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66화 (66/312)

66화. 능구렁이 같으니

“…….”

연하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무백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쉽게 나올 말이라면, 지금까지 숨기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하무백은 그저 말없이 걸었고, 연하민이 그 뒤를 따랐다.

제법 걸었다.

반경 3장이 아니라 30장 안에 아무도 없을 정도로 외진 곳에 도달했을 즈음.

연하민의 입이 열렸다.

“어머니께서는 의창에서 작은 다루를 운영하셨어요. 제 친아버지는 제가 태어난 지 백 일도 되기 전에 사고로 돌아가셨고. 아버지께서 남기신 다루를 어머니께서 홀로 힘겹게 운영하셨죠.”

여자 혼자 딸을 데리고 다루를 운영이라.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게다.

게다가 연하민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그녀 어머니의 미모는…….

‘온갖 똥파리가 꼬였겠군.’

안 봐도 하무백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일이다.

“무척 힘겨운 나날이었다고 들었어요. 전 그때의 기억은 거의 없으니…….”

무언가 그녀의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깊은 회한이 가득한 목소리다.

“제 기억의 시작은 다섯 살 무렵이에요. 제 아버지, 그러니까 계부를 처음 만난 날이에요. 오늘부터 내가 아버지라며 함께 가자 하셨지요. 이제부터 너는 주하민이 아니라 연하민이라고.”

그녀의 두 눈은 하늘 높은 곳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움이 가득한 눈빛이다.

하무백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연가주의 둘째 아들.

세간은 그를 연가의 용이라 평가했다. 지난 전쟁에서 안타깝게 명을 달리했지만.

“어렸던 저는 이제 나도 아빠가 생겼다고 신나 했지만……. 어려서 몰랐던 거죠. 그게 지옥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연가에 들어가고 나서 알았어요. 어머니가 본래 연가의 시녀였고, 제 친아버지와 만나 결혼하면서 연가를 나왔다는 것을…….”

많은 것이 생략된 이야기일 것이다.

그 사이에 있을 절절하고도 기구한 사연은 듣지 않아도 절로 머릿속에 그려졌다.

하무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게 가만히 기다렸다.

“진짜 지옥은 아버지가 지난 전쟁에서 돌아가신 다음부터였어요. 어머니께서는 연가를 떠나길 원하셨지만, 가주가 허락하지 않았죠.”

가주를 언급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원한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가 계시지 않은 연가는……. 짐승들의 소굴일 뿐이었습니다.”

그리 말하며 연하민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 짐승들의 눈빛이 기억난 것이다.

“저를 바라보는 욕망, 아니 욕정에 미친 짐승들의 눈빛이……. 그곳에 사람은 단 셋뿐이었어요.”

‘세 명이라……. 하나는 어머니일 테고, 나머지 둘은?’

하무백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그중 둘의 도움 덕에 그 지옥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 말하는데도 그녀의 눈빛에는 괴로움이 가득했다.

“어머니를 그 지옥에 남겨두고요…….”

뒤이어 나온 말이 그 괴로움의 원인이리라.

“그런 것치고는 이곳은 연가의 지척 아닌가?”

호북연가가 자리한 의창은 무창과 지척이다. 장강수로의 요충지 두 곳이었으니 배로 금방이었다.

“오라버니가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어요. 그리고 연가가 가장 힘을 못 쓰는 곳이 오히려 호북성이라고. 더군다가 교룡관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고. 지금까지 교룡관에 단 한 명의 제자도 보내지 않을 정도라고 말이지요.”

하무백은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한 혜안이었다.

호북성의 정세는 상당히 복잡했다.

무당산의 무당파.

융중산의 제갈세가.

의창의 호북연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중 세 곳이 호북성에 있었다.

자연 그들 사이의 신경전이 치열했다.

거기에 더해 무창에 있는 교룡관은 정천맹의 세력.

그야말로 중원의 십삼 성 중, 세력들의 경쟁이 가장 치열한 곳이었다.

연가가 교룡관에 무관심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무당파와 제갈세가를 견제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무당파와 제갈세가 역시 마찬가지.

다만 차이라면 그 두 곳은 그래도 자파의 제자를 교룡관의 교관으로 보내기는 한다는 것이다.

고작 그 정도였다.

교룡관의 위치가 무창으로 옮겨진 데는 그런 그들의 역학 관계도 작용했다.

‘공손 군사. 그 능구렁이의 작품이었지.’

그러니 연하민을 찾겠다고 천하를 뒤지는 연가라 하더라도, 정작 자신들의 앞마당인 호북성을 제대로 뒤지지를 못했다.

‘거기에 더해 팽관주가 사정도 봐준 거 같고.’

교룡관의 다른 이는 몰라도, 팽도율은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에게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그녀를 은연중 보호해준 것이다.

훗날 발각될 시, 연가와 불편해질 수 있음에도.

‘아마 사정을 알았던 모양이고.’

사실 그럼에도 허술해도 너무 허술했다.

이름조차 본명을 그대로 썼으니.

맹룡대는 고기 방패를 구하는 곳이다. 신분 확인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충분히 신분을 더 숨길 수 있음에도 본명을 쓴 것은 기껏 연가를 벗어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너무 허술한 행동이었다.

“오라버니는 이름도 바꾸고 지내라 했어요. 그런데 그러면 훗날 오라버니가 절 찾기 어려울 거 같아서…….”

“오라버니가 찾아온다고 했나 보군.”

“네. 상황이 조용해지면 꼭 오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상황이 여전히 어려운 형편일 터.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아버지도 재취를 하신 거라. 저보다 일곱 살 많은 오라버니인데……. 친오라버니보다 더 친오라버니 같았어요.”

연하민이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

그리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동생을 연가에서 내보냈다니.

담무흔에게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그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을 지 충분히 추측이 가능했으니.

“그럼 강해지려는 이유는?”

“어머니를 데리고 와야 하니까요.”

연하민이 고개를 들고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 눈빛은 결연했다.

“혼자서? 연가를 상대로?”

연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강해져야 할 텐데?”

“각오하고 있습니다.”

연하민의 두 눈이 결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흐음.”

하무백이 팔짱을 끼며 긴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용건은 그건가?”

하무백의 물음에 연하민이 고개를 저었다.

“새로 왔다는 부관주가 누군가요?”

저 물음을 던지기 위해 지금껏 길고 긴 이야기를 한 것이다.

하무백의 대답을 기다리는 연하민의 두 눈이 잘게 떨렸다.

하무백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이미 그 이름까지 파다하게 퍼졌을 텐데.

“누구인지 듣지 못했나?”

“연가에서 온 이라고만 들었어요. 그 말만 듣고도 온몸에 소름이 돋아……. 더 이상은 알아보지 못했어요.”

“연백진.”

하무백이 짤막하게 말했다.

“아…….”

그 말에 연하민이 풀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게다.

“다, 다행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도 연가에 있다던 세 사람 중 마지막 하나가 연백진이었던 듯하다.

“호량 숙부도 제가 연가를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신 분이에요. 그 분이라니……. 다행이네요.”

하지만 하무백의 생각은 달랐다.

그가 그녀를 도와줬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녀를 만난 이후에는 그 사실을 연가에 숨길 수가 없을 터다.

그게 세가의 일원이었으니.

어쩌면 이미 연하민의 이름을 맹룡대 명단에서 확인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기유찬이 들이미는 그 엄청난 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보기 싫어도 보게 될 터.

그 이름을 보면 혹시나 하고 확인하러 칠 조의 연무장에 올 것이고.

그녀를 확인하면.

“연가가 뒤집어지겠군.”

“네?”

하무백의 작은 중얼거림에 몸을 일으키던 연하민이 되물었다.

“너희는 내 생도라고 했던 말 기억하지?”

“네? 네.”

조금 전에 했던 말 아닌가.

“그러면 나를 믿어라.”

“네.”

연하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서 계속 수련하도록. 강해지려면 아직 한참 부족하다.”

그 말을 끝으로 하무백은 연무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할까.’

하무백의 머릿속은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생각이 자리했다.

연가는 연하민의 존재를 확인하면 분명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이다.

그 행동이 자신의 생도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쯧. 공손 영감. 능구렁이 같으니.’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예상했을 거고, 담무흔을 통해 자신에게 전언을 보낸 것이다.

자신이 연가를 뒤집어엎더라도 맹에서는 최대한 개입하지 않겠다는 거다.

‘뭘 미리 알려줘.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

정천맹에 있을 그 영감의 면상을 떠올리며 살짝 인상을 쓰는 하무백.

살짝 기분이 나쁘긴 했다.

공손 영감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줘야 하는 가라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연하민을 생각하면 어쩔 수가 없었다.

공손 영감이 하무백의 성정을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

하무백은 호천단에 있을 때도 그랬다.

자기 사람은 끔찍이도 챙겼으니.

어거지로 떠맡게 되었다 생각하지만, 어쨌든 칠 조 생도들은 그에게는 제자나 다름없는 존재다.

어느새 하무백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만난 지 이제 고작 반년쯤 된 녀석들임에도 말이다.

‘가만…….’

그때 문득 드는 생각.

어쩌면.

‘날 이곳에 박아둔 게 공손 영감 아니야?’

언제고 맹에 갈 날이 있으면 반드시 확인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팽가의 일도 그렇고. 이번 연가의 일도 그렇고.

그 덕을 보는 곳은 신진팔대방파였다.

백도회의 세력이 줄어드는 일이니.

‘신진팔문. 이놈들도 한 번 족쳐야 하나?’

하무백이 교룡관에 와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면.

백도회든 신진팔문이든 그놈이 그놈이라는 거다.

맹주인 소휘웅이나, 군사인 공손단경은 강호의 새로운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구시대의 망령인 백도회의 세력을 꺾고 신진팔문의 세력을 키워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 세력의 균형을 통해 강호의 정의를 바로 세우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놈이 그놈이야.’

교룡관의 잠룡대와 와룡대, 그리고 맹룡대.

맹룡대의 입장에서 잠룡대와 와룡대를 보고 있자면, 그들 둘은 똑같았다.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위에 서서 군림하려는 자들.

하무백이 보기에는 신진팔문도 이미 기득권이었다.

‘공손 영감. 날 이용해서 백도회 세력을 줄이려고 계획한 게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당신 실수한 거야.’

그랬다.

명백한 실수다.

적어도 맹내에 있을 때, 호천단에 있을 때의 하무백은 그들의 이상에 어느 정도 공감을 했으니까.

정천맹의 본맹이라는 우물, 그중에서도 호천단이라는 아주 작은 우물에서 하무백이 본 세상은 그것이 맞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우물 밖으로 나와서, 교룡관이라는 연못에서 본 세상은 달랐다.

백도회뿐만 아니라, 신진팔문.

그들도 이미 또 하나의 특권층이 되어 있었다.

전쟁 전에는 그렇지 않았을지 몰라도, 그 지긋지긋한 전쟁이 강호를 바꿔 놓았다.

신진팔문이라는 새로운 특권층을 탄생시켰다.

‘무림의, 강호의 정의는 어떤 세력이 세우는 게 아니야…….’

의식의 확장이 거기에까지 도달할 때쯤, 하무백도 연무장 근처에 도착했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렸다.

선객의 기척이 느껴진 탓이다.

생각에 너무 깊이 잠겼던가.

‘빌어먹을 맹주놈과 군사 영감 같으니.’

자신이 잠깐이나마 기감을 놓아 버린 것은 순전히 그 둘 때문이었다.

하무백은 살짝 걸음을 옮겨 연하민의 몸을 자신의 뒤로 가렸다.

선객 때문이다.

“아, 하 교관님. 오셨군요.”

연무장 한쪽에 서서 네 생도의 훈련을 보고있던 연백진이 하무백을 발견하고는 반색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연하민이 흠칫 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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