거기에만 정신이 팔려서는.
정녕 저놈을 소가주로 두어야 하는지 고민이었다.
“아직은 좀 더 두고 보도록 하지.”
연자경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교룡관에 보낼 사람을 다시 찾았다.
“역시 그 녀석밖에 없군.”
현 교룡관주는 팽가주의 아들이다. 이제 팽가주에게 남은 것은 몰락뿐이라지만.
그와 무게를 맞추려면 역시 자신의 아들을 보내야 했다.
“막내를 보내야겠어.”
결정을 내린 연자경은 사람을 불렀다.
***
개운하게 목욕을 마치고 침상에 누웠다. 상쾌한 기분과 함께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하무백은 자연스레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두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킨 하무백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귀찮은 녀석이 찾아왔군.”
언짢은 듯 중얼거리는 하무백. 그러나 그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난감함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하무백은 방을 나섰다. 자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마도 계속 저렇게 은근히 존재감을 흘릴 녀석이다.
하무백은 기감에 감지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교룡관 후원의 어느 조용한 곳이었다.
그곳에는 청의에 죽립을 쓴 중년인이 주변을 한가로이 거닐고 있었다.
“오셨군요. 단주님.”
그 음성에는 웃음이 묻어나고 있었다.
“네가 여긴 왜 와? 그리고 나 이제 단주 아니다.”
하무백이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그야 버림받은 놈이 찾아와야죠. 그리고 제게 단주님은 단주님 한 분뿐입니다.”
“버리긴 누가 버렸다고. 그런 소름 돋는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남자 놈이 그딴 소리라니.”
죽립 아래 드러난 입술이 웃음을 지으며 호선을 그렸다.
“사실이 그런걸요. 발령받고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난 단주님이나, 그런 단주님 잡겠다고 따라서 떠난 한 부단주나……. 하. 저도 떠나려하니 저는 안 된다네요.”
한숨을 쉬며 한탄하는 남자.
호천단의 또 다른 부단주인 담무흔이었다.
하무백의 호천단주 시절 오른팔이나 다름없던 심복이었다.
“그래서 때려친 거냐?”
“거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하시오? 단주님에 대한 의리도 중요하지만, 일은 일이지요. 집에 가면 여우 같은 마누라랑 토끼 같은 자식들이 나만 보고 입을 벌리고 있는데 말이오.”
담무흔의 너스레에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여우와 토끼를 생각한다면 관두는 게 낫다니까.”
“킥.”
하무백의 말에 담무흔은 웃음을 흘렸다.
“관둔 게 아니면 어떻게 온 거야?”
“휴가요. 휴가. 정말 호천단 입단 후 첫 휴가를 단주님 찾아오는 데 썼습니다. 영광인 줄 아세요.”
“내가 그렇게 휴가 좀 써서 가족들이랑 시간 좀 보내랄 때는 안 쓰더니?”
“단주가 안 쓰는데 부단주가 어찌 씁니까?”
담무흔의 대꾸에 하무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 지금 단주는 휴가 좀 쓰나 봐.”
그 말에 담무흔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빌어먹을 단주 새끼가 휴가를 하도 자주 써서, 제가 이제야 휴가를 쓴 겁니다. 한 부단주가 괜히 튄 게…….”
“설빙은 딱히 그런 말이 없던데.”
“그 얼음마녀야 뭐…….”
거기까지 말한 담무흔이 입을 닫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무백을 부르기 위해 드러낸 존재감을 한설빙이라면 느낄 수 있었을 테니, 혹여나 그녀가 근처에 있나 살피는 것이다.
“없다.”
“휴우.”
”그래서 왜 온 거야? 세 번째 묻는 거다?”
“아, 당연히 단주님 보러 왔죠.”
“단주 새끼가 아니라?”
“단주 새끼는 저기 본맹에 있는 남궁 새끼고요. 여기 계신 단주님은 제 유일한 단주님이시죠. 크.”
“후우. 진짜. 일단 어디라도 가자. 여기서 이게 무슨 짓이냐.”
하무백이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자리한 주루의 창가 자리.
가끔 하무백이 들리는 곳이다.
오후 시간인데도 제법 사람이 많았다.
“근데, 그거 진짜요?”
“뭐가?”
“상관 폭행이라는 죄목이요. 단주님 상관이라고는 맹주님 한 분인데, 설마 맹주님 팼습니까?”
자리에 앉자마자 정말 궁금하다는 듯 묻는 담무흔.
호천단주가 감히 맹주님께 어찌 그럴 수 있냐는 의문 따위는 없었다.
담문흔은 하무백이 능히 정천맹주를 팰 수 있으며, 정말 그걸 실행에 옮겼는지를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있었다.
“크크크크크큭.”
하무백의 입을 비집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모습에 죽립을 벗은 담무흔이 피식 웃었다.
“뭐, 그렇겠지요. 맹주님이 미치지 않고서야 단주님을 건드리지는 않으실 테니. 뭐, 장로원 늙다리들이 적당한 죄명을 만든 거라 생각은 했습니다. 그래도 상관 폭행이라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 한 번 여쭤봤습니다.”
호천단은 맹주 직속이었기에, 호천단주의 상관은 정천맹주가 유일했다. 그런 호천단주의 죄목이 상관 폭행이라니.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
“알면 내가 이렇게 묻겠소?”
“정말 쪽팔렸나 보네. 네가 모를 정도면 철저히 함구했다는 거니.”
“누굴 패긴 팼나 보오?”
“문학자.”
하무백이 짤막하게 답했다.
“집법원주 말이오?”
담무흔의 물음에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단주가 떠난 후로 그 꼬장꼬장한 영감이 좀 조용해졌다 싶더니……. 그런데 집법원주 팬 게 왜 상관폭행……. 아! 맹 내 서열 때문에. 큭. 큭큭.”
담무흔이 웃음을 흘리는 사이 술과 음식이 나왔다.
담무흔이 반색을 하며 한 잔 가득 채워 벌컥거리며 마셨다.
저 모습은 여전했다.
“많이 섭섭했나?”
가볍게 한잔한 후 하무백이 묻자 담무흔이 우뚝 멈췄다.
“뻔히 사정 아는데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럼 빨리 그만둬. 나중에 처자식 눈에서 눈물 나게 하지 말고.”
“하아.”
하무백의 말에 담무흔이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흘렸다.
“안 놔주시네요. 단주님이 여전히 매여 있으신 거처럼.”
탄식 어린 그 말에 하무백은 묵묵히 술잔을 입에 가지고 갔다.
그렇다.
담무흔이나 자신이나 그런 사정이 있었다.
놔주지를 않는다.
빌어먹을 맹주놈이.
“그러게. 빌어먹을 맹주놈. 전쟁도 끝났는데.”
“푸흡. 아무리 기막을 둘렀다지만, 너무 적나라한 거 아닙니까? 그래도 오랜만에 들으니 좋네요. 빌어먹을 맹주놈이라는 말. 크흐.”
그사이 한잔 더 비운 담무흔이다.
“그래서 진짜로 왜 왔어? 그 맹주놈이 보낸 거야?”
“뭐, 이번 일 단주님이 벌인 거라면서요?”
팽가의 일을 말함이다.
하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거 때문에 상황이 좀 요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교룡관으로 쳐냈다고 마음 놓고 있던 장로원 늙은이들이 갑자기 독 오른 뱀처럼 경계한달까.”
그럴 만도 하다.
혼자서 팽가를 박살을 낸 거나 다음 없으니.
현 정천맹주 소휘웅도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뭐, 호북연가에서 부관주가 온다고 들었다.”
“어라? 소식 빠르시네? 여기 가만히 박혀 계실 줄 알았는데 어찌 아셨데? 혹시 철담개?”
하무백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이곳 무창에 자리 잡은 것은 알았지만, 그날 이후로 만난 적은 없었다.
“하필이면 호북연가인 게 문제라오. 또 단주님이 엮여 들어갈 것 같아서. 그것 때문에 왔수다.”
하무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연가와 엮일 일이 무엇이 있던가. 그때 연하민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호북연가의 아이가 가주 몰래 맹룡대에 들어갔답니다. 그것도 연가를 몰래 탈출하다시피 도망쳐서.”
“연가의 아이가 연가를 탈출해?”
하무백의 머릿속에 떠오른 연하민의 얼굴이 점점 진해졌다.
“연가주의 손녀이긴 한데……. 둘째 아들의 딸이죠. 그런데 둘째 아들의 딸이 아니에요.”
하무백이 눈살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재가한 아내가 데리고 들어온 딸입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양녀죠. 그럼에도 연씨 성을 줬습니다.”
하무백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흠.”
무언가 정말 저열하고 복잡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잠깐, 연가주의 둘째 아들이라면, 분명 지난 대전에서…….”
“죽었죠. 그래서 연가에는 그 재가한 아내와 딸만 남았는데. 그 참……. 그 재가한 아내가 본디 연가의 시녀였답니다.”
“그러면 보통은 가문 밖으로 내보낼 텐데……. 보통의 세가라면.”
하무백의 말에 담무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어요. 아무리 연가주의 둘째 아들이 강력히 원했다 하더라도, 시녀 출신의 재취한 아내가 데리고 들어온 딸이 연씨 성을 가지는 것을 연가주가 순순히 허락했을까요?”
지독한 악취가 하무백의 코를 뚫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다.
머릿속의 연하민의 얼굴이 더욱 진해지면서.
“아름다웠나 보군.”
“정말 미치도록요. 무림오화(武林五花) 중 한 자리를 차지할 정도로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 아이의 얼굴을 아는 이가 거의 없어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얼굴을 아는 이가 없는데 어떻게 무림오화가…….”
“연가주가 매담자들을 사서 작업을 친 거죠. 그런데 능히 무림오화라 할 만하긴 해요.”
“어째 넌 그 얼굴을 본 거처럼 말한다?”
“봤죠. 정말 헉 소리나게 아름답더군요. 자, 그럼 연가에서 그 아이와 그 어미의 위치가 어떨까요?”
하무백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연가주에게 아들이 다섯이던가?”
“그중 제대로 된 놈은 둘째랑 막내, 달랑 둘이죠.”
“그중 둘째는 죽었고.”
하무백의 말에 담무흔이 나지막이 물었다.
“어땠을 거 같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