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뭐, 내가 몰긴 했지
“뭐, 뭐야?”
당진산이 놀라서 외쳤다.
“어, 어, 어떻게 하지?”
낙우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판단은 단목운뢰가 가장 빨랐다.
“도망쳐!”
막 검을 곧추세우던 주우명은 그 말에 생각을 달리 먹고는 검을 내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땅을 박찼다.
나머지 생도들도 성벽을 향해 달렸다.
“크우우우.”
“캬아… 캬아아아아…….”
사강시들이 기괴한 울음을 흘리며 달려왔다.
이미 싸워 봐서 알고 있지만 그 속도가 결코 느리지 않았다.
그래도 발견이 빨랐기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달릴 수 있었다.
다행히 생도들 중 그 누구도 사강시보다 느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성벽에 도착했다.
도착했다 싶은 순간 발바닥으로 내공을 뿜으며 몸을 날렸다.
주작비천.
어제 하루 동안 익혔던 경신법.
여섯 사람의 신형이 곧장 삼 장 위로 솟구쳐 올랐다.
밧줄을 붙잡은 이들은 서둘러 성벽을 타고 올랐다.
“아.”
하지만 한 사람.
연하민은 아니었다.
뛰어오른 높이는 고작 이 장.
결코 낮은 높이는 아니었으나, 현 상황에서는 일 장이 모자랐다.
내공 운용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인가.
급작스러운 상황에 머릿속이 헝클어지며 복잡해졌다.
그 모습을 본 단목운뢰가 외쳤다.
“어서 성벽을 타고 올라!”
그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은 실제 상황이다.
다급하기 그지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은 왜 삼 장을 뛰어오르지 못했는지 원인을 고민하다니.
정신 빠진 짓이다.
단목운뢰의 말대로다. 어떻게든 현 상황에서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양팔에 내공을 잔뜩 불어넣었다. 양다리도 마찬가지.
힘껏 성벽을 박차며 오르기 시작했다.
일 장이다.
일 장만 오르면 된다.
서둘렀다.
여섯 생도의 손발은 밧줄을 타고 성벽을 오르고 있었으나, 시선은 아래를 향했다.
연하민은 아래를 확인할 정신이 없었다. 위만 보며, 최대한 빨리 올라야 했다.
여섯 생도의 눈에 긴장이 어렸다.
간절함도 어렸다.
연하민이 막 삼 장을 표시해둔 매듭 위를 움켜쥐는 순간.
“카아아아악!!!”
가장 앞에서 달려오던 사강시가 훌쩍 뛰어올랐다.
“아악!”
하설란이 그 모습에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교관의 말대로였다.
사강시는 순식간에 삼 장을 뛰어올랐다.
삼 장을 뛰어오르는 강시라니.
자신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는 전혀 다른 괴물이었다.
그런 생도들의 심정과는 상관없이 사강시의 손끝이 연하민의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 기척을 느끼는 순간.
연하민은 사력을 다해 팔다리를 움직였다.
긴장과 공포에 몸이 뻣뻣하게 굳을 법한 상황이건만.
흑표와의 일전을 경험한 덕일까.
연하민은 최후까지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그 노력에도 한계는 있었다.
사강시의 손톱이 막 연하민의 허리 언저리를 할퀴려는 찰나.
서걱.
섬뜩한 절삭음과 함께 사강시의 팔이 잘려 나갔다.
한설빙의 검이었다.
“계속 올라가도록.”
담담한 한 마디.
연하민은 계속해서 성벽을 타고 올랐다.
이어서 아홉 개체의 사강시들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으나 그 어떤 것도 생도들에게 닿지 못했다.
그들의 손끝이 닿은 곳은 딱 삼 장을 표시한 매듭 어림의 성벽이다.
위기에서 벗어났기에 일곱 생도의 입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계속해서 올라가 성벽 꼭대기에 도착해 아래를 내려다보니 강시들은 계속해서 풀쩍풀쩍 뛰어올랐다.
“하아… 살았다…….”
당진산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민. 괜찮아?”
하설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연하민을 보며 물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연하민에게로 향했다.
연하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지으려 하는 입꼬리는 파르르 떨렸다.
“저놈들 계속 뛰어오르려 하네.”
“그런데 정말로 삼 장이나 뛰어올랐어.”
당진산의 말에 낙우진이 대꾸했다.
“그리고 정말로 딱 저만큼만 뛰어오르는군. 벽에 손을 박고 기어오르거나 하지는 않고.”
주우명이 유심히 지켜보며 말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당진산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감돌 때.
“그 생각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언제 올라온 것일까? 곁에서 한설빙의 목소리가 들렸다.
“으악! 어, 언제 오신 겁니까?”
기척도 없이 들린 목소리였기에 당진산이 깜짝 놀랐다.
“저것들이 딱 저만큼만 뛰어오른다고 섣불리 도발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당진산이 놀라거나 말거나 한설빙은 자신의 말만 했다.
“아! 개체 간의 협력!”
그 말에 하설란이 떠올랐다는 듯 탄성을 흘렸다.
“그래. 저놈들은 다수가 모이면 협력을 해. 지금 있는 열 개체는 조금 애매한 숫자지. 하지만 놈들도 도발에 반응을 해. 그 반응이 개체 간의 협력이 될 수도 있고.”
한설빙의 설명에 당진산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래서, 어땠어?”
한설빙의 물음.
다들 서로를 힐끗거리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 다사다난한 하루였다.
어제는 주작비천을 익힌다며 폴짝폴짝 뛰기만 했다.
그리고 오늘 겪은 저 마물, 아니 괴물들은 정말이지…….
“자만했어요.”
연하민이 자책하는 목소리로 답했다.
오늘 마지막에 주작비천을 제대로 펼치지 못해 아찔한 상황을 겪지 않았던가.
“그래서 실전 같은 훈련이 중요한 거야. 정작 실전에서 이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죽었을 거예요. 그리고 저런 사강시가 되었겠죠…….”
연하민은 냉정하게 자신을 파악하며 답했다.
“그러지 말라고 훈련을 하는 거지. 지금처럼.”
“네? 훈련이요?”
당진산이 끼어들었다.
지금까지도 생도들은 이것이 실전이라 믿고 있었다.
오늘 하루의 실전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들이닥친 녀석들이었으니.
“어… 오라버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하설란은 성벽 아래에 모습을 드러낸 하무백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 하 교관님!”
단목운뢰가 그제야 이 자리에 없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설마…….”
당진산은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하며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퍽! 퍼퍼퍽! 퍽퍽!
실로 간단했다.
가볍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 사강시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 나갔다.
자신들은 열 마리가 나타났다고 죽어라 도망쳤는데, 저 인간은 장난치듯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저 마물들의 머리를 터트려 버리다니.
괴물은 저 마물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교관이었다.
열 마리를 모두 처리한 하무백이 훌쩍 뛰어서 가볍게 성벽에 올랐다.
“교관님이 저놈들을 보내신 건가요?”
당진산이 원망 어린 얼굴로 물었다.
“뭐, 내가 몰긴 했지.”
“그러다 누구 하나 물리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한 교관이 함께 있었잖아.”
당진산의 원망에 하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연하민이 당할 뻔했다고요!”
“한 교관이 막았잖아.”
“만일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그랬으면요?”
“한 교관이 막았겠지.”
“…….”
할 말이 궁색해진 당진산이다.
방금 하무백은 몸소 보여주지 않았던가.
가볍게 휘두르는 주먹으로 저것들을 처리할 수 있음을.
하무백이 그랬다면, 한설빙도 비슷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훈련은 어땠나? 역시 실전같이 해야지 얻는 게 있지?”
하무백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그 웃음에 일곱 생도는 부르르 떨었다. 하설란까지도.
정말이지 조금 전은 떠올리기도 싫었다.
그만큼 절박하고 끔찍한 경험이었다.
“만약 훈련인 걸 알았더라면, 너희가 그렇게 사력을 다했을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고 날 원망해라.”
“…….”
하무백의 말에 다들 말이 없었다.
“그리고, 연하민.”
“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은 그 행동. 훌륭했다. 실전에서도 그렇게 해라.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치다 보면, 길이 생길 때도 있다.”
“네.”
하무백의 칭찬에 연하민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
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와 함께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삼백이 넘는 인원이 말을 달려 이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관도를 달리고 있음에도 생각보다 속도가 느렸다.
내일 당장이라도 산월마림에 도착할 것 같은 기세로 수하들을 독려하는 연백량이었으나, 마음 먹은 대로 여정이 흘러가지는 않았다.
“얼마나 남았지?”
“칠 일은 더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느려.”
“절강성의 끝까지 가는 길입니다. 그 정도도 정말 무리해서 나온 여정입니다.”
동주산의 대답에도 연백량의 얼굴에 어린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 사이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그나마 하오문에서 놈들이 간 길을 알려주기에 이 정도입니다.”
하무백 역시 관도로 요란하게 이동했다.
해서 하오문에서 그들의 여정과 목적지를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하무백의 기감을 생각한다면 굉장히 먼 거리에서 그들의 흔적을 쫓아야 했지만, 이번에는 흔적이 너무 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하오문은 이미 그들이 산월장성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도 파악한 상태다.
연백량 일행은 하오문이 알려준 길대로 달려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하무백 일행의 흔적을 찾지 않아도 되는 만큼 시간을 절약하고 빨리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연백량은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내고 있었다.
시일이 흐를수록 더 그랬다.
욕망이 그의 이지를 흐리고 있었다.
‘그럴 리 없지만, 이건 흡사 그 저주받은 마공을 익힌 듯한 증상이지 않은가…….’
연공후는 그런 백부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선친이 서신을 통해 알려주어 그 존재를 알게 된 마공.
이번 여정에서 가문의 무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통해 팽가주가 그 마공을 익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럼에도 백부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선친이 자신에게도 알린 사실을 백부에게 알리지 않을 리 없었으니.
게다가 조부 역시 그 마공에 대해 대비를 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백부는 욕망에 눈이 멀었다 뿐이지, 다른 면에서는 능히 연가의 소가주다운 인물이기도 했다.
‘그 아이의 미모가 지닌 힘이 이 정도였던가? 욕정에 눈이 먼 백부의 상태가 저리될 정도로?’
연공후는 안타까운 눈으로 연백량을 바라보았다.
조바심이 연백량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차라리 연하민의 소재를 모를 때가 나았다. 그때는 적어도 냉정함은 가지고 있었으니.
헌데, 연하민이 산월마림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저 꼴이다.
‘가주께서 저 모습을 보셔야 하는데…….’
그랬다면 소가주를 어떻게 해도 했을 것이다.
이지를 흐트러트리는 욕망을 좌시할 분이 아니니.
소가주의 상태가 저리 심각한 것을 모르니, 가주는 여아 하나의 안위 따위야 희생시켜도 상관없는 것이다.
가문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니까.
소가주가 바라는 바를 이루도록 놓아두는 것이다.
그것이 가문을 좀먹고 있는 것을 모른 채.
***
“놈은?”
예초아가 눈앞에 부복한 수하에게 물었다.
“산월장성 남부 쪽의 공백이 있는 성벽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공백이라……. 봉마단이랑 얽히기 싫다는 거로군.”
사강시의 군집이 거의 일어나지 않아, 봉마단의 경계가 허술한 곳을 하오문에서는 공백이라 불렀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봉마단을 그곳으로 유도하는 것은 어떨까?”
예초아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수하가 답했다.
“하책인 듯합니다. 봉마단이라면, 마림에서 하무백 그자가 어떤지 잘 알 테니. 괜한 시빗거리를 만들려 하지 않을 겁니다.”
“내 생각도 그렇긴 해.”
예초아는 순순히 수하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산월마림의 하무백.
적어도 지난 전쟁에서는, 강시가 아닌 하무백이 악귀였으니.
“산월마림 안에서는 다른 수가 없겠지?”
“현 강호에서 산월마림에 대해 그 자보다 잘 알고 있는 이는 없을 겁니다.”
하오문이나 개방의 정보망도 어디까지나 산월장성 밖에서나 의미가 있었다.
산월마림 안은 그야말로 마물의 땅이었으니.
“결국 연백량 그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칠 일 정도면 도착할 겁니다.”
수하의 보고에 예초아는 아쉬운 듯 의자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