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80화 (80/312)

80화. 그곳도 변했을까요?

연공후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피하자고 하면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래봐야 연백량의 화만 더 키운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돌아가자고? 터진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구나! 그렇게 그 아이를 밖에 두고 싶더냐!”

분노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뺨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입안에 비릿한 피맛이 느껴졌다.

뺨 안쪽이 이에 걸려 상처가 난 듯했다.

“그게 가문을 위한 길이니까요. 그 아이를 데려가는 것은 백부님을 위한 길이겠지만, 가문을 생각한다면 이곳에서 그만 돌아가야 합니다.”

입가로 피가 살짝 배어 나왔다.

“무어라? 그러니까 네 놈 말은 내가 가문을 말아먹으려 한다 이 말이렷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연공후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에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대신 자신이 그리 주장하는 근거를 이야기했다.

“감시하던 이들이 당했다는 것은, 하무백 그가 감시자들의 존재를 눈치 챘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 그들을 처리하고 산월마림 더 깊은 곳에 들어갔다는 것은, 우리를 그곳으로 끌어들이려는 생각이고요. 즉, 함정입니다.”

간단한 결론이었다.

그리고 지극히 타당한 추론이었다.

연백량은 치켜들던 주먹을 멈췄다. 아무리 욕망에 먹혔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판단력은 남아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저 빌어먹을 놈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돌아갈 수도 없었다.

“흥, 제깟 놈들이 함정을 파봐야 얼마나 판단 말이냐.”

“잊지 마십시오. 팽가가 그 하나에게 당했습니다.”

연공후가 경고했다.

“네가 어찌 그 사실을…….”

연공후에게로 강호의 정세에 대한 정보가 들어가는 길을 다 막은 이가 연백량 아니었던가.

“가문을 나오니 제 귀에 들리더이다.”

연공후가 담담하게 말했다.

“팽가와 연가는 다르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안휘 남궁세가, 호북연가, 사천당가, 융중 제갈세가, 하북팽가.

당금 강호의 오대세가다.

그중 하북팽가는 오대세가의 말미에 있다. 호북연가는 안휘 남궁세가를 제치고 오대세가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오대세가로 묶여 있지만, 연가와 팽가 사이에는 분명 세력의 차이가 존재했다.

연공후는 그 사실까지는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은 대별산이 아닌 산월마림입니다. 하무백만 상대하는 것이 아닌, 그곳의 강시도 상대해야 합니다. 하무백이 노리는 것도 그것이겠지요.”

“그깟 강시 따위…….”

연백량은 강시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실제로 그도 지난 전쟁에서 사강시는 수없이 상대해 봤다.

그 끔찍한 혈교의 주전력 중 하나였으니.

‘그리고 산월마림 안에서라면……. 뒤탈 없이 백부를 제거할 수도 있지요.’

연공후는 이 말은 삼켰다.

왜인지는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연가를 위해서인지, 동생을 위해서인지.

아무튼 내심 백부가 사라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내심이 드러나는 것이 싫어서인가.

연공후는 더욱 무표정한 얼굴로 연백량을 바라보았다.

***

“감시하던 애들이 전부 당했다고?”

예초아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네. 그리고 산월마림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당연히 추적이 불가능하겠네.”

“저희 애들은 들어가면 죽은 목숨이니까요.”

수하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노린 거겠지?”

“네.”

“함정이로군.”

예초아는 단정했다. 그가 아는 하무백이라면 능히 그런 술수를 부릴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수하 역시 긍정했다.

“연백량이 가능할까?”

수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저 문주님의 혜안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어부지리를 노리고 그들을 준비했다가는 하무백에게 꼬리를 잡히기만 했을 겁니다.”

수하는 연백량이 절대 하무백을 이길 수 없다고 확신했다.

“산월마림으로 향한다 했을 때, 혹시나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어. 하지만 담당 생도에 여동생을 데리고 마림 안으로 들어갈 거 같지는 않았는데…….”

“그만큼 자신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하무백 그자라면 그럴 자격이 있지요.”

지난 두 번의 전쟁에서 하무백이 전장에서 보인 모습은 그야말로 귀신, 그것도 악귀였다.

아니 그 말로도 부족했다.

하오문은 그런 하무백의 모습 일부를 알고 있었다.

하무백의 진정한 실력이 어느 수준인지는 감히 추측조차 못 하지만, 적어도 그 자락 하나쯤은 알고 있었으니.

“자격이라… 그렇지. 최후의 전투에서 소휘웅과 산월마림 끝까지 들어갔던 이들 중 하나이기도 하니, 누구보다 산월마림에 대해 잘 알겠지.”

예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실 그는 산월마림의 완전한 소탕을 맹주에게 주장했었습니다.”

“장로원의 늙은이들이 더 이상의 전쟁은 무림에 불필요한 고통을 준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장성만 둘러싸고 말이야.”

수하의 말에 예초아가 대꾸했다.

어찌 그때의 그 논쟁을 잊을 수 있을까.

산월장성을 쌓아 올리는 대역사를 이용해 백도회가 챙긴 이권과 수입이 얼마인데.

하오문도 그때 슬쩍 끼어들어 제법 챙겼었다.

***

“많이 변했네요.”

한설빙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렇게 안쪽까지 들어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날 산월마림을 떠난 이후 다시 올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뭐, 세월이 흘렀으니까.”

“이렇게 다시 올 줄도 몰랐고요.”

그 말에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하무백 자신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다시 이곳을 찾아 남아 있는 마물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정천맹 본맹에 있으면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없었다.

“그곳도 변했을까요?”

한설빙이 산월마림의 가장 깊은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

한설빙은 아직도 그날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는 하무백이 이미 호천단의 단주를 할 때였다. 자신 역시 부단주였고.

장로원의 결정에 의해 산월마림에서의 퇴각이 결정된 날.

혈교 교주를 처단하고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산월마림의 잔당을 뿌리 뽑기 위해, 하무백의 독단에 의해, 호천단의 절반이 산월마림에 남았었다.

호천단의 본 임무는 맹주의 호위였음에도, 맹주가 허락을 해줬다.

그때 부단주로서 하무백의 곁을 지킨 게 한설빙 자신이다.

다른 뺀질이 한 놈은 본맹에서 맹주의 호위를 책임졌고.

하무백에게 퇴각 명령을 전한 것이 한설빙이었다.

그 명령서를 보고 눈이 돌아간 하무백은 산월마림의 가장 깊은 곳, 혈교주가 자리를 잡았던 곳까지 단숨에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날, 그 뒤를 쫓았던 한설빙은 자신의 단주가 가진 진실한 실력을 목도했다.

그때 하무백이 만들어 둔 흔적.

그것은 어떻게 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진 것이다.

“헉헉헉. 끝났습니다.”

그때 당진산이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두 사람이 한가로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일곱 생도는 총 열 개체의 사강시를 상대했고, 모두 쓰러트렸다.

하무백은 그 결과물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일이 잘린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저, 그건 왜 그러시는 건가요?”

이미 완전 침묵시킨 개체의 머리를 다시 터트리는 수고를 하는 이유를, 주우명이 조심스레 물었다.

산월마림에 온 후 하무백이 꼭 하는 행동이었으니.

“혈교는 기이한 마물을 무척이나 많이 만들어냈다. 강시도.”

하무백이 담담히 말했다.

“다섯 종류가 전부 아닙니까?”

당진산이 물었다.

“가장 대표적이고, 조심해야 할 것들 다섯 종만 말한 거고, 기이한 변종 강시와 변종 마물들도 존재한다.”

하무백의 말에 일곱 생도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뭐, 강호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변종이기에 만날 확률이 적긴 하지만 말이야.”

한설빙이 첨언했다.

“그중 우리가 참수혈귀(斬首血鬼)라고 이름 붙인 개체가 있는데… 나도 딱 한 번 봤어. 머리를 옆구리에 끼고 들고 다니더라고…….”

이어진 한설빙의 설명에 일곱 생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목이 잘린 시체가 옆구리에 머리를 들고 다닌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거기에 그 머리가 이상한 말도 계속 지껄여서. 여간 짜증나는 게 아니지.”

한설빙이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연하민과 하설란은 얼굴을 더욱 찡그렸다.

상상만 해도 끔찍함을 넘어 공포스러웠다.

“강한가요?”

연하민이 조심스레 물었다.

“강해. 혈강시보다 좀 더 강했던 것 같네. 아무튼 그걸 상대한 이후로 단주님은 무조건 머리는 터트려 버리셔.”

한설빙의 말에 일곱 생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도 그런 것을 만났다면, 이후로 이곳 마물들의 머리는 모두 터트려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하무백이 하루일과의 종료를 알렸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기에.

마림 안쪽으로 들어서니 유독 해가 짧아진 듯한 느낌이었다.

“언제까지 이곳에 있나요?”

단목운뢰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시선은 낙우진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성벽에 있을 때는 괜찮았으나, 마림 안으로 들어온 이후 낙우진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강시를 상대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싸우기도 잘 싸웠다.

하지만 안색이 늘 어딘가 불편한 듯한 모습이었다.

물어봐도 괜찮다고는 하지만.

누가 봐도 괜찮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한 달 정도는 굴러야지.”

하무백이 성벽쪽을 힐끔 바라보며 대답했다.

깊은 밤이 되었다.

낙우진은 잠을 잘 때면 끙끙 앓으며 잤다.

소리는 내지 않아도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채 괴로워하는 모습이었다.

한설빙이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왜 이러는 거죠?”

하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이곳과는 맞지 않은가 보지.”

“무언가 감추고 있는 것 같은데요?”

“뭐, 그렇다고 해도 신경 쓸 건 없어.”

하무백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한설빙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 시선이 연하민에게로 향했다.

“내일쯤인가요?”

“그럴 거 같다. 거의 지척에 왔어.”

하무백의 괴물 같은 기감은 연가 무리의 기척을 미세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다.

하무백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크르르르르.”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는 강시.

온몸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혈강시다.

한 놈이 아니었다. 세 놈이 더 핏빛의 눈으로 하무백을 노려보았다.

그 눈에는 갈증이 가득했다.

피를 향한 갈증.

혈강시는 붉다고 해서 혈강시가 아니었다.

사람의 피를 빨아서 혈강시라 불렀다.

놈들에게 피를 빨리면, 이지를 상실하고 혈강시가 된다.

사강시와는 또 다른 위험을 가진 놈이다.

저놈들이, 본디 혈교에서 만들어낸 혈강시인지, 혈강시에게 피를 빨린 무인들인지는 알 수 없었다.

쥐가 새끼를 치듯 계속해서 증식하는 놈들이었으니.

만약 혈강시에게 물려 피를 빨린 무인들이라면, 하무백이 해줄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퍽! 퍽! 퍽!

혈강시의 머리가 수박 터지듯 터져 나갔다.

하무백은 무심한 눈으로 바닥에 쓰러진 세 구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무심히 응시하고 있는 사이.

화르르르.

불길이 치솟았다.

삼매진화.

하무백이 내공으로 일으킨 불길이 세 구의 시체를 태워 없앴다.

허공에 매캐한 냄새가 떠올랐다.

사람의 시신을 화장한 것과는 다른 냄새였다.

불쾌하고 역한 어떤 냄새가 주변에 서서히 퍼졌다.

그는 가볍게 일으킨 손바람으로 냄새마저 날려 버렸다.

이제 이곳에는 혈강시가 있었던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

하무백은 야영지로 돌아갔다.

“혈강시도 많이 늘었네요.”

한설빙이 담담히 말했다. 시체를 태운 냄새를 맡았기에 혈강시임을 안 것이다.

강시들은 개체의 종류에 따라 태웠을 때 냄새가 달랐으니.

그리 말하는 한설빙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가득했다.

산월장성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혈강시가 늘어난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투입된 무인들이 혈강시에게 물린 거다.

“장로원 개새끼들…….”

하무백이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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