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이쪽 말고 저쪽.
생도들이 하무백이 옮겨놓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때.
하무백은 혁낭에서 밧줄 꺼냈다.
성벽 곳곳에 밧줄을 단단히 묶었다.
모든 생도가 각자 하나씩 잡고 성벽을 탈 수 있는 숫자의 밧줄을 준비한 후에야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에는 이미 한설빙이 가장 먼저 내려가 있었다.
마림이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반경 삼 장 정도는 나무 한 그루 없는 평지였다. 다른 곳들과 다르게 이곳만 이런 지형인 듯했다.
“저 밧줄은 뭔가요?”
당진산이 물었다.
“이 정도 사다리는 강시도 타고 올라올 수 있다.”
그 말을 마치고 하무백은 사다리를 산산조각을 냈다.
“하지만 밧줄은 아니지.”
하무백이 밧줄을 팡팡 당기며 말했다.
“물론 강시가 일 장(약3미터) 정도는 뛰어오른다. 한 번의 도약으로 말이지. 그러니 너희들도 최소한 일 장은 뛰어오른 후 밧줄을 타고 재빨리 성벽 위로 올라야 한다.”
하무백의 설명에 생도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이 중에 한 번의 도약으로 일 장을 뛰어오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성벽의 높이는 4장.
산월마림을 장성으로 둘러싼 이유가 이것이었다.
강시는 성벽을 오르지 못한다.
“질문 있습니다.”
당진산이 손을 들었다.
“뭐지?”
“장성으로 둘러싼 후 강시가 성벽을 오르지 못한다면……. 굳이 봉마단이 이곳을 지키고, 맹룡대를 투입할 이유가 있나요?”
타당한 의문이다.
성벽을 오르지 못하는 놈들을 성벽으로 둘러쌌으니.
“한 개체는 도약 높이가 일 장이 한계라 성벽을 넘지 못한다만. 여러 개체가 모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네?”
“놈들이 협동이라는 걸 하더라고. 서로가 서로를 밟고 성벽을 올라. 물론 개체수가 상당히 많이 모였을 때만 예외적으로 그러지만.”
나머지 대답은 한설빙이 해줬다.
“그래서 최대한 개체수가 늘어나지 않게 관리를 해줘야 해. 그 임무를 맡은 것이 봉마단. 그런 봉마단을 보조하는 것이 맹룡대.”
한설빙의 설명에 다들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너희들이 이곳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한 번의 도약으로 일 장 이상을 뛰어올라 밧줄을 붙잡아 최대한 빠른 속도로 성벽을 타고 오르는 연습이다. 그게 숙달돼야 강시를 상대한다.”
하무백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도망치는 법 먼저 배우는 건가요?”
단목운뢰의 질문이다.
“물론이다. 안전 확보 그게 가장 중요하다. 너희들은 어디까지나 실습을 하러 와 있는 거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한다.”
하무백이 성벽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선을 그었다.
“이곳에서부터 달려와서 성벽 앞에서 도약한다. 목표 높이는 첫 번째 매듭까지.”
밧줄을 자세히 보니 중간중간 매듭이 만들어져 있었다.
지형도 일부로 이런 곳을 고른 듯했다.
성벽 바로 앞까지 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는 곳은 달려가는 것이 불가능했지만.
여러모로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한 교관의 모습이었다.
하무백의 지시에 따라 일곱 생도는 전력으로 달려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하지만 근처에도 간 이가 없었다.
“내공을 최대한 활용해라. 바닥을 박차는 순간 전신의 근육에 내공을 불어넣고 용천혈에서 내공을 내뿜는다는 느낌으로. 경공의 기본이다.”
하무백이 일곱 사람의 움직임을 보며 외쳤다.
그나마 성과가 가장 좋은 이는 주우명이었다. 그다음이 백리평.
일 장까지는 안 되더라도 일곱 자(약 2.1미터)정도는 뛰어올랐다.
그 사이 한설빙은 주변을 둘러보러 움직였다. 최외곽이긴 하지만 일단 산월마림에 들어온 상태다. 언제 어디서 강시들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리고 오랜만에 온 터라, 강시놈들의 세력 분포가 달라졌을 수도 있고.
대략 한 시진이 지났다.
일곱 생도는 모두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더 이상 뿜어낼 내공도 없었다.
휴식을 알리는 하무백의 말에 모두들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때, 한설빙이 돌아왔다.
“어때?”
“주변에는 없네요. 그래도 혹시 몰라 일단 조치는 취해뒀어요.”
“수고했다.”
한설빙은 한 시진 사이에 기진맥진한 생도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무식하게 가르치실 거예요?”
한설빙이 못 말린다는 얼굴로 하무백에게 물었다.
“어려운 길을 먼저 가야지. 쉬운 답부터 알려주면 버릇 나빠져.”
하무백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당진산의 귀가 쫑긋거렸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것이다.
역시나 저 망할 교관이 자신들을 일부러 굴리고 있구나 싶었다.
하무백과 당진산이 눈이 마주쳤다.
재빨리 고개를 돌리는 당진산.
“뭔가 불만인 거 같은데?”
하무백이 그런 당진산을 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뭐, 교관님께서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
무언가 퉁명스러운 말투.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무당에서 익힌 경공 중에 어기충소의 묘리를 이용하는 것은 없나 보군?”
하무백의 질문이 주우명을 향했다.
어기충소는 땅을 박차고 단번에 위로 높이 솟아오르는 경공이다.
“네. 무당의 경공 중에 그런 경공이 있긴 합니다만, 저는 익히지 않았습니다.”
“너도 마찬가지이고?”
백리평을 향해 던진 질문이다.
“네.”
하무백이 일곱 사람을 둘러보며 말했다.
“한 시진 동안 발바닥에 땀나도록 해봐서 알겠지만. 너희들이 익힌 경공과 현재 너희들의 수준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 매듭은 못 잡는다.”
단호한 말.
허나 다들 그러려니 했다. 이런 것이 처음도 아니고.
다 교관님이 계획이 있겠지. 그런 심정이다.
당진산만은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한 시진 동안 고생한 것은 그 과정을 몸에 조금이라도 새기기 위함이다. 그 과정을 겪고 나면, 새로운 경공을 익히는 게 좀 더 쉬워지니까.”
단목운뢰와 연하민의 두 눈이 빛났다.
새로운 무공을 배운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오늘은 모두 고생했으니 이만 쉬도록 하지. 내일부터 새로운 경공을 배울 거다. 쉬는 곳은 성벽 위다. 밧줄을 타고 올라가면 된다.”
하무백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당진산은 교관의 저 친절한 웃음이 왠지 수상했다.
그때.
“그 전에. 설란과 하민은 날 따라와.”
한설빙이 그리 말하며 두 사람을 숲속으로 데리고 갔다.
“어, 어. 위험하지 않나요?”
“한 교관이 함께 가잖아. 괜찮아.”
당진산의 물음에 하무백이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오래지 않아 세 사람이 돌아왔다.
“어디 갔다 온 거야?”
당진산이 궁금한 듯 연하민에게 물었다.
“알 거 없어.”
연하민이 고개를 돌리며 날카롭게 답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진산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과연 자신이 물은 것이 저런 반응을 보일 만한 것인가 하고 고민하며.
“자, 이제 올라가자.”
하무백의 말에 저마다 밧줄을 하나씩 잡고 성벽을 타고 올랐다.
잠시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도약 훈련으로 전신의 체력과 내공을 모두 소모한 상태.
밧줄을 잡고 성벽을 타는 것도 쉽지 않았다. 팔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래도 반 각 정도의 시간 만에 성벽에 오를 수 있었다.
간단한 육포와 건량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천막을 치고 모포를 깔아 적당히 자리를 만들었다.
그즈음 동쪽 하늘부터 어둠이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저…….”
낙우진이 조심스레 입을 열며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뭐지?”
“용변은 어떻게 하나요?”
하무백이 싱긋 웃었다.
“설마 이곳에서 해결할 생각은 아니겠지?”
낙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당연히 내려가야지.”
“저곳에요?”
얼굴이 핼쑥해져 물었다. 강시들이 있다는 저주 받은 땅이라 하지 않았나.
게다가 이제 어두워지고 있었다.
고작 용변 때문에 그런 곳에 내려가야 한다고?
낙우진이 고뇌에 빠졌다.
“이쪽 말고 저쪽.”
하무백이 손가락으로 반대편을 가리켰다.
“아.”
낙우진은 그제야 반대편은 산월마림이 아니라는 것을 떠올렸다.
하무백이 혁낭에서 밧줄을 꺼내 묶어 주었다.
“갔다 와라.”
“네.”
낙우진은 서둘러 밧줄을 붙들었다.
그사이 제법 급해졌으니.
‘저, 저…….’
당진산은 그제야 하무백의 웃음이 수상해 보였던 연유를 깨달았다.
“올라오기 전에 말씀해주실 수 있었잖아요.”
당진산이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고작 용변 때문에 밧줄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와야 한다니.
“저기서? 올라오기 전에 말해주면? 혼자서 해결은 할 수 있고?”
“그야 교관님께서…….”
거기까지 말하던 당진산은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말을 멈췄다. 그리고 연하민과 하설란은 힐끗 쳐다보았다.
얼핏 연하민과 눈을 마주친 것 같았다.
얼굴이 붉게 물든 그녀가 사납게 노려보았다.
당진산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때 갔다 온 거구나.’
이제야 연하민의 그 날카로운 반응의 이유를 깨달았다.
충분히 수긍할만한 이유였다.
“난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하무백의 대답에 당진산의 얼굴이 구겨졌다.
“각자 알아서 다녀와라. 밤에 자다가 깨서 혹시나 방향 헷갈리지 말고. 가급적 지금 다녀오는 걸 추천한다.”
그 말에 슬금슬금 자리에서 일어서는 남자 생도들이다.
자다가 깨서 방향 헷갈리지 말라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상황 아닌가 말이다.
아무래도 미리미리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
준비는 전광석화와 같이 이루어졌다.
연가의 무력부대의 무인들의 숫자는 대략 일천.
그 중 연백량이 동원할 수 있는 이들을 모두 동원했다.
그 수가 무려 사백 명이다.
팽가에서 그놈과 붙어서 철저히 패퇴했을 때의 인원이 삼백이다.
그보다 백 명이 더 많은 인원이었다.
그리고 연가의 무사들이 팽가보다 한 수 아니 몇 수는 위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이 준비를 고작 이틀 만에 해냈다.
그것도 전원 말을 타고 있었다.
쓸만한 기마 사백 필은 연가로서도 굉장히 부담이 되는 숫자다.
가문에 있는 말을 모두 동원해도 택도 없는 숫자.
그 수효의 말을 단 이틀 만에 동주산이 구해온 것이다.
“수고했다.”
연백량이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한시가 급한 때에 동주산의 일처리가 마음에 든 것이다.
“육로로 최단거리로 주파한다. 모두 출발!”
연백량의 외침과 함께 사백 필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땅을 울렸다.
연공후는 연백량의 곁에서 말을 달렸다.
연백량의 명 때문이다.
일단 첫 번째 목적지는 무창.
교룡관이 자리한 곳이다.
그렇다고 교룡관에 들릴 계획은 없었다.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
그곳으로 가는 이유는 하나다.
하무백이 그곳에서 출발했기에, 그곳으로 가면 어디로 갔는지 흔적이 있을 것이다.
눈으로 쫓을 수 있는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겠지만, 이 일에 끼어든 이들이 알아서 길을 알려주리라.
하오문이 있으니.
동주산이 연가에 도착한 다음 날, 동주산이 객잔에서 마주쳤던 두 사람이 연가에 도착했다.
의뢰를 넣은 이가 동주산이었기에 그가 직접 그들을 만나 연하민의 소재를 들었다.
역시나 산월마림으로 향하고 있다고 했다.
도착 전이기는 하나, 그들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는 대로 알려주겠다 했다.
자신들이 무창에 도착할 때쯤이면 대강의 경로 정도는 알려오리라.
출발부터 강행군이었다.
정말로 말이 탈진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를 유지하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무창에 도착했을 때, 하오문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그가 길잡이로 계속해서 달렸다.
한시라도 빨리 도착해야 했다.
그래서 하무백 그 잡놈에게서 연하민 그 아이를 찾아야 했다.
“목을 씻고 기다리고 있어라. 하무백.”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말을 달리며 연백량이 중얼거렸다.
과연 자신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는 생각지 않은 채, 그저 분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