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나를 믿어라.
여전히 피곤에 쩔은 모습의 연백진이다.
하무백을 반가운 얼굴로 맞던 연백진의 표정이 일순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무백 근처에서 익숙한 기척을 느낀 탓이다.
하무백에게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더욱 쉽게 느낀 기척.
연백진 역시 절정을 넘어 초절정을 바라보는 수준에 이른 고수였기에 느낄 수 있었다.
‘실수했군.’
하무백은 스스로의 어설픔을 자책했다. 자책으로만 끝내기엔 치명적인 실수다. 그녀에게서 사정을 들은 것이 불과 조금 전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 기척은 금세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가려졌다.
하무백이 존재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오?”
하무백의 물음에 연백진은 반가운 기색을 띠며 말했다.
“일전에 우연히 만났을 때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만,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 해서요. 망할 기유찬 위사 때문에 말입니다.”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이다.
어제 오후 즈음에 부임해서, 이제 점심때가 다 되어 가는 시간.
아니 곧 점심시간이다.
느즈막히 나온 것도 있었지만, 연하민과 보낸 시간도 적지 않았다.
“그럼 식사라도 함께 하시겠소?”
하무백의 제안에 연백진이 반색을 했다.
“그러고 보니 곧 점심때로군요.”
그 와중에 연백진은 하무백 뒤를 힐끔거렸다.
하무백이 드러낸 강대한 존재감이 지워버린 기척. 그건 분명 그의 기억에 있던 것이었으니.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하무백 뒤편으로 있는 몇 그루의 나무 뒤로 누군가가 있는 듯도 하였지만, 굳이 하무백이 감추려 하는 것을 들추려 하지 않았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기에,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아니, 사실은 살필 이유도 없었다.
찰나간 그 기척을 느낀 순간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으니.
좀 달라지긴 했으나, 자신이 몰라볼 수 없는 기척이었다.
“그럼 가시지요. 어디로 가시렵니까?”
연백진이 발을 떼며 물었다.
“멀리 갈 것 있겠소? 담룡각이 좋겠군.”
그러면서 하무백의 걸음은 북쪽으로 향했다. 동담룡각으로 가려면 연하민이 몸을 숨긴 곳을 지나쳐야 하는 탓이다.
연백진이 하무백의 등 뒤를 한 번 힐끔 쳐다본 후 싱긋 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 하 교관님이 좋아하시는 식단이 종종 나온다고요?”
불과 하루 만에 하무백의 식단까지 파악했다.
의외라는 눈으로 하무백이 연백진을 바라보았다.
“아, 별거 아닙니다. 빌어먹을 기유찬 위사 덕이니.”
대체 그가 만들어내는 업무 서류의 범위는 어디까지란 말인가. 하무백의 식성에 대한 내용까지 있다니.
불과 하루 만에 연백진이 저리 폐인 꼴이 될 만도 하다 싶었다.
‘그보다. 눈치챘군.’
마지막에 보인 연백진의 웃음.
하무백은 그 웃음에서 그가 연하민의 존재를 알아차렸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 북담룡각의 식단은 평이했다. 하무백이 좋아하는 식단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식사를 즐겼다.
신변잡기 같은 이야기를 주로 나누었으나, 주로 연백진이 묻고 하무백이 답했다.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그들의 대화에 관심을 보였으나, 들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연백진이 펼친 기막 때문이었다.
“둘째 형님이 지난 전쟁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전해주셨습니다.”
얼마나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연백진이 문득 그리 입을 열었다.
“훌륭한 무인이었소.”
하무백이 짤막하게 말했다. 그 대답에 연백진이 빙그레 웃었다.
막내인 자신과 나이 차가 제법 나는 둘째 형님이었다.
큰형님보다 오히려 더욱 듬직한, 그랬기에 자신의 우상이었던 둘째 형님.
그가 전쟁에 출전한 이후 간혹 세가에 왔을 때 들려주는 이야기나, 편지를 통해 알려주는 이야기는 연백진의 웅심을 자극했다.
그 중,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전쟁의 최전선에서 무지막지한 전공을 세우는 한 무인에 대한 이야기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비록 자신보다 어렸지만, 자신의 영웅이었다.
그랬기에 지금도 이리 존대를 하며 대하는 것이다.
그만한 자격이 있었기에.
정파 무림은 그 영웅을 숨겼기에, 더 대우받아야 할 사람이었다.
당금 정파 무림이 그렇지 않았기에 그저 안타까울 뿐.
그런 영웅이 그 아이를 돌보고 있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돌아가신 형님이 그 아이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기에, 그럼에도 세가에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얼마나 가슴 아팠던가.
“둘째 형님은 제 우상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인 형님이 한 영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연백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진해졌다.
추억에 젖은 미소다.
“그랬기에 그는 저에게도 그 사람은 영웅이었습니다. 비록 세상이 그에게서 눈을 돌린다 해도요.”
하무백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 영웅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그…….”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그 아이가 그 영웅의 그늘 아래에 있어서 다행입니다. 형님이 그 아이를 무척이나 아끼셨거든요.”
어느새 식사를 마친 것인가.
연백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도 그 아이가 제 눈에 띄지 않기를 바랍니다. 제가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저도 세가에 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꺼낼 때 연백진의 웃음은 씁쓸하게 변해 있었다.
세가의 사람이였기에 세가를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소였다.
“흠.”
하무백은 하려던 말을 삼키고 침음을 삼켰다.
“제가 그 영웅을 존경하는 이유는 제가 못하는 것을 거침없이 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씁쓸한 웃음이다.
“이제 그만 가야 할 때인가 봅니다.”
연백진의 말에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무백은 진작에 그 기척을 느꼈다.
기유찬이 북담룡각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연백진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부관주님!!!”
기유찬의 외침이 귀를 뚫을 듯 들려왔다.
“그래, 그래. 어서 가세.”
연백진은 질린다는 얼굴로 기유찬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루 간 얼마나 시달렸음인지, 어느새 평대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하무백은 그렇게 사라지는 연백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묘한 친구야…….’
정말로 묘했다.
***
“에휴. 살았다.”
당진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목운뢰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새로 온 부관주다.
그런 인물이 무려 이각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지 않았던가.
“대체 왜 우리를 보고 있었던 걸까?”
“교관님께 볼 일이 있던 눈치던 대?”
당진산의 중얼거림에 대한 답은 백리평에게서 나왔다.
“아무튼 정체를 모르겠단 말이야. 우리 교관님.”
당진산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쯤 연하민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어!”
당진산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으나 그녀의 표정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하무백과 함께 연무장을 떠날 때보다 더욱 안 좋았다.
“뭐야? 왜 그래?”
당진산의 물음에 연하민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초조한 얼굴로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 뿐이다.
‘보지는 못했을 텐데……. 그래도 막내 숙부정도의 고수라면 아마도…….’
세가에 있을 때는 몰랐다.
그러나 교룡관에 와서 무인으로 수련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상승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면 상대의 기척을 느낄 수 있음을.
그리고 그녀가 아는 연백진의 경지라면 아마도 자신의 기척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 불안함이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 자리했다.
연하민의 모습에 다른 네 사람의 얼굴에 걱정이 어렸다.
“나는 잠깐 좀…….”
연하민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도무지 연무장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 길로 연룡숙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진정되지 않는 불안을 애써 멈추기 위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을 시도 했으나 좀처럼 집중할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보냈을까.
[잠깐만 그대로 듣기만 해.]
갑자기 들려온 전음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목소리는 익숙했다.
하 교관이었으니.
하지만 대체 자신이 이곳에 있는 것을 어찌 알았단 말인가.
그리고 대체 어디에서 자신에게 전음을 보내는 것이고.
정말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연 부관주가 네 존재를 눈치챈 것 같다.]
연하민의 눈동자가 세차게 떨렸다.
[다만, 보지 못했으니 자신은 모른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어.]
그 말에 연하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어떤 의미일까.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다. 한동안은 그가 밖으로 나다닐 여유는 없어 보이니.]
조금 전에도 기유찬에게 연행되듯이 끌려가지 않았던가.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전까지는 쉬이 집무실을 벗어나지 못 하리라.
오늘이 굉장히 특이한 경우였다.
괜찮다는 말에 불안함이 조금은 가셨다. 그 말을 해주는 이가 하 교관이라 그런 것일까.
[그래도 같은 교룡관에 있는 이상 아마도 곧 알려질 거다.]
다시금 가슴이 요동을 쳤다.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나를 믿어라. 지금처럼 불안해하지 말고.]
그 말이 끝이었다.
그냥 믿으라는 그 말.
밑도 끝도 없는 말이었으나, 왜일까. 다시금 묘하게 불안이 사라졌다.
비로소 그녀는 운공에 집중할 수 있었다.
깊은 밤이다.
축시 초(대략 01시)에 접어든 시각.
이제야 기유찬의 마수에서 벗어나 자신의 침상에 몸을 누일 있었다.
“후아. 빌어먹을 기유찬.”
이제는 그냥 입에 붙은 말이다.
“혼자 오기를 잘했어.”
이윽고 담담히 중얼거리는 연백진.
억지로 조카 녀석을 데리고 왔더라면, 그 녀석을 감시하는 눈도 따라왔을 터.
그랬다면 그 아이는 바로 발각이 되었을 터다.
일단 자신 혼자 이곳에 왔기에 시간은 벌었다.
설마 이곳에 있을 줄이야.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지만.”
자신마저 상상조차 못 했으니 다른 이들은 어떻겠나.
그것도 맹룡대다.
정천맹의 고기방패 맹룡대.
그 사실을 떠올리고는 눈살을 찌푸렸으나 이내 얼굴을 폈다.
그 아이를 담당하는 교관이 누구인지 떠올렸기 때문이다.
“정말 못 말릴 녀석.”
조카 연공후를 떠올리자 절로 흘러나오는 말이다.
역시나 뛰어난 아이였다. 세가 모두를 속였으니.
자신을 미끼 삼아 그 아이에게 자유를 주었다.
이제야 그 반응이 이해가 되었다.
교룡관의 부관주로 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녀석에게 운을 떼기는 했었다.
세가 안에서 답답하게 있지 말고 자신을 도와주는 게 어떠냐고.
녀석은 무심하게 거절했었다.
“세가에 있어서 답답한 게 아니라, 현재 자신은 세상 어디를 가더라도 답답한 처지이니, 그냥 이곳에 있겠다고 했던가…….”
너무 무심히 대답했기에 교룡관을 피하려고 그리 말했다고는 상상도 못 했다.
완벽히 속아 넘어간 것이다.
자신이 그랬으니, 다른 이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
역시나 뛰어난 녀석이다.
아마도 세가의 모든 이들 중 가장 뛰어나리라. 적어도 연백진의 평가는 그랬다.
“이제 어쩐다…….”
그의 고민이 깊어질 무렵.
[혹여라도.]
갑자기 귀에 들리는 전음.
[연가에 소식을 전할 일이 생긴다면.]
전음임에도 스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팽가 꼴이 날 각오가 되어 있으면 교룡관으로 오라는 말도 함께 전하도록.]
광오하고 무례한 말이다.
하지만 연백진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저 전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할 때이다.
그 아이를 보게 되었을 때, 진정으로 연가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후우. 공후 이 빌어먹을 녀석아. 어쩌자고 나에게 이런 숙제를 내주었느냐…….”
연백진이 교룡관의 부관주로 가게 될 줄은 연공후도 미처 예상치 못한 일 일터.
그럼에도 그의 원망은 조카를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