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82화 (82/312)

82화. 내가 왜?

사백이 넘던 무사는 삼백 남짓 남았다.

산월마림에 들어오고 보름 사이에 무려 백 명에 이르는 무사들이 희생당했다.

‘이래서 장로원에서 산월마림을 포기한 거로군…….’

연백량은 장로원에서 왜 산월장성을 쌓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나름 연가의 정예만을 추려서 왔건만, 겨우 보름 사이에 사분지 일의 인원이 사라졌다.

장성 너머 숙영지를 오가며 길을 개척했는데도 이 지경이었다.

그냥 무작정 마림 안을 헤맸다면, 희생은 더 컸으리라.

연백량은 곁눈질로 연공후를 힐끔거렸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란 생각이 드는 조카였건만 이번만큼은 그의 조언이 옳았다.

초반 이틀은 숙영지를 활용하며 산월마림에 적응하였기에 그나마 이렇게 보름 만에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기실 첫 사흘을 숙영지를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연공후였다.

하지만 연백량은 그 말을 무시하고 계속 마림 속으로 진입하였고, 첫날밤 노숙 과정에서 무려 오십의 무사를 잃었다.

그제야 성벽 밖 숙영지를 활용하여 이틀의 적응 기간을 보낸 것이다.

첫날 오십의 희생 이후, 십사 일 동안의 희생이 오십 남짓이었으니 처음부터 연공후의 의견을 따랐다면 희생은 더욱 줄었을 터다.

‘하무백. 정말 무서운 사람이구나.’

연공후는 흔적을 찾는 동주산의 뒷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난 보름간의 여정.

하무백이 의도한 길임이 명백했다.

자신들은 그가 남긴 흔적을 쫓았으니까. 요소요소 위험하기 그지없는 길이었다.

특히 혈강시의 출현이 잦은 것이 치명적이었다.

산월마림의 혈강시가 모두 자신들이 가는 길로 모이는 것 같았으니.

그런 상황이었으니, 희생자가 백 명인 것도 연가의 정예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중간한 이들이었으면, 이곳까지 오기 전에 전멸하였으리라.

“이제 곧인 듯합니다.”

그때 동주산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유난히 소리에 예민한 사강시 때문이었다.

“흔적을 봐서는 이곳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 말에 연백량의 두 눈이 사납게 빛났다.

드디어 원흉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씹어 먹으리라.

“정답!”

그때 울린 낯선 목소리.

사람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미소를 지은 채 서 있었다.

“하, 하무백…….”

그의 얼굴을 알고 있던 동주산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네 놈이로구나!”

그 말에 연백량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워, 워. 진정하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러면 강시들이 좋다고 몰려들 테니.”

하무백은 태연하게 말했다. 그 말에 연백량은 이를 악물었다.

산월마림을 보름 동안이나 겪었기에, 하무백이 말한 의미를 잘 알고 있는 탓이다.

“미, 민아! 민아 그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다급한 물음이 연백량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노성에 이은 다급함.

그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해주는 변화였다.

“글쎄… 어디에 있을까? 이곳까지 오면서 겪어 보니까 어땠나? 그 아이가 무사할 것 같은가?”

대답 대신 돌아온 질문.

그러나 그 질문에 연백량의 눈가가 세차게 떨렸다.

세가의 무사들의 희생당해 죽어나가는 동안,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예를 데리고 왔는데도 이런데, 무공이라고는 일초반식도 익히지 않은 그 아이가 과연 이렇게 무서운 곳에서 버틸 수 있을까.

맹룡대에서 무공을 배웠다 하지만, 맹룡대의 무공은 뻔하지 않은가.

“네, 네 놈이… 기어코…….”

목소리도 세차게 떨렸다.

“소생 연가의 공후라 합니다.”

그때 연공후가 포권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하무백의 시선이 연백량에게서 그에게로 옮겨 갔다.

“제 동생은 무사한 것인지요?”

그의 물음에는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아버지를 믿기에 하무백이라는 인물을 믿었다. 그래도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랬기에 확인이 필요했다.

“어떨 것 같은가?”

하무백이 마찬가지로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 웃음을 본 연공후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무사하군요.”

하무백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왜 그리 생각하지?”

“제 선친을 믿으니까요.”

“선친?”

“네. 백자 운자를 쓰십니다.”

담담했으나 자긍심이 가득한 목소리다.

“연백운이라… 훌륭한 무사였지.”

“그리고 전우셨죠.”

하무백의 말에 연공후가 덧붙였다.

“선친께서는 그러셨습니다. 하무백은 훌륭한 무인이자 전우다. 동료를 절대 버리지 않는, 인세의 지옥에서도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하무백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맺혔다.

“그런 전우의 딸을 그냥 둘 리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함에도 나에게 물은 까닭은?”

“그래도 확인은 필요했으니까요.”

하무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무사하다. 저 깊은 곳에서 실전 훈련에 한창이지.”

이들이 근처에 도달했기에 하무백이 마중을 나왔다.

근처라고는 하지만, 반나절 거리였다.

여기부터는 자신이 직접 나서야겠다 정했기에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감사합니다.”

연공후는 다시 한번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무백…….”

살기 가득한 목소리가 하무백의 귀를 파고들었다.

“당장 민아를 내 앞에 데려다 놓거라.”

그 말에 하무백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연백량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어서 움직이는 입술.

“내가 왜?”

“이익. 연가의 아이이다! 당연히 연가의 소가주인 내가 보호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내 담당 생도이지. 그 아이를 보호할 의무는 나에게도 있어. 그것도 인면수심의 짐승에게서 말이야.”

연백량의 얼굴이 타오를 듯 붉게 변했다.

분노 때문일까, 부끄러움 때문일까.

하무백은 아무래도 전자일 거라 생각했다.

부끄러움을 안다면, 애초에 그런 욕망 따위 가지지 않았을 테니.

“가문이 먼저다!”

강한 의지가 깃든 말이다. 아니, 의지가 아닌 욕망일지도.

“그러면 찾아서 데려가 보든가.”

하무백은 그 말을 끝으로 모습을 감췄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저, 저…….”

막 하무백을 향한 공격을 명하려던 찰나였기에 연백량은 당황하며 삿대질만 해댔다.

“저는 이만 가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때 연공후가 입을 열었다.

“뭐라?”

갑작스러운 귀환 선언에 연백량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가주가 여기 있는데, 네놈 마음대로 움직이겠다고?”

그 말에 연공후가 빙그레 웃었다.

얼마 만에 드러내는 표정이고, 감정일까.

“그러면 저를 쫓아오실 겁니까?”

연공후의 물음에 연백량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뿐, 대답하지 못했다.

연하민이 눈앞에 있는데, 연공후를 쫓을 수 있을 리 없으니까.

“네놈 마음대로 해라.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

신경질적인 말을 내뱉는 것 외에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보중하십시오.”

고개만 까딱 숙였던 연공후가 산월장성이 있는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야말로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였다.

그 모습에 연백량이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정도의 경지였다고?”

미처 생각지도 못한 수준의 경공에 연백량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정도라면 능히 자신과 자웅을 결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음흉한 놈 같으니라고…….”

작게 중얼거린 연백량의 시선이 동주산에게로 향했다.

“쫓아라. 어서.”

“네.”

흔적을 쫓으란 연백량의 명령에 동주산이 매의 눈을 하고서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

연공후는 빠르게 움직였다.

보름간 지내면서 산월마림에서의 생존 요령을 익힌 것이다.

사강시나 혈강시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현재 자신의 경지라면 그 정도는 서너 개체가 동시에 나타난다 해도 능히 처리할 수 있었다.

다만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최대한 빨리 달렸다.

나무와 나무를 건너며 땅을 딛지 않고 달렸다.

경신법을 최대한으로 펼쳐 움직일 때의 소음도 최소한으로 했다.

강시라는 놈들은 소음과 진동에 민감했다.

허공에 떠도는 소음이나 땅의 진동에 이끌려 모습을 드러냈다.

그랬기에 연공후는 높다랗게 자란 나무를 이용해 이동했다.

나무 또한 울창하게 자란 마림이었기에 이동에 어려움은 없었다.

잠은 가장 높은 나무에서 잤다.

최소한 삼장 이상으로 자란 나무에서.

이렇게 큰 나무가 있을 정도의 땅이었다.

그렇게 전력으로 마림 밖을 향해 달리는 연공후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정리되고 있었다.

‘백부는 죽는다. 이곳에서 반드시. 같이 온 무사들도 아마 전멸하겠지.’

그럼에도 연공후는 막을 수가 없었다.

백부가 절대 물러서지 않을 테니.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한시라도 빨리 가문으로 돌아가 정비하는 거다…….’

이곳의 비보가 전해지면 본맹의 가주가 귀환할 것이다.

그 전에 먼저 가문에 도착해서 나름의 준비를 해야 했다.

하무백이 이곳으로 백부를 끌어들인 이유는 명백했다.

백부를 실종 처리하려는 것이다.

둘 모두 산월마림에 들어왔으나, 깊은 곳에서 따로 움직여 만난 적도 없다 하면 무어라 할 것인가.

증인이나 증거나 없으면, 누구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한다.

그러니 하무백은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처리할 심산인 것이다.

그것도 강시를 이용해서.

정말로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을 생각으로 보였다.

‘백부님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하무백이 직접 손을 쓸 생각이었다면, 그때 그렇게 모습을 감추지 않았을 터.

더 깊은 곳으로 백부를 끌어들이려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험난함이 자리하고 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기에 연공후는 홀로 떠난 것이다.

이제 연하민에게 위협이 될 것은 없음을 확인하였기에.

맹룡대로 가라한 것은 신분을 숨기기 좋고 무공을 몰라도 입관하여 기초 무공이나마 배울 수 있어서였다.

중도 퇴관으로 산월마림에 가는 것도 피할 수 있었고.

그런데 설마 하무백과 인연이 닿을 줄이야.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나 상황은 더 유리하게 흘러갔다.

자신이 백부의 예정된 죽음을 방관하는 패륜을 저지르고 있는 것일 수 있지만, 백부 또한 패륜을 저지르려 하지 않는가.

그리고 아직 백부는 명백히 살아있다.

자신은 이미 여러 번 백부를 말렸다.

돌아가야 한다고도 하지 않았던가.

함정이라는 것도 가르쳐줬다.

이 정도라면, 패륜을 저지르려는 백부에게 조카로서 할 도리는 다했다는 생각이었다.

***

“끄윽… 끄으윽…. 사, 살려줘…….”

혈강시에게 뒷목을 물린 무사가 간절한 얼굴로 눈앞의 동료에게 애원하며 말했다.

눈앞의 동료는 냉정한 얼굴로 검을 휘둘렀다.

두 눈 깊은 곳에 고뇌가 자리하고 있었지만, 검을 휘두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망설였다가는 자신도 당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무사와 혈강시의 목이 떨어졌다.

“방진을 짜라! 놈들에게 등을 절대 주지 마라!”

연백량이 땀을 뻘뻘 흘리며 외쳤다.

그의 검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덥석.

그때 땅속에서 솟아난 손이 연백량의 발목을 붙잡았다.

“감히 그 더러운 손을!”

연백량의 검은 지체 없이 손목을 잘랐다. 손톱으로 상처를 입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 했다.

그리고 이어서 땅을 가르고 들어가는 검이 땅속에 숨어있던 사강시의 목을 잘랐다.

하무백을 만나고 그 뒤를 쫓은 지 이제 겨우 하루다.

그런데 몰려오는 강시의 숫자가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달랐다.

거의 곱절로 나타났다.

그것도 시도 때도 없이.

지금까지 잠 한숨 못 잤다.

연백량의 두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하무백…….”

씹어뱉듯 나오는 이름. 증오 가득한 목소리다.

“저, 저거 뭐지?”

그때 어느 무사의 외침에 연백량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곳에는, 그것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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