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69화 (69/312)

69화. 어찌한다.

‘교룡관에 도착한 지 열흘이 넘도록 두문불출이라더니……. 과연 그럴 만하기는 하군.’

동주산은 질린 표정으로 연백진 앞에 놓은 서류 더미를 바라보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기척을 흘릴 뻔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수행위사라는 작자의 언행을 들어보면.

미친놈 같았다.

‘그래도 확실히 능력은 있어. 본가에 데려다 놓고 싶을 정도로.’

다만 그랬다가는 십 중 십의 확률로 연백량에게 목을 베일 것이다.

자신의 주인은 수하들에게 감추는 것이 많은 인물이었기에.

지금 교룡관에서 보여주고 있는 능력을 연가에서 발휘했다가는 죽은 목숨인 것이다.

‘저렇게 업무에 파묻혀 있으면, 교룡관에서 특별히 무언가를 꾸밀 시간은 없었을 거 같긴 한데…….’

이번에는 자신의 감이 틀렸단 말인가.

동주산이 눈썹을 찌푸렸다.

이곳에 오면 연하민과 관련된 어떤 단서가 있을 것 같았는데.

동주산은 조심스레 움직여 위치를 바꿨다.

그렇게 자리한 위치에서는 현재 기유찬이 작성하고 있는 서류가 모두 보였다.

일필휘지로 휘갈기는 그의 붓놀림은 눈으로 따라가며 읽기에도 벅찼다.

그럼에도 정보를 머리에 담아두는 그는 습관적으로 서류에 집중했다.

‘응? 방금?’

언뜻 지나간 두 글자.

분명 하민이었던 것 같다.

하민.

특이할 것 없는 이름이다.

이 드넓은 강호에 얼마나 많은 하민이라는 사람들이 있을까.

다만 이번에도 그의 감이 저 이름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본가에서 연백진을 대할 때, 미세하나마 반응이 있었던 연공후의 모습에서부터 이어지는 감이었다.

‘흠. 어찌한다.’

하무백이 눈썹을 찡그렸다. 미간에 주름이 졌다.

방금 저놈이 읽은 서류를 하무백 역시 읽었다. 한 글자도 빠짐없이. 자세히.

별다른 서류는 아니다.

연룡숙의 인원현황이었다.

‘정말 쓸데없이 사소한 것까지 챙기는 인간이로군.’

쥐새끼 놈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반응을 보니 무언가 낌새를 느낀 듯했다. 그래도 연하민이라는 이름 석 자를 모두 보지는 못한 모양이다.

전부 봤다면 이곳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연룡숙을 찾아 움직였을 테지.

연가에서 온 놈인 이상.

저놈을 죽여서 입을 막는 것은 쉬웠다. 다만, 그것은 연가에 교룡관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꼴밖에 되지 않으니.

[그대로 들으시오.]

하무백의 선택은 연백진을 향한 전음이었다.

갑작스러운 전음에 움찔할 만도 한데 연백진은 태연하게 업무를 보고 있었다.

보통 인물은 아니었다.

[연가에서 쥐새끼가 붙었소.]

“크음. 큼. 큼.”

하무백의 이어진 전음에 연백진은 마른 기침을 내뱉었다.

“왜 그러십니까?”

갑작스러운 기침 소리에 기유찬의 시선이 연백진에게로 향했다.

“목이 칼칼하니 건조해서 말일세.”

그러면서 연백진은 다 식은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차를 새로 가져오라 일러야겠군요.”

연백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닐세. 이곳 공기도 답답하고 하니 일각 정도 바람만 좀 쐬고 오겠네.”

집무실을 비우겠다는 말에 기유찬이 잠시 움찔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열흘 가까운 시간 동안 연백진이 어떻게 업무를 처리했는지 보아왔기에 믿음이 생긴 터다.

“다녀오십시오. 차를 새로 준비해 두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연백진은 집무실을 벗어나 관주각 후원으로 향했다.

서쪽에서 내리쬐는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그늘진 곳에 자리하고 가만히 서 있는 연백진.

작은 바람이 살랑이며 머리칼을 간질였다.

[쥐새끼가 따라 움직였소. 확실히 부관주를 감시하러 온 거군.]

뒷짐을 지고는 무심히 후원을 바라보는 연백진.

동주산은 모든 신경을 집중해서 그런 연백진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후원으로 나온 것에 무언가 있다 느낀 것이다.

[조금 전 기유찬 위사가 살피던 서류에 연하민의 이름이 있었소.]

하무백의 전음에 연백진은 살짝 걸음을 옮겼다. 깜짝 놀란 심정을 감추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자신이 왜 집무실에만 있었던가.

연하민을 마주치지 않기 위함이었는데, 자신이 처리하는 서류에 그 아이의 이름이 있다.

그리고 가문에서 붙인 감시자가 자신의 업무를 지켜보고 있고.

그렇다면 언젠가 서류에서 그 아이의 이름을 확인할지도 모른다.

[저 쥐새끼를 처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나, 타초경사가 될 수도 있으니.]

이어진 전음에 연백진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가 다시금 땅을 내려다보았다.

나름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아직 햇살이 제법 뜨겁구나.”

담담히 중얼거리 연백진이 걸음을 돌려 다시금 그늘 아래로 들어갔다.

‘수상한데…….’

그 모습이 동주산의 눈에는 이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감을 확장하고 집중해 봐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연백진 홀로 있을 뿐.

‘저놈을 어찌한다.’

하무백은 고민이 많은 얼굴로 동주산을 바라보았다.

저놈이 저렇게 연백진을 지켜보고 있는 이상 연백진과 특별한 대화를 나눌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에게 전음을 보낼 수 있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전음을 보낼 수 없었으니.

교룡관에 무언가 있다는 낌새를 주지 않으려니 행동에 제약이 너무 많았다.

그 사이 일각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연백진은 다시금 집무실로 움직였다. 그사이 따뜻한 찻주전자가 서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것일까?

연백진은 서류 더미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십니까?”

“화급한 것부터 정리해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일세. 워낙 양이 방대해서 일단 닥치는 대로 처리했네만, 이제는 그 정도 여유는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

연하민의 이름이 올라가 있는 서류는 대부분 사소한 내용들이다.

원래라면 관주나 부관주가 검토할 리 없는 서류.

그것을 저 일에 미친 기유찬이 모두 올리고 있는 것이다.

화급을 다툰다는 것은 일의 중요도가 높다는 것. 그런 것들부터 보다 보면 아무래도 연하민의 이름은 서류에 없을 터.

“자네도 일단 중요도가 높은 것부터 정리해서 넘겨주게나.”

“알겠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기유찬은 자신이 작성하던 서류를 마무리 지은 후, 그도 서류 정리를 진행했다.

[밤에 찾아가도록 하겠소.]

쥐새끼의 눈을 속여 연백진과 대화를 나누려면 어둠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잠입과 감시에 특화된 놈의 눈을 속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다만 그러면 연백진 역시 자신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연백진이 자신의 위치를 특정하면서, 놈이 자신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면 어둠의 힘을 빌려야 했다.

축정(丑正).

축시의 한 가운데(새벽2시).

야심한 밤이다.

이 시간에야 연백진은 겨우 자신의 침상에 몸을 누일 수 있었다.

동주산은 그런 연백진을 따라붙었다.

그 시간 동안 연백진은 자신의 기감을 최대한 예민하게 버려 감시자를 찾으려 했지만 사소한 흔적 하나 느끼지 못했다.

그의 이목을 완벽하게 속이고 있는 것이다.

‘이 정도의 인물이라면…….’

연백진은 기억 속 큰 형님의 수족들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최측근 중 한 명이 온 듯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자신의 기감을 이리도 완벽히 피할 수 없을 테니.

[몸을 돌려 누우시오. 머리 위쪽 방 모서리 부분.]

그때 들려오는 하무백의 전음.

연백진은 자연스레 몸을 돌려 누우면서 실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어스름히 비치는 그림자.

모르고 봤다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모습이고, 알고 봤다 하더라도 유령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유령환상보(幽靈幻像步).

주변과 완벽히 동화되는 은잠신법으로 하무백이 전쟁 중 우연한 기회에 얻어 익힌 것이다.

어둠의 힘을 빌어 더 완벽해졌기에, 하무백이 연백진에게 위치를 알려주고 은신을 살짝 풀었기에 그가 발견할 수 있었다.

연백진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동주산으로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었다.

[참으로 대단하군요. 그곳에 있음을 알고 바라봄에도 아무것도 없으니.]

[잡술일 뿐이오.]

연백진 전음으로 전한 감탄에 하무백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무백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기에 이제 연백진도 하무백에게 전음을 보낼 수 있었다.

[쥐새끼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창밖. 누군지 아시겠소?]

[큰 형님의 최측근 수족 중 하나일 겁니다. 얼굴을 본다면 알 수 있겠으나……. 그래도 창밖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제가 기척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면…….]

연백진은 하무백이 전한 감시자의 위치에서 한 인물을 특정할 수 있었다.

연백량의 수하 중 이렇게 은신에 뛰어난 자는 단 하나였다.

그랬기에 의문이 생겼다.

그는 분명 공후 녀석을 감시하고 있었기에.

공후가 그 아이와 언젠가는 연락을 할 거라는 믿음에 그놈을 공후에게 붙여 놓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내게…….’

자신은 그리 중요하게 감시할 일이 없었다.

그 아이가 가문을 떠날 때, 공후의 부탁에 몇 가지 일은 해줬을 뿐이다.

자신에게 그 아이의 행선지는 알리지 않았으니.

자신도 이곳에 와서 그 아이의 기척을 읽고는 얼마나 놀랐던가.

[동주산이라는 자일 겁니다. 가문에서 은신 능력은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자입니다. 형님이 수족 중에서는 제일이지요.]

[해서 어찌해야겠소? 저놈이 부관주를 감시하면서 관내를 들쑤시면 분명 발견할 텐데?]

[곤란한 일이군요. 그가 발견하면 급보로 형님께 소식이 전해질 터이니.]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군.]

하무백이 무심히 작게 중얼거리듯 전음을 보냈다.

눈을 감은 채 몸을 뒤척이던 연백진을 이불을 끌어 올려 얼굴을 덮어썼다. 그리고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그 끔찍한 일이 무엇인지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골치 아프군.’

실로 그랬다.

자신이 이곳으로 발령을 받고 동주산 저놈이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이곳에 온 이상 그 아이의 존재가 발각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공후야. 공후야. 너는 대체 어떤 그림을 그렸던 게냐. 아무리 등하불명이라 하지만…….’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숨기기는 했다. 무려 반 년 남짓한 시간 동안 아무런 흔적을 못 찾았으니.

아니 지금도 못 찾고 있음이다.

[일단 시간을 좀 벌어주겠소. 어찌할지 생각해보시오.]

귀찮은 일은 떠넘기기로 한 하무백이다.

사실 연가도 쓸어버리면 간단한 일이다. 다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스승의 말씀 때문이었다.

그래도 가족이니.

그녀의 의견도 들어야 했기에.

그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의 원흉만 처리할까 라는.

[소가주만 내가 처리하면 어떻겠소?]

불현듯 날아온 하무백의 물음.

연백진은 이불 속에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욕정에 미쳐서 금수만도 못한 짓을 벌이려 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그의 피붙이였다.

[제가 어떻게든 수를 찾아보겠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주시지요.]

무슨 수가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하무백이다.

명문세가라는 놈들의 행태는 이미 팽가에서 겪지 않았던가.

피가 전혀 섞인 남이라지만, 어쨌든 명목상은 조카이다. 그런 아이에게 욕정을 품는 쓰레기 따위는 없애는 것이 가장 간단할 진데.

몸에 밴 피 냄새를 빼고 있는 와중이니 함부로 피를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스승님을 믿어야지.’

동생을 두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 내키지 않았으나, 이곳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스승이 함께 있다.

그랬기에 하무백은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잠시 현장 학습 좀 다녀오겠소.]

[네?]

뜬금없는 말에 연백진이 물었다.

[내년 초쯤에 한 번 데리고 가려 했는데, 이참에 다녀오면 될 듯하오. 혹시라도 꼬리가 붙으면 처리하기에도 부담이 없고.]

[무슨 말씀이신지?]

[관을 잠시 떠나있을 테니, 필요한 절차는 대강 처리해주시오. 기 위사가 쓸데없는 서류 작성 못 하게 막아주고.]

하무백은 그 말을 남기고 훌쩍 사라졌다.

연백진은 아무런 낌새를 느끼지 못했기에, 같은 장소로 계속 전음을 보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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