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81화 (81/312)

81화. 나만 당할 순 없지

한설빙은 분노한 하무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저렇게 무사들이 희생당해 빌어먹을 강시로 변하는 것을 막고자 한 그 아니던가.

그래서 산월마림의 완전 초토화를 주장했었다.

장로원에 의해 기각되었지만.

그러니 새로운 혈강시를 보았을 때, 그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올 욕의 대상은 장로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지들이 직접 이곳을 지키라고. 애꿎은 무사들 밀어 넣지 말고.”

자신이 완전히 태워버려 이제는 재조차 남지 않은 자리를 바라보며 하무백이 무언가 서글프게 중얼거렸다.

구분할 수 없다 했지만, 구분할 수 있었다.

상대해 봤기에 아는 것이고, 강시의 의복을 보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방금 자신이 쓰러트린 혈강시가 본디 어떤 무사였는지.

“맹룡대였겠죠?”

한설빙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저렇게 던져주고 빌어먹을 봉마단 놈들은 퇴각했겠지.”

강시는 싸구려 무복을 입고 있었다.

이곳에서 고기 방패로 쓰이면서도 제대로 된 보급조차 받지 못하는 이들, 맹룡대.

본디 약한 이들이었기에, 방금 상대한 혈강시도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혈강시가 되면, 본디 지녔던 무력보다 몇 배는 강해진다. 다만 워낙에 약했기에, 그래 봤자 인 것이다.

“봉마단 놈들이었으면, 좀 더 강했겠지. 더 그럴듯하게 입고 있었을 거고. 이만 가자. 근처에는 더는 없나 보다.”

“진법을 이중으로 쳐놨으니까요. 들어온다 해도 헤매다가 우연히 생로를 밟은 것들 몇이에요. 그것도 여기까지가 한계이겠지만.”

한설빙이 당연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숙영지를 정하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한설빙이 진법을 설치하는 것이다.

물론 하무백과 한설빙만 아는 사실이지만.

생도들은 자신들이 그런 보호를 받고 있음을 몰랐다.

이중으로 펼쳐진 진법.

밖에 펼쳐진 외진은 미로진으로, 진법 안으로 들어온 이들을 자연스레 밖으로 내보낸다.

헤매다 우연히 생로를 밟은 이들만 겨우 안에 들어오는 정도.

백이 진입을 하면 하나가 들어올까 말까다.

그러나 진법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다.

내진은 생로를 아는 이가 이끌지 않으면 절대 들어올 수 없었음이니.

한설빙과 하무백이 진법 밖으로 나가, 그렇게 적당한 수의 강시를 이끌고 내진 안으로 들어가 생도들을 상대하게 한 것이다.

생도들이 알게 되면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하무백은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안전이 보장되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은 받아들여지는 게 달랐으니.

“아무튼 배려심 넘치는 교관님이시네요.”

한설빙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무백은 무뚝뚝하게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

“도착했군.”

연백량이 눈앞의 성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주변에 적당한 길이의 줄로 매어진 말을 확인한 후였다.

그들이 타고 온 말일 터.

“이곳에 숙영지부터 마련한다.”

연백량의 명령에 무사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후로 접어든 시간이다.

오늘은 산월마림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숙영지 준비가 끝나고 편히 쉴 수 있으리라. 이동 중의 노숙이 아닌.

그 생각에 무사들은 더욱 서둘렀다.

말들은 탈진했다. 입가에 거품이 가득했다.

“오늘은 무리겠지?”

연백량의 중얼거림에 동주산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숙영지 마련이 끝나면 해가 질 겁니다. 밤에 산월마림에 들어간다니, 그건 자살 행위입니다.”

“놈들은 저 안에 있다. 결국 우리도 저 안에서 노숙을 하든 숙영을 하든 해야 할 때가 올 거야.”

그 말에 동주산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일전에 연공후가 했던 말이 떠오른 탓이다.

일부러 산월마림 깊은 곳으로 들어가 자신들을 끌어들이려는 함정.

과연 연백량의 의도대로 이번 일이 성공할 것인가?

동주산의 가슴 한 켠에 부정적인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연공후는 아무 말도 없었다.

그저 복잡한 눈빛으로 성벽을 바라볼 뿐.

그는 아버지에게 들은 저 지옥 같은 곳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온갖 마물들의 지옥.’

가장 유명한 것은 강시였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곳.

혈교가 만들어낸 인세의 지옥.

반드시 박멸하여 없애야 할 곳.

그것이 아버지의 평가였다.

그러나 정천맹 장로원은 저곳의 온존을 택했다. 박멸에는 희생과 피해가 너무 크다는 이유로.

대신 장성을 쌓아 둘러서 막는 것을 택했다.

‘장성을 쌓는데 들어간 희생이면, 박멸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저 넓은 곳을 커다란 장성으로 둘러싸 막는다는 것도 보통 역사는 아니었으니.

그리고 성을 쌓는 동안, 강시와 마물들이 가만히 기다려 준 것도 아니었고.

‘결국은 이권이지.’

연공후는 물끄러미 백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가 가진 추악한 욕망과는 또 다른 종류의 추악한 욕망.

그것이 수많은 무인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저 거대한 괴물 같은 성벽을 만들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무사들이 도열해 서 있었다.

그 선두에는 연백량이 있었다.

그의 곁에는 동주산과 연공후가 있었다.

“같이 갈 생각은 있나 보구나. 아님 그 아이를 빼돌리려는 거냐? 네 놈이 함정이라 한 곳에 네 놈 발로 가겠다니.”

잔뜩 꼬여있는 언사다.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는 연백량의 눈에는 불신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

연공후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흥.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으니.”

가문의 어른을 대하는 모습에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후레자식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으나, 그래도 죽은 자신의 동생을 욕보일 수는 없었기에 그 말은 삼켰다.

아무리 미운 놈이라 해도, 제 동생의 자식이었으니.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해도, 동생은 동생이지 않은가.

“모두 진입한다!”

연백량의 명령에 무사들은 몸을 날렸다.

숙영지를 만드는 동안에 성벽에 걸어둔 밧줄을 타고 하나둘 성벽을 넘었다.

무려 사백에 이르는 인원.

그들이 진입하니, 아무리 산월마림이라 해도 무서울 것이 없을 듯했다.

적어도 성벽을 바로 넘어선 이곳에서는.

“동주산.”

“네!”

연백량의 부름에 동주산이 선두에 섰다.

이 중에서 추적술에 가장 능한 이가 그였기 때문이다.

산월마림에서는 길잡이가 의미가 없었다.

현재 이곳을 가장 잘 아는 이들은 봉마단이다.

사적인 일에 봉마단에 지원을 요청하는 것도 체면이 상하는 일이었기에.

그리고 봉마단의 무사들도 마림 깊숙한 곳은 까막눈이나 다름없었기에.

길잡이는 의미가 없었다.

그저 놈들이 지나간 흔적을 찾아낼 추적술만 있으면 될 뿐.

그것이 연백량의 판단이었다.

흔적은 진하게 남아 있었다.

한눈에 슥 훑어도 보일 정도로.

산월마림에서 흔적을 지우며 이동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저 흔적들은 너무했다.

마치 나 이리로 가니, 잘 따라오거라 하고 길안내를 하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함정이라…….’

동주산의 머릿속에 그 말이 자꾸 맴돌았다.

어쨌든 주인의 명을 따라야 했기에 동주산은 앞장서 흔적을 읽어 나갔다.

흔적이 명확한 만큼 이들의 이동은 빨랐다.

그 사이 몇몇 사강시가 연가의 무사들을 덮쳤다.

그 수는 열 남짓.

상대도 안 될 숫자였기에, 금세 모두 처리되었다.

“목! 목을 잘라!”

여기저기서 산월마림의 경험이 있는 무사들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

“들어왔군.”

하무백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자신들은 벌써 산월마림의 중간가량 들어와 있는 상태였다.

장성에서부터 최심부까지의 거리를 기준으로 따진다면 그 정도일 거다.

이쯤에서 나타나는 강시의 삼 할 남짓이 혈강시다.

여전히 가장 많은 개체는 사강시였지만.

재수 없으면 암혈강시나 묵철강시와 마주칠 수도 있는 곳이다.

게다가 연가의 무사들이 산월마림에 진입하며 일으킨 소란으로 강시들의 이동 경로가 틀어질 수도 있었다.

“이곳까지 잘 따라와라.”

작은 웃음을 띤 중얼거림. 웃음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럼 슬슬 오늘부터 혈강시를 상대해 볼까?”

한설빙이 일곱 생도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미 어제 하무백과 의논을 마친 상태였다.

“네? 혈강시요? 그게 상대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상대할 수 있나요?”

당진산이 당황해서 물었다.

사실 일곱 생도도 은연중에 눈치 채고 있었다. 하무백과 한설빙이 자신들을 보호하면서 적당한 수준의 강시들만 붙여주고 있음을.

그 방법은 모르겠지만.

“어렵지 않다.”

하무백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혈강시라면… 어떤 걸 조심해야 하나요?”

단목운뢰가 조심스레 물었다.

이들은 이곳의 강시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있다고 한들 강시들의 명칭 정도.

그래서 사강시를 처음 상대할 때도 놀라지 않았던가.

독에 중독되어 죽으면 사강시가 된다는 말에 얼마나 소름 돋았던가.

그래서 이번에는 미리 묻고 확인하는 것이다.

“좋은 자세야. 성장했네.”

한설빙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혈강시에 대해 설명했다.

그것을 모두 들은 생도들은 얼굴이 핼쑥해졌다.

사강시보다 상위의 개체라기에 예상은 했지만, 이건 너무 끔찍한 놈이었다.

“산 채로 피를 빨리고, 그러면 강시가 된다니…….”

당진산이 몸을 부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이건 마치… 흡혈귀(吸血鬼) 같은데요?”

민간의 설화집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기에, 백리평이 그리 중얼거렸다.

“흡혈귀라… 뭐, 그렇게 불러도 다를 건 없겠네. 피 빨아먹는 귀신이랑 다를 건 없으니.”

한설빙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도 나랑 하 교관님이랑 세 놈 정도 상대하고 왔어.”

“어, 언제요?”

낙우진의 물음에 하무백이 답했다.

“너희들 잘 때.”

생도들의 얼굴이 다시 한번 하얗게 질렸다.

“이 위험한 곳에 저희만 남겨뒀었다고요? 그것도 모두 잠들었는데? 불침번은 걱정 말고 자라고 하고선?”

당진산이 원망 어린 눈빛을 던졌다.

“너희들 자는 곳에서 혈강시랑 싸울 수는 없잖아. 그리고 어제 본 놈들 모두, 맹룡대였다.”

“…….”

“…….”

하무백의 말에 생도들의 입이 굳게 닫혔다.

이제 그들도 알고 있었다.

산월마림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맹룡대로 이곳에 온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어떤 면에서 이들은 참 운이 좋은 경우였다.

담당교관이 하무백과 한설빙이었으니.

“이 년 과정을 수료하기 전에 언제든 자진퇴관이 가능하다. 잘 생각하도록.”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리는 하무백.

“자, 가자.”

한설빙의 말에 생도들은 그 뒤를 따랐다.

시간은 빨랐다.

보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제 사강시든, 혈강시든 익숙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생도들도 놀랐다.

자신들이 짧은 시간동안 이렇게 강해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사실 이 모습에 가장 놀란 것은 한설빙이었다.

하무백이 생도들을 데리고 산월마림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만 해도 단주가 미친 줄 알았으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죠?”

한설빙이 하무백에게 물었다.

“이제 약발이 좀 도나 보네.”

“약이요?”

그렇게 물으며 한설빙이 얼굴을 찡그렸다.

옛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설마 그걸?”

그 물음에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다행이네요.”

하무백의 답에 한설빙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더 좋은 거. 내가 만든 거 말고 스승님이 만드신 거.”

그 말에 한설빙이 얼굴을 찌푸렸다.

“더 좋은 거라면… 그 맛은…….”

“더 지독하지. 그래도 나는 일말의 자비가 있어 지독한 것 몇 개 빼고 만든 거거든. 그만큼 효과는 좀 떨어지지만.”

한설빙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당시의 기억만 떠올려도 끔찍한데 그보다 더 지독한 것이 있었다니.

“당연히 그냥 먹였죠?”

자신들도 그랬으니까. 먹은 이후 누군가가 ‘미각을 마비시키는 혈을 점하고 먹으면 어땠을까’ 라고 말하는 순간, 보였던 하무백의 그 사악한 미소란.

“나만 당할 순 없지.”

담담한 말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사악했다.

“설란도요?”

“나도 사람이야.”

그 대답으로 하무백이 하설란에겐 혈을 짚은 후 복용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보다 제법이군. 보름 만에 근처까지 왔어.”

하무백이 동쪽 숲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예상보다 나흘 정도 빨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