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무슨 일인 거지?
연백진은 천천히 교룡관 내를 걸었다.
일단 목적지는 관주각.
그곳에서 도착했음을 알려야 했다. 자신의 상급자는 관주인 팽도율이 유일했으나, 그는 현재 부재중이다.
딱히 알려야 할 상급자는 없었으나, 실무를 보는 무인들과 관리들에게 부관주가 도착했음은 알려야 했다.
발령서는 연백진 자신보다 먼저 도착했을 테니.
수문위사가 기별을 한 것일까?
관주각 정문에서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우락부락한 인상의 무인이 있었다.
연백진이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
연백진을 알아본 그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혹시 연백진 부관주님이십니까?”
“부관주로 발령을 받아 오긴 했습니다만.”
연백진의 대답에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한 그는 연백진의 손을 꽉 잡았다.
“정말, 정말 잘 오셨습니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초롱초롱한 두 눈동자는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알렸다.
저런 인상에 저런 눈빛이라니.
“대체 이게…….”
연백진이 질겁한 얼굴로 서둘러 손을 빼며 물었다.
“이런. 초면에 큰 무례를 범했습니다. 전 부관주님 직속으로 배정된 수행위사 기유찬이라 합니다. 편하신 대로 불러주시면 됩니다.”
사십 대 초반으로 보였다. 얼굴을 가득 덮은 수염은 그의 인상을 더욱 사납게 만들었다.
“네. 알겠습니다. 헌데 이곳에서 저를 기다리신 겁니까?”
“네. 부관주님. 어서 가시지요.”
기유찬은 잡아끌듯 연백진을 안내했다. 그리고 관주각의 1층부터 빠른 속도로 안내를 이어갔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는 듯한 속도.
‘이게 대체…….’
“그리고 이곳이 부관주실입니다. 집무실이이죠. 부관주님의 관사는 퇴근하실 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곳 위 오 층은 관주실만 있기에 당장은 가실 일이 없으실 겁니다.”
인상과는 달리 일처리가 굉장히 빠릿빠릿했다.
“그럼 이쪽으로.”
부관주실을 열고 먼저 들어가는 기유찬.
그 뒤를 따라 막 발을 내딛던 연백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시선은 문과 마주 보고 있는 서탁에 고정된 채, 잘게 떨렸다.
서류 더미에 파묻힌 자리에 아마도 서탁이 있을 것이라 추측케 하고 있었으니.
“이게 대체…….”
이번에는 생각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입을 뚫고 말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었다.
정말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관주님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결재가 필요한 서류들이 쌓인 겁니다. 가뜩이나 그런 일이 터져서 관주님께서 언제 복귀하실지 모르던 터라…….”
팽가의 흉사에 대한 일은 이미 이곳 교룡관에도 퍼져 있었다.
“전 관주가 아니라 부관주…….”
“부관주님 발령서와 함께 다른 명령서가 함께 왔습니다. 몇 가지 중대한 사안을 제외하고는 부관주님께서 관주님을 대행해서 결재가 가능하십니다.”
‘아마도 그러라고 만들어 보낸 부관주 직위가 아닐까 싶습니다’라는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무슨…….”
“해서 원래 관주님 직속 수행위사였던 제가 부관주님 직속으로 이동했습니다. 관주님 직속 수행위사는 모두 세 명이라, 제가 빠져도 큰 무리가 없는 데다 업무에 대한 조언을 드리려면 그편이 좋아서요. 정확한 인사는 관주님 복귀 후에 아마 조정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어서 시작하시지요.”
기유찬은 연백진의 등을 떠밀어 서탁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그 옆에 따로 빼둔 서탁에 앉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난 교룡관에 오늘 막 도착했고, 아는 것도 아무것도…….”
“그래서 제가 여기 있는 겁니다. 전부 알려 드리겠습니다. 여기, 이게 제일 급한 사안입니다.”
그러면서 서류를 불쑥 내밀었다.
연백진은 혼이 빠진 얼굴로 그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식자재에 관한 것 같았는데, 자신이 알게 뭐란 말인가. 오늘 막 도착했거늘.
“큭. 큭큭큭.”
관주각의 처마 밑 그늘 아래.
그늘과 완벽히 동화되어 있던 하무백이 웃음을 흘렸다.
담무흔에게 들은 것이 있었기에, 부관주로 온 이가 어떤 사람인지 잠깐 확인차 들렀는데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오자마자 서류 산에 파묻히다니.
“뭐, 관주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서 교룡관이 삐걱거리긴 하고 있지.”
바로 그 원인을 만든 것이 하무백이었지만, 알게 뭐란 말인가.
팽가주는 그럴 만한 짓을 저지른 것일 뿐.
***
“후아…….”
연백진은 깊은 한숨을 쉬며 관주각을 잠시 나왔다.
잠시 나온 거다.
곧 다시 들어가 봐야 한다.
기유찬이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에 별이 총총히 떠 있었다.
새까만 밤하늘.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시각이 대강 가늠이 갔다.
“빌어먹을. 축시(01~03시) 초라니.”
교룡관에 도착한 것이 오후 나절이다.
그리고 관주각에 들어간 것은 그 잠시 후.
그때 집무실에 들어간 후, 바깥에 나온 것이 지금이 처음이다.
그야말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서류만 봤다.
기유찬 역시 곁에서 열심히 일만 했기에. 분위기에 휩쓸려 버린 것이다.
소변을 핑계로 잠시 쉬자는 이야기에 기유찬이 준 시간은 불과 일각.
부임 첫날부터 제대로 갈려 나가고 있었다.
그런 연백진을 보며 즐거운 듯이 신나게 일하던 기유찬의 광기 어린 얼굴을 떠올리자 절로 몸이 떨렸다.
‘잘못 온 건지도……. 별거 아닐 거로 생각하고 왔건만…….’
세가에서 감시당하고 있을 조카 녀석이 못내 그리웠다.
다시 생각하니 그 녀석을 꼭 데리고 왔어야 했다. 그래야 저 미칠 듯 많은 일을 조금이라도 나눠서 하지.
혼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연백진.
그를 멀찍이서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하무백이었다.
“허… 참…….”
낮은 탄성이 하무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팽가에서 팽도율을 만났을 때, 그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관주가 이렇게 자리를 비우면 교룡관은 어쩌는 거요?
-괜찮네. 그곳에 기유찬이라도 일에 미친놈이 하나 있어서. 어떻게든 굴러갈 걸세.
아까 왔을 때, 부관주 보좌역의 수행위사가 기유찬이라 소개하는 것을 들었다.
과연 팽도율이 그리 말할 만했다.
연백진이 어떤 인간인지 잠시 알아볼 요량으로 관주각에 올 때마다,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전부 기유찬 탓이다.
기유찬이 연호량을 업무에 단단히 묶어 놓고 있었다.
‘나도 슬슬 졸린데…….’
낮잠을 실컷 자뒀지만, 이미 축시에 들어섰다.
이 깊은 밤이면, 낮잠을 잤더라고 졸리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이깟 졸음 쫓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졸릴 때, 그 졸음에 몸을 맡겨 편안하게 잠드는 게 좋았다.
하무백이 걸음을 살짝 옮겼다. 기척을 전혀 지우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가 적막한 밤하늘에 작게 울렸다.
그 소리에 연백진이 반응했다.
“응? 누구시오?”
연백진의 시선이 하무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무백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무표정한 얼굴에 꾹 다문 입술.
그 모습에 연백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관주각 앞마당이다. 이곳에 이리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인물이라면 아마도 교룡관의 인물일 터.
“맹룡대 교관 하무백이요.”
그러나 그의 고민은 순식간에 멈췄다.
상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 때문이었다.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저 이름 역시 알고 있었으니.
‘하무백…….’
지난 전쟁의 숨은 영웅.
그리고 이번에 팽가를 박살을 낸 숨은 범인.
강호에 소문은 신비고수의 소행으로 알려졌지만, 백도회의 핵심인물들은 그 신비고수가 하무백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교관님이시군요. 관주각에는 어쩐 일이시오?”
하무백은 연백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을 직시하는 하무백의 시선에 잠깐 멈칫한 연백진은 이내 탄성을 흘렸다.
“아. 실례했소이다. 호북연가의 연백진이라 하오. 오늘, 아니 어제부로 교룡관 부관주로 부임하였소이다.”
“그냥 밤산책 중이었소.”
하무백이 무뚝뚝히 말하고 몸을 돌렸다.
“저…….”
그때 연백진이 무언가 말을 꺼내려 했다. 아무래도 하무백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 목적은 이루지 못했다.
“부관주님. 일각이 지났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일에 미친 수행위사 기유찬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연백진이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자 그를 잡으러 직접 나선 것이다.
그 목소리는 하무백도 들었다.
속으로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일에 미쳤네.’
***
전날 기유찬 덕에 늦게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일까.
하무백은 느즈막이 눈을 떴다.
그리고 느긋한 걸음으로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칠 조 생도들은 늘 그랬다는 듯, 이미 익숙하다는 듯 각자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무백은 자신의 지정석이 된 바위에 앉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은 나아졌군.”
어제 지적했던 것들이 조금 개선되어 있었다.
하루 사이에 이만큼이나 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다만.
“흐음.”
하무백이 물끄러미 연하민을 바라보았다.
살기는 죽였다. 완벽히.
대신 검이 떨렸다.
심하게 떨렸다.
실력이 오히려 퇴보한 모습.
거기에 연하민 그녀 홀로 수련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무백이 도착한 후 계속해서 그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지 않던가.
다른 네 사람이 자신의 검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는 것과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들었나 보군.’
새로 부관주가 왔다.
그것도 정문을 통해서 당당히 들어와 관주각까지 갔었지.
기감을 통해 연백진이 움직인 동선은 모두 알고 있는 하무백이었다.
그리 움직였으니, 하룻밤이면 그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데는 충분했다.
소문 퍼트리기 좋아하는 호사가들도 많은 교룡관이고.
연하민이 그 소식을 들은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무백이 연하민을 향해 살짝 눈짓했다. 힐끔거리며 하무백을 쳐다보다, 그 신호를 본 연하민이 검을 검집에 넣고는 하무백을 향해 다가왔다.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는 것 같군.”
“…….”
“살기를 죽이라 했는데, 그냥 모든 걸 다 죽였어.”
“…….”
하무백의 담담한 평가에 연하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다른 네 명의 조원이 두 사람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그들도 집중이 깨진 것이다.
“잠깐 좀 걷지.”
하무백이 바위에서 내려서 앞장섰다. 연하민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교룡관의 외곽을 따라 인적이 없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무백이 기감으로 주변을 살피며 걸었기에 반경 3 장(약 9미터)안에 사람은 없었다.
그에 더해 기막을 펼쳐 소리까지 차단했다.
움직이면서 기막을 펼치는 것은 고정된 곳에 펼치는 것보다 훨씬 상승의 수법이었다.
하무백은 그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펼쳤다.
물론 연하민은 그 낌새조차 느끼지 못했다.
“새로 온 부관주 때문인가?”
우뚝.
불시에 정곡을 찌르고 들어온 하무백의 물음에 연하민은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그곳. 호북연가였던 건가?”
가만히 멈춰 서서 땅만 내려다보는 연하민.
연이어 정곡을 찌르는 물음에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일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나?”
“무슨…….”
“너희들이 무시를 당하면, 내가 기분이 더러울 거 같다고.”
“아!”
연하민은 그때를 떠올렸다.
도림의 개새끼 하나가 자신을 희롱하면서 벌어졌던 사달.
“시작이야 어쨌든 너희는 내 생도들이다. 그 상대가 도림이든, 호북연가든 말이야.”
하무백의 말에 연하민의 두 눈이 잘게 떨리며 붉게 물들었다.
“그럼 이제 이야기를 제대로 나눠볼까? 무슨 일인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