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74화 (74/312)

74화. 성급해. 그리고 멍청해.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는 연백량과 동주산, 그리고 연공후였다.

동주산으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연백량은 터질 듯한 분노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이제 만족하느냐?”

연백량은 연공후를 노려보며 물었다.

“네 잘난 술책 덕에 네 동생은 저주받은 땅으로 가고, 우리 연가는 고작 하오문 따위의 칼 노릇을 하게 되었구나.”

연공후는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백부. 백부가 인륜을 저버린 욕망을 품지만 않았어도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일입니다.’

지금 발생한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연백량에게 있었다.

연백량은 자신의 잘못은 전혀 생각지 않고 오직 연공후만을 탓했다.

연하민을 자신이 가지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연백량이 동주산을 돌아보며 말했다.

“준비해라.”

“네?”

동주산의 반문에 연백량이 눈살을 찌푸렸다.

“죽고 싶은 게냐? 소재를 알아 왔으니, 이제 데리러 가야 할 것 아니냐. 하찮은 하오문 놈들의 의도대로 움직인다는 것이 짜증 나긴 한다만……. 그 아이를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어느 정도로 준비를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전력의 구 할.”

그 말에 동주산과 연공후는 두 눈을 부릅떴다.

가주가 부재중인 상태에서 가문의 대소사를 관장하고 있는 소가주인 연백량이다.

그가 가진 권한은 어마어마했다.

지금 그가 말한 대로 전력을 동원한다면 연가가 가진 힘의 사 할에 가까운 인원이 움직이는 것이다.

“뭘 그리 놀라느냐? 팽가의 전례가 있지 않느냐. 거기에 하오문 놈들이 끼어들어서 부채질하고 있고. 또 놈의 역린도 잡아야지. 그러자면 그 정도는 움직여야 하지 않겠느냐. 사흘 안에 출발할 것이다. 서둘러라.”

“아, 알겠습니다.”

동주산이 고개를 숙이고 나섰다. 할 일이 많았기에 마음이 급했다.

“네 놈도 함께 간다. 네 놈이 저지른 만행의 결과는 네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라. 쓸모없는 놈.”

연백량은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섰다.

방에는 이제 연공후 홀로 남았다.

‘하오문이 우리를 끌어들인 것인가… 아니면 하무백 그가 하오문을 끌어들인 것인가…….’

연공후는 동주산이 가지고 온 정보 그 너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아귀가 딱딱 맞아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리고 있는 그림처럼.

연공후의 생각에 지금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공은 아무래도.

‘하무백. 연가와 하오문이 그의 손끝에서 놀아나고 있는지도.’

연공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 길을 떠나야 하니 준비해야 했다. 연가의 가솔인 이상 소가주의 명을 따라야 했으니.

“오랜만에 보겠구나.”

다만 그가 따를 명은 어디까지나 함께 산월마림으로 가는 것이다.

그곳에 도착한 다음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

“이곳이…….”

단목운뢰가 정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거대한 장성이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성 너머로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는 듯했다.

긴 여정이었다.

그 여정 끝에 결국은 도착했다.

산월마림(山越魔林).

그 저주받은 땅을 막아서고 있는 산월장성(山越長城).

“헌데 아무도 없군요.”

백리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봉마단이 산월장성 모든 곳을 지킬 수는 없지. 우리가 도착한 곳은 산월마림 중에서도 조용한 곳이다. 즉, 경계도 허술한 곳이란 뜻이지.”

하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 대답에 당진산이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하무백을 쳐다보았다.

교룡관의 교관이 어찌 산월마림의 현황에 대해 이토록 잘 아는 걸까.

‘봉마단의 배치 지역은 정천맹의 기밀 아닌가?’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

그것도 제법 등급이 높은 기밀일 터다.

헌데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하는 맹룡대 교관이라니.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이가 자신들의 교관이었다.

“어떻게 가나요?”

연하민이 물었다.

산월마림으로 간다고 했다.

그렇다면 장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 아무리 봐도 장성은 굳건한 성벽일 뿐이다.

어디에도 문이나 계단 같은 통로는 없었다.

“넘어야지.”

하무백이 여전히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리고는 가볍게 땅을 박차고는 그대로 성벽을 사뿐사뿐 딛고 올랐다.

정말 가볍게 산책을 나온 듯한 움직임이다.

성벽의 벽돌과 벽돌 사이의 틈에 발끝을 딛고는 가볍게 움직이는데.

너무 쉬운 듯한 그 모습에 생도들은 마치 자신들도 당연히 그것을 할 수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렇게 하무백은 순식간에 성벽 위에 올랐다.

그리고 아래를 내려다 보고는.

“쉽지?”

짧은 말을 남기고 모습을 감췄다.

“하.”

당진산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뱉었다. 그 속에는 분노가 들어 있었다.

단목운뢰가 벽돌 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봤다.

안 들어간다.

손가락 끝 반의반 마디가 들어갈까 말까 하니 안 들어간다고 하는 것이 맞다.

“여길 딛고 올라간다고?”

단목운뢰가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교관님!!”

낙우진이 성벽을 올려다보고 외쳤다.

불쑥 다시 하무백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저희는 어떻게 하나요?”

낙우진이 다시 외쳤다.

“알아서 올라와라. 올라오는 것도 수련이다.”

칠 조 생도 다섯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도무지 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백리평 역시 곤혹스러운 얼굴이다.

다섯 사람의 시선이 슬그머니 돌아서는 한설빙에게로 향했다.

그 시선에 한설빙이 생긋 웃었다.

“난 이십 조 교관이란다.”

도와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무슨 성벽이 이렇게 무식하게 만들어진 겁니까?”

당진산의 물음에 한설빙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괴물들이 넘어오지 못하게 막아야 하니까. 그나마 그 괴물들이 강시들이기에 이 정도로 겨우 막을 수 있는 거야.”

진지한 한설빙의 대답에 칠 조 생도 다섯은 질린 듯했다.

이런 엄청난 곳에 자신들이 일 년 조금 더 뒤에 내던져지는 것이다.

한설빙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의 생도 두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할까?”

“스스로 올라 보겠습니다.”

주우명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옆에서 하설란 역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뭐, 그렇게 한다면야. 그럼 나도 먼저 가 있을게.”

한설빙의 몸이 솟구쳤다.

그녀는 양손과 양발을 사용해 성벽을 올랐다. 벽호공과 경공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한 움직임.

한설빙 역시 오래지 않아 성벽 위로 올랐다.

생도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맹룡대 교관으로 있을 실력이 아니었다.

일곱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제 어쩌지?”

당진산의 물음.

“일단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 시도 해봐야할 듯합니다.”

주우명의 말이다.

“응?”

당진산이 되물었다.

“알아서 올라오라 하셨으니, 수단과 방법 역시 저희 좋을 대로 하라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주우명의 대답에 당진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 같아. 수단과 방법을 제한할 거였으면, 저 망할 교관이 조건을 걸었겠지.”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백리평이 조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미 단목운뢰가 손가락으로 틈새를 찔러 보는 것을 모두 보았다.

맨손으로 불가능하다.

그들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도 이 정도는 무리야.”

주우명이 단목운뢰, 백리평 등의 시선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결국 도구를 써야겠네.”

당진산이 결론을 내렸다.

“저, 이건 어떤가요?”

하설란이 품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는 벽돌 틈으로 단검을 박아 넣었다.

어느 정도 박혔다.

“바로 그거야!”

당진산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자신의 혁낭에서 단검을 꺼냈다. 열 자루가 나왔다.

틈새로 꽂아서 힘을 줘보니 어느 정도는 버틸 만큼 박혀 들어갔다.

“단검 가진 것들 있어?”

당진산의 물음에 모두 혁낭을 뒤졌다. 각자 서너 자루의 단검은 챙겨 왔다.

기본 보금품이었으니까.

모두 등에 혁낭을 매고 양손에 단검을 쥐었다.

그리고 벽돌 틈에 단검을 박아넣으며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하무백이 힐끗 그런 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성급해. 그리고 멍청해.”

언짢은 듯 짧게 말했다.

그 와중에 걱정 어린 눈빛으로 하설란을 바라보았다.

“흐음. 쉽지 않을텐데. 저렇게 무턱대고 올랐다가는…….”

한설빙이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꼬으며 중얼거렸다.

하무백과 한설빙이 너무 쉽게 올라와서 저들이 착각하는 것이다.

도구를 쓴다 해도 산월장성의 성벽은 높았다.

저렇게 오르다가 중간에 체력이 떨어지거나, 내공이 모두 떨어지기라도 하면 벽에 매달린 채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분한 표정으로 중간에 멈춰 선 연하민.

그녀가 가장 먼저 탈락했다.

내공은 아직 남아있으나, 근력과 체력이 떨어졌다.

팔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은 채 부들부들 떨렸다.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단목운뢰였다.

“왜 그래?”

“못 움직이겠어.”

단목운뢰의 물음에 연하민이 힘겹게 답했다.

“진산! 잠깐만 멈춰봐!”

단목운뢰의 외침에 모두들 그대로 멈춰 섰다.

이윽고 현 상황을 파악했다.

가장 많이 올라간 이는 주우명이었다. 절반 정도 올라가 있는 상황.

연하민은 삼 분의 일 정도 위치에서 탈진한 상태였다.

상황 파악이 끝난 주우명이 모두에게 외쳤다.

“일단 다시 아래로 내려갑니다.”

모두 그 외침에 따랐다.

단목운뢰와 하설란이 연하민을 도와 아래로 내려갔다.

“하민이 가장 먼저 탈진하긴 했지만, 오히려 그게 다행이었어. 우리가 아직 힘이 남아있을 때였으니까.”

주우명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탈진한 상태로 성벽 높은 곳에 매달린 상태가 되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게다가 이제 날도 저물고 있지 않은가.

“미안. 내가 너무 성급했어.”

방법을 찾자마자 무턱대고 그걸 이용해 올라가자 했던 당진산이 사과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였어요.”

주우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일단 오늘은 노숙하고 내일 다시 시도해 보자. 밤사이 방법을 고민해보고.”

백리평의 말에 당진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런데. 문득 든 생각인데…….”

단목운뢰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응?”

당진산의 물음.

“사다리는 안 되는 거야?”

이어진 단목운뢰의 말에 당진산은 입을 턱 벌렸다.

생각지도 못했다.

무인이니 당연히 벽을 기어 올라가야 한다 생각했다.

“아니. 그 우리가 강시는 아니잖아. 저 성벽 자체는 강시가 넘어오는 걸 막으려고 만든 거고. 우리는 사실 방패도 사용하는데. 방패까지 가지고 가려면 차라리 사다리를 사용하는 게 어떤가 해서. 병법서에도 보니 병사들이 공성을 할 때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게 사다리이기도 하고.”

단목운뢰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주절주절 말을 늘어트렸다.

다른 여섯 사람은 그런 단목운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무 간단한 해법이다.

자신들은 왜 저 생각을 못 하고 무식하고 단검을 박아가며 올랐을까.

분명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들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그 방법이 있었네…….”

주우명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게…….”

당진산이 힘없이 말했다.

“어? 그러면 그래도 되는거야?”

단목운뢰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그래도 되는 거지. 우리가 너무 바보 같았네.”

백리평이 말했다.

“죄송해요.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제가 괜히 단검을 꺼내서.”

하설란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아니, 아니야. 그냥 이건 내가 멍청한 거야. 당가의 제자가 사다리조차 떠올리지 못하다니.”

당진산이 쓴웃음을 지었다.

“두 교관에게 우리가 속은 거지. 그렇게 성벽을 타고 올라가는 모습을 보여줬으니, 어떻게든 무공을 사용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낙우진이 속은 것이 분하다는 듯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곧 다른 생도들도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날 밤은 편안하게 보냈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일곱 생도는 주변의 나무를 잘라 사다리를 만들었다.

당진산의 진두지휘 아래 일사분란하게 만들어 점심 무렵 완성했다.

그리고 손쉽게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올랐다.

“아주 멍청하지는 않군.”

하무백이 담담히 말했다.

그런 교관을 바라보는 생도들의 표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으나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하무백이 그들이 타고 올라온 사다리를 들어 올려 반대편 성벽에 놓았으니까.

“이제 내려간다.”

그 말에 절로 마른침이 꿀꺽하고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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