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빌어먹을 맹주놈
“글쎄…….”
“이렇게 세상일에 관심이 없어요. 단주님 그러다가 진짜 등 뒤에서 칼 맞아요. 무림 바닥이 얼마나 더러운데. 권모술수에도 관심을 좀 가지시라고요.”
담무흔의 타박에 하무백은 그저 피식 웃었다. 짐작이 가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땠는데?”
“꽃이니 소중히 간직해야지요. 아~주 소중히. 그래야 비싼 값에 팔죠.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귀한 꽃으로 만들어 놨는데. 거기에다가 쓸데없는 생각은 못 하도록 무공은 절대 못 익히게 했고요.”
그 말에 하무백은 살짝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것 치고는 미약하지만, 연가의 내공이 있었고, 연가의 무공 자세가 살짝 배어 있었던 탓이다.
연가의 제자라면 누구나 익힐 수 있는 입문 기본공이었지만.
‘뭐, 그것도 거의 없는 거나 다름없었지.’
하무백의 머리에 떠오른 연하민의 모습이 이제는 선명해져 있었다.
“정략혼? 뭐 그런 거?”
“그렇죠. 어리고 아름다운 여인이라면 탐낼 인간이 한둘일까요? 뭐, 밖에서만 탐낸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역시나 시궁창 같은 악취가 느껴지더라니.
“쓰레기 새끼들.”
하무백이 짤막하게 말했다.
“연가주가 자식 농사는 제대로 망했죠. 쓰레기가 셋이나 있으니. 뭐 그 중 어느 쓰레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래서?”
“이제 연가의 인물이 교룡관 부관주로 오면, 그녀랑 마주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소식이 연가로 전해지겠군.”
하무백의 말에 담무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교룡관으로 달려오겠지요. 그리되면 담당 교관이 아마 상당히 곤혹스러울 겁니다.”
그리 말하며 하무백을 은근히 바라보는 담무흔.
하무백이 짧은 한숨을 내쉰 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래. 나다.”
애초에 담무흔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하무백이 호북연가에 엮여 들어갈 것 같다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땠습니까? 빙연화(氷蓮花)를 가르치는 건? 정말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데.”
“글쎄. 제법 예쁘다고 생각은 했다만, 그 정도인 줄은 잘…….”
하무백의 말에 이번에는 담무흔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에효. 내가 이 고자 양반이랑 무슨 말을 할까.”
그 말에 하무백이 인상을 확 썼다.
아무리 그래도 고자라니. 이건 선을 세게 넘었다.
“시덥잖은 소리 말고. 진짜 용건이 뭐야? 무영각주가 보낸 거야? 맹주가 보낸 거야?”
무영각(無影閣).
정천맹 내의 비밀 정보조직이다. 맹주 소휘웅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만들어낸, 맹주 직속의 조직으로 그 존재는 철저히 비밀에 싸여 있다.
무영각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였으니.
담무흔의 또 다른 신분, 바로 무영각의 비선이었다.
“참지 말고 그냥 성질대로 하래요. 그래도 연가랑 엮일 거 같으면 미리 알려는 주고.”
“누가?”
“둘 다요.”
그 대답에 하무백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차도살인지계를 너무 대놓고 말하는 거 아니냐?”
하무백을 이용해 연가에 커다란 타격을 주겠다는 의도였다.
중재를 하는 게 아니라 성질대로 뒤집어엎으라니.
“뭐, 이번에 팽가 일로 재미를 좀 보시더니, 은근히 연가도 그리되길 바라는 거 같더라고요.”
“하. 빌어먹을 맹주놈.”
“크크크.”
하무백의 한숨에 담무흔은 웃음을 흘렸다.
“맹주랑 공손영감한테 전해. 그렇게 날 이용해 먹으려면, 맹룡대 좀 제대로 만들어 두라고. 명색이 정천맹이라는 곳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을 데려다가 고기방패를 만들고 있으니. 쯧.”
하무백은 맹룡대에서 생도들을 마주칠 때마다 느끼는 불만을 그대로 말했다.
언젠가 맹주를 만날 일이 있으면 제대로 물어보려 했던 거다.
마침 사람을 보냈으니 말을 전하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열흘쯤 뒤에 전할게요.”
“왜 열흘 뒤야?”
“저 휴가라니까요?”
“진짜?”
“네. 진짜. 단주 새끼 꼴 보기 싫어서 진짜 휴가 쓴 거예요. 가는 길에 겸사겸사 심부름도 좀 한 거고.”
하무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오랜만에 봤는데, 마시자.”
그렇게 두 사람은 몇 달만의 회포를 풀었다.
***
교룡관.
그 현판이 눈앞에 있었다.
연백진은 복잡한 눈으로 그 현판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어쩌다가 이곳까지 온 것인지.
애초에 호북연가는 교룡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교룡관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때문에 연가는 교룡관에 제자를 단 1명도 보내지 않았다.
그랬는데 자신이 교룡관의 부관주라니.
그것도 그자를 견제하는 목적으로 온 것이다.
“하무백이라…….”
사실 한번 만나보고 싶기는 했다.
전쟁의 숨은 영웅.
둘째 형님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으니까.
자신이 존경해마지 않던 둘째 형님이 자신보다 어리지만 진정 존경하는 무인이라 평하지 않았던가.
헌데 자신보고 그 영웅을 견제하란다.
그놈 때문에 팽가가 풍비박산이 났다고.
“애초에 멸공을 익혔으니 그런 거지…….”
그 전에 팽가 전력의 대부분을 혼자서 하룻밤 만에 쓸어버린 것은 정녕 괴물이라 할 만했다.
“아니, 그 정도면 자연재해인가?”
연백진이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런 자연재해를 내가 어떻게 견제해?”
교룡관의 수문위사가 그런 연백진을 수상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교룡관 앞에서 현판을 보며 한숨을 쉬다가 혼자 주저리주저리 중얼거리는 인간이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공후 녀석을 억지로라도 데리고 올 걸 그랬나?”
자신 보다 열 살 어린 조카가 문득 떠올렸다. 세가 내에서 자신과 가장 잘 맞는 녀석이다.
둘째 형님의 아들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나이 차 많이 나는 형님들을 생각하면 조카라기보다는 동생 같은 녀석이었다.
지난겨울의 그 일 때문에 단단히 소가주의 눈 밖에 나서 세가 밖으로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다.
녀석이 뭘 하든 감시의 눈길이 붙었다.
연공후가 모든 것이 다 자신의 소행이라 하는 바람에 연백진에 대한 의심의 눈길은 거두었지만.
어쩌면 이곳으로 보낸 것도 그때 일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었다.
“아버님께서 정하신 일이긴 하지만…….”
요즘 소가주인 형님이 가문의 일은 내팽개치고 미쳐 날뛰고 있으니, 그 원인 제공자로 자신을 내친 걸 수도 있는 일.
게다가 가주의 입장에서는 세가의 소중한 상품을 내다 버린 짓이었으니.
“그래도 잘한 일이야.”
요즘 형님이 미쳐 날뛰는 걸 보고 있자면, 그때 그 아이를 내보내기를 정말 잘한 일이다.
“잘 지내고 있겠지.”
어디로 갔는지는 자신도 몰랐다. 그냥 잘 지내고 있다 믿을 뿐.
연공후는 대강 짐작하고 있는 곳이 있는 듯한 눈치였으나,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때문에 소가주가 연공후를 자신의 눈이 닿는 곳에 두고 감시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그 아이와 연락을 취하지는 않을까 하고.
“저, 혹시 교룡관에 일이 있어 오신 분이십니까?”
그런 연백진을 지켜보길 한참여, 도저히 안 되겠다 생각한 수문위사 하나가 다가와 물었다.
대로 한 가운데 서서, 교룡관 현판을 보며 갖가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인간.
누가 봐도 미친놈이었으니.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기 전에 차단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아!”
그제야 자신의 실책을 깨달은 연백진.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금일 이곳에 발령을 받아 왔는데, 감회가 새로워 그만 넋을 잃고 있었군요.”
“아, 그러시군요. 어느 대로 발령 받아 오셨는지요?”
수문위사로서는 당연한 물음이다.
그냥 봐도 교관으로 발령 받을 연배의 사내였으니까.
얼마 전에도 교관 하나가 새로 오지 않았던가.
“네. 관주각입니다.”
“네?”
관주각이라니.
그곳은 관주의 집무실이 있는 곳 아니던가.
“오늘부로 부관주로 발령 받은 연백진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연백진이 발령서와 함께 받은 신분첩을 내보였다.
“히익. 부, 부관주님을 뵙습니다!”
수문위사는 즉시 정자세를 취하며 예를 올렸다.
“아닙니다. 하하.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정문을 통과하여 멀리 사라지는 연백진.
수문위사들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거, 특이한 양반일세.”
어느 수문위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부관주나 되는 인물이 저런 예를 차리다니. 신기한 노릇이다.
“가만……. 연백진이면 분명.”
누군가 그 이름을 기억해냈다.
“아. 맞아. 호북연가의 막내!”
“허. 호북연가에서 교룡관에 웬일이래?”
“그래도 다행이구만. 막내가 와서.”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호북연가주의 자식들에 대한 소문은 이미 강호에 알음알음 퍼져 있었으니.
***
‘왔군.’
하무백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교룡관 전체를 자신의 기감하에 두고 있는 하무백이다.
란이가 교룡관에 입관한 뒤로 줄곧 그랬다.
그 기감에 호북연가의 무공을 익힌 이가 들어오는 것이 걸렸다.
아마 새로 오는 부관주이리라.
‘그런데 혼자?’
부관주쯤 되는 이라면 세가에서 무사들을 주렁주렁 달고 올 텐데. 결국은 모두 돌려보내게 되겠지만.
관주인 팽도율도 홀로 와있지 않던가.
그것이 교룡관의 관칙이었으니.
허나 정천맹에서도 위세 높은 호북연가라면 일단 수하들을 우르르 끌고 올 거라 여겼다.
그중 몇을 교룡관에 남길 편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헌데 혼자다.
제법 재미있는 사람이 부관주로 온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하무백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 교관님.”
당진산이 불렀다.
“왜?”
“끝났는데요?”
“그래? 그러면 열 번 더.”
쳐다도 보지 않고 하는 말에 당진산의 이마에 내천자가 그려졌다.
“얼굴 찡그리지 말고. 시킬 만하니까 시키는 거다.”
“아무리 그러셔도…….”
“너 자꾸 허리가 비던데? 그건 고쳐야지?”
“헙.”
당진산의 말을 끊고 들어온 하무백의 말에 당진산이 황급히 입을 닫았다.
아니, 보지도 않고 있었으면서 어찌 안 걸까. 저 게으른 교관님은 지금 자신들을 등지고 있지 않던가.
그러고 보니 자신이 얼굴을 찡그린 것도 보고 있는 듯 말했다. 정녕 괴물 같은 양반이다.
“신비고수는 안 봐도 다 안다.”
“아, 그 농담 재미없습니다!”
이어진 하무백의 말에 김이 팍 샌 당진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다시 연무장으로 향했다.
“운뢰는 딛는 발에 힘을 좀 더 줘라. 평은 검에 망설임을 없애. 우진은 팔을 훨씬 강하게 뻗어야 하고. 하민은…….”
이어진 평가들.
생도들은 하무백의 평가를 묵묵히 들었다.
그러던 중 하무백의 말이 멈췄다.
“저는요?”
자신의 차례에서 멈추자 연하민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검에 살기를 좀 죽여야겠다.”
“…….”
연하민이 흠칫 놀랐다.
자신이 그랬던가?
간밤에 악몽을 꿨다. 아마도 그 영향이었으리라.
맹룡대 칠 조에 들어오고 나서 한동안 꾸지 않았던 악몽이었는데.
무슨 일인지 간밤에 그 악마 새끼가 자신의 꿈에 나왔으니.
“그럼 난 이만.”
“네? 열 번 더 하라면서요?”
“가르쳐 줬으니 알아서 고쳐. 내일 확인할 거니까.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알아서 하고. 대신 못 고쳤으면 알지?”
그 말을 남기고 하무백이 걸음을 옮겼다.
“하아. 진짜. 요즘 왜 저러신대?”
당진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날 좀 괜찮아진 거 같더니, 오늘은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나타났다.
교룡관에서 처음 보는 모습이기는 했다.
그리고는 저런 모습이라니.
“그래도 평가는 정확하니까.”
연하민이 짧게 말하고는 검을 들었다.
살기를 죽여라.
‘될까?’
그 악마 새끼의 얼굴이 떠오른 이상, 한동안은 절로 검에 살기가 실릴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