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어떻게 할 거지?
“응?”
하무백의 표정이 변했다.
한창 혈강시를 상대하는 생도들을 지켜보던 중의 변화였다.
“왜 그러세요?”
좀처럼 보이지 않던 모습에 한설빙이 물었다.
“의외로군.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그 말에 한설빙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근처에 그것의 세력권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 물음에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지. 그런데 아무래도 연가에서 난장을 피우는 바람에 뒤죽박죽이 되었나 보군.”
하무백의 말에 한설빙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든 것이 하무백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강시들이 만들어 놓은 각 구역의 경계로 교묘하게 연가의 무인들을 유인하여 모든 세력을 뒤섞이게 만든 것이다.
각 구역의 강시들이 겹치면서 엄청난 숫자의 강시들이 몰려들었다.
그것들에게 대응한 것을 하무백은 난장을 피웠다고 하는 것이다.
역시나 적이 되면 무서운 사람이다.
“상대할 수 있을까요?”
한설빙의 물음에 하무백은 피식 웃었다.
상대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얼마나 작은 피해로 그것을 막느냐가 문제일 뿐.
“할 일이 줄어들겠어.”
작게 중얼거린 하무백의 신형이 사라졌다.
“하여튼…….”
한설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도들은 하무백이 사라진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혈강시를 상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
창백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혈관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검은 선이 죽죽 그어진 얼굴이다.
얼굴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곳은 전부 검은 선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그와 대비되는 지독하리만큼 새하얀 피부.
그리고 검붉은 입술.
검기만 한 두 눈.
연가의 무사들의 눈에 비친 그것의 모습이었다.
다들 저 모습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다만 실제로 마주친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게 문제였다.
“저건 분명…….”
연백량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도 지난 전쟁에 잠깐이나마 참전을 했었다. 그 와중에 저것을 만난 적은 없었다.
“저자는…….”
동주산이 낭패한 얼굴로 저것의 정체를 알아본 듯 중얼거렸다.
“알고 있는 자냐?”
연백량이 물었다.
“네. 풍령곡의 곡주 풍기휴입니다.”
정천맹 소속의 정파 중 한 곳이 풍령곡.
지난 전쟁에서 멸문한 곳이다.
그 위치가 호북성이었기에, 연가와도 교류가 있었던 곳이다.
멸문의 이유는 곡주가 익혔던 멸공 때문이었더랬다.
멸공에 잡아 먹혀 암혈강시가 되어, 사문을 멸문시킨 곡주.
그가 여전히 강시인 채로, 이곳 산월마림에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 암혈강시라니…….”
입술을 질끈 깨문 연백량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검은 동공으로 연가의 무사들을 바라보던 암혈강시 풍기휴.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섬뜩한 송곳니가 빛을 발한다 싶은 순간, 그것의 신형이 사라졌다.
“모두 조심해라!”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튀어 나가며 연백량이 외쳤다.
검강을 잔뜩 끌어올린 그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챙!
암혈강시의 손톱에 그의 검이 막히며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그 모습에 무사들은 깜짝 놀랐다.
익히 듣기는 했었다.
검강에도 잘리지 않는 단단한 육신을 가진 암혈강시라고.
그러나 소문으로 들은 것과 실제로 본 것은 차원이 달랐다.
무엇이든 잘라낸다는 지고의 경지인 검강 아니던가.
이 자리에 모인 무사들 중 검강의 경지에 오른 이는 연백량을 제외하면 겨우 둘.
다시 말하면, 저 암혈강시의 손톱을 막을 수 있는 이가 겨우 세 명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방의 땅이 꿈틀거린다 싶더니 사강시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혈강시 놈들도 나무 사이사이로 모습을 보였다.
연백량의 얼굴이 잔뜩 구겨지려는 찰나.
암혈강시의 손톱이 날아들었다.
그야말로 바람 같은 빠르기.
연백량이 검으로 쳐내기 무섭게 암혈강시의 신형이 사라졌다.
“크윽.”
낭패한 신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푸, 풍령곡의 신법입니다!”
동주산이 한껏 당황한 얼굴로 외쳤다.
무공을 사용하는 강시라니!
강시는 내공이 없다지만, 암혈강시는 그것을 대신할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막아라!”
연백량의 명령에 검강을 사용할 수 있는 두 사람이 암혈강시를 막았다.
빠르고 복잡한 신법에 애를 먹었지만 어떻게든 막아냈다.
그 사이 연백량이 다시 붙어 삼대일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암혈강시를 겨우겨우 막았건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크윽.”
“이익.”
“이, 이놈들!!”
혈강시와 사강시. 그것들과 혈투를 벌이는 가문의 무사들.
사강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제법 빠르다고는 하지만, 연백량이 데려온 무사들이라면 능히 일대일로 싸울 수 있었다.
게다가 사강시의 독에 당한다고 하더라도 당장 어찌 되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 사강시의 독이 해독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해독제도 있었다.
이 부분은 하무백이 일부러 생도들에게 알리지 않은 부분이었다.
진짜 문제는 혈강시였다.
놈에게 물리면 잠시 후 강시가 되어 적이 되어버린다.
그 귀찮은 놈이 사강시 사이사이에 섞여 있었다.
사강시보다 강한 놈이 그 틈에서 찰나를 노려 이빨을 들이미는데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연가의 정예답게, 산월마림에서의 그간 경험을 쌓은 무사답게 잘 대처하고 있었다.
혈강시에게 물린 동료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영면에 들게 도와주었다.
동료의 몸에 이빨을 박고 있는 혈강시의 목도 함께 날렸다.
그럼에도 숫자 앞에서는 당할 도리가 없었다.
가장 강한 세 사람이 암혈강시를 상대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에서, 다른 무사들마저 조금씩 줄어갔다.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결국 암혈강시의 목을 베어내는 데 성공했다.
수없이 많은 칼자국이 검강으로 얼마나 암혈강시의 목을 베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손톱만이 아니라, 가죽도 질기기 그지없어서 검강으로 단번에 잘라내지 못한 것이다.
그 사이 사강시와 혈강시도 모두 정리가 되었다.
“헉헉헉. 이놈은 진짜 마물이로군…….”
봉두난발에 옷 여기저기가 찢어진 연백량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암혈강시는 정말로 끔찍했다.
그리고 드러난 참상은 처참했다.
이 한 번의 전투로 무려 백 명의 무사가 명을 달리했다.
이제 남은 무사의 숫자는 백오십이 될까 말까였다.
이런 상황에서 암혈강시를 한 번 더 만난다면?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진다.
“소가주님.”
역시 만신창이가 된 동주산이 침중한 얼굴로 연백량의 곁에 섰다.
“이런 곳을 교관 둘과 생도 일곱이서 지나가고 있다고?”
연백양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하무백이 남긴 흔적이 이어진 길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 흔적을 따라 걸음을 내딛는 것이 두려웠다.
다음에는 어떤 마물이 나올지 알 수가 없으니.
“어, 어어…….”
그때 신형 하나가 어른거리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지칠 대로 지친 무사들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무기를 꼬나 쥐었다.
정말 남은 기력이라고는 없었지만. 그래도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쯧.”
어느새 지척에 이른 신형은 혀를 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무백…….”
연백량이 신형의 주인을 바라보며 분노 섞은 울음을 토해냈다.
“어떤가? 계속 쫓아올 텐가?”
무심한 얼굴로 묻는 모습.
연백량을 더욱 분노케 하는 것은 너무나 말끔한 하무백의 모습이었다.
흙먼지 하나 묻은 것이 없었다.
이 끔찍한 곳에서 강시들을 상대로 저럴 수 있단 말인가?
“암혈강시가 나타난 건 나도 예상외긴 하지만. 그놈이 나타난 이상, 이제 또 어떤 놈이 나타날지 몰라. 감당할 수 있겠나?”
“네, 네 놈은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 거냐?”
연백량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나 하무백이다.”
짧은 대답.
그러나 그 대답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아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만큼 존재가 숨겨져 왔던 그였기에.
하지만 연백량은 어렴풋이나마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가장 경계하는 자가 그였으니.
‘소휘웅보다 더 무서운 게 하무백이라 하셨다.’
웃으며 흘려들은 말이다.
아버지가 허언을 할 리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 말만큼은 허언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소휘웅이 어떤 인간이던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그의 무공이 아직도 두 눈에 생생했다.
그런데 그 말이 진실이었다.
이렇게 당하고 보니 알 것 같았다.
“어떻게 할 거지?”
하무백이 다시 물었다.
“그 아이를 돌려다오. 그러면 이대로 물러가겠다.”
한층 누그러진 음성이다.
하무백의 위험성을 이제 조금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가 보면 내가 납치라도 한 줄 알겠군. 스스로 맹룡대에 입관한 생도다. 그런 생도를 돌려달라느니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냉정한 대답.
연백량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사들의 시선이 그런 자신들의 소가주에게로 향했다.
이제는 지쳤다.
더 이상 이곳을 헤쳐 나갈 자신이 없다.
그런 이야기를 눈으로 하고 있었다.
연백량도 그런 기색을 느꼈다.
“연가의 일이다. 외부인이 간섭할 게 아니다.”
“맹룡대의 일이야. 외부인이 간섭할 게 아니지.”
하무백이 그대로 돌려준 대답.
어쩌면 그 아이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백량의 속에서 노화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 마지막으로 보았던 연하민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랐다.
신기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 모습을 떠올리니 다시금 자신을 지배하는 강렬한 욕망이.
하반신을 뻐근하게 하는 음욕이.
암혈강시를 상대하느라 모든 힘을 다 쏟았음에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 것일까.
쥐고 있던 검의 끝에 서서히 붉은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검강.
암혈강시의 손톱조차 자르지 못했지만, 최소한 절정의 끝자락에는 도달해야 쓸 수 있는 지고한 무공.
그것이 다시 펼쳐졌다.
“네 이놈!!!”
연백량이 하무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음…….’
하무백은 갑작스레 변한 연백량의 기세를 읽었다.
남은 내공 한 톨 없을 텐데.
갑자기 온몸에 도는 저 기력은 무엇인가.
거기에 한눈에 봐도 알아챌 수 있는 저 음욕은.
하무백의 시선이 연백량의 하체로 향해 있었다.
저건 정상이 아니었다.
단순히 아름다움에 음욕을 품은 게 아니었다.
하무백은 두 눈에 내공을 집중했다.
무극명륜안.
상대의 내공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안공.
그것이 펼쳐졌다.
하무백은 연백량의 내공의 움직임을 속속들이 읽을 수 있었다.
텅 빈 단전 한 구석.
또아리를 틀고 앉은 무언가에서 갑자기 흘러나오는 내공.
그 움직임은 거칠었다.
연백량의 온몸을 휘돌아, 하체에 힘을 실어주고 심장을 거칠게 뛰게 만들었다.
그리고 오른팔 위로 치달려 검에 맺히더니, 이윽고 붉은 검강으로 그 결실을 보였다.
아니다.
저건 연가의 무공이 아니다.
아니다.
저건 연백량이 의도적으로 펼친 것이 아니다.
무언가에 먹힌 것이다.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연하민을 향한 연백량의 욕망을 이용해 누군가가 연백량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다.
그것이 단전 구석에 있는 저 쌀알이다.
기억에 있는 것이다.
하무백이 머리 한 구석의 기억을 되살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남아있었던가.’
연백량의 몸에 한순간 엄청난 양의 내공을 불어 넣어준 또아리의 정체를 떠올리는 순간.
연백량의 검이 하무백을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