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84화 (84/312)

84화. 여기 있군

하무백이 두 발 옆으로 물러섰다.

부웅.

허공을 가르는 요란한 소리.

연백량의 검강은 그 찬란한 빛이 무색하게도 아무것도 베지 못했다.

하무백이 깊은 눈으로 연백량을 응시했다.

무저갱보다도 깊은 눈빛에 연백량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익.”

일순 느꼈던 공포를 부정하기 위함인가.

연백량은 거칠게 검을 떨쳤다.

여전히 검강은 선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연백량으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자신의 단전이 텅 비었음은 그 누구보다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지 않던가.

헌데 그 아이를 떠올리고 욕정을 품는 순간 갑자기 온몸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내공이라니.

이건 분명 그 아이를 꼭 취하라는 하늘의 뜻이었다.

연백량은 홀로 그리 결론을 내리고 하무백을 사납게 몰아붙였다.

하무백은 너무도 가벼운 움직임으로 모든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연백량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모르고 있군.”

하무백이 나직이 말했다.

차가운 그 말에 연백량의 검이 멈칫했다.

“무슨 헛소리냐!”

“네 놈. 지금 온몸에 내공이 넘쳐흐르지? 암혈강시를 상대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 같다면 암혈강시도 혼자 상대할 수 있겠군.”

그 말에 연백량은 눈을 찌푸렸다.

사실이었다.

더욱 선명해진 검강이 그 증거였다.

지금 같아서는 두세 번만 베면 암혈강시의 목을 자를 수 있을 듯 했다.

“그게 지금 네 놈 생명을 태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

담담한 말.

그러나 흘려들을 수 없었다.

생명을 태우고 있다니.

그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네깟 놈이 무얼 안다고!!”

분노가 가득한 노성을 터트리며 연백량은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벽라천화검(碧羅天華劍).

호북연가의 직계들에게만 전해지는 절기가 연백량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소가주였기에 벽라천화검을 익힌지 오래인 연백량.

면면부절 이어지는 검의 움직임은 하늘을 찬란히 빛내는 비단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보였다.

명칭 그대로의 검법이었다.

“아!”

연가의 무사들 중 몇몇은 그 모습에 짧은 감탄을 흘렸다.

본가의 절기를 저리 능숙하게 펼쳐내는 소가주의 모습이라니.

그럼에도 하무백은 어렵지 않게 검을 피하고 있었다.

이윽고 연백량의 검은 벽라천화검의 후삼초에 이르렀다.

직계 중에서도 오직 가주와 소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마지막 세 초식.

그것이 하무백을 향해 펼쳐지고 있었다.

하늘을 모두 가둬 부숴 버리겠다는 듯한 패도적이고 강맹한 움직임.

지금까지 환검(幻劍)과 같은 움직임을 보였다면, 후삼초는 그야말로 극에 이른 패검(覇劍)이었다.

하무백도 처음 보는 검초였다.

지난 전쟁에서 연백량과도, 연자경과도 함께 싸운 적이 없으니까.

하무백이 등을 맞대고 함께 싸운 이는 연백운이었다. 연가의 직계였지만, 소가주가 아니었던 그가 익히고 있던 벽라천화검은 전반 오초식이 전부였다.

그랬기에 하무백이 경험한 적 있는 벽라천화검도 거기까지였다.

연백량이 펼치고 있지 않았다면 전혀 다른 검법이라 여길 만큼 분위기가 달랐다.

그제야 하무백이 검을 뽑았다.

몸에 밴 피 냄새를 빼내며 두드리고 연마한 검.

새하얀 검신이 시리게 빛났다.

챙!

하무백이 처음으로 연백량의 검에 자신의 검을 맞댔다.

그리고 울리는 맑은 검명.

그 소리에 연백량은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하무백의 검신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검일뿐이다.

헌데, 어찌 자신의 검강을 저리도 쉽게 막는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서걱하며 힘없이 베여 나가떨어져야 할 검일 진데.

“네 이놈!”

이제 후삼초 중 두 번째 초식이 펼쳐졌다.

비단의 폭풍이 하무백을 덮쳤다.

어마어마한 기세에 옷자락이 흩날렸다.

그럼에도 하무백의 얼굴은 평온했다. 검의 움직임 역시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가볍게 휘두르는 검.

헌데, 그 가벼움이 폭풍 같은 기세로 몰아치는 연백량의 검을 모두 막았다.

그럴수록 폭풍은 점차 잦아들었다.

연가의 무사들은 두 눈을 크게 떴다.

저게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연가의 자랑인 벽라천화검, 그 후반의 삼초식이 저리 간단히 막히다니.

하무백에게는 그런 그들의 반응은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저 가볍게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죽어라!”

드디어 최후의 초식이 펼쳐지려는 찰나.

하무백은 연백량의 품 안에 파고들어 그의 검의 간격을 벗어났다.

푸욱.

그리고 울리는 살을 파고드는 파육음.

하무백의 왼손이 연백량의 단전에 파고들어 있었다.

“끅.”

갑자기 끊긴 내공의 흐름에 연백량의 검에 서려 있는 검강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하무백은 연백량의 단전에 박아넣은 왼손을 움직여 헤집었다.

“크어억.”

연백량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여기 있군.”

그러든 말든 담담한 하무백.

연백량의 단전 한 곳에서 무언가를 잡아서는 그대로 뽑아냈다.

“아악!”

좀 전과는 차원이 다른 커다란 비명을 내지르는 연백량.

그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검을 바닥에 떨어트린 채 양손으로 구멍이 뚫린 단전을 감싸 쥐었다.

“저, 저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사들은 놀란 얼굴로 하무백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검은 실뱀 같은 것이 하무백의 왼손에 붙들린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사방으로 날뛰며 하무백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하는 녀석.

“까분다.”

하무백이 작게 중얼거리며 손아귀에 힘을 주는 순간.

파직.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그것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실로 기괴했다.

연백량의 단전에서 뽑아낸 것이 분명한데.

사람의 단전에 저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조차…….

“아…….”

무언가를 떠올린 동주산이 낮은 탄성을 흘렸다.

하무백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알고 있는 놈이 있었군.”

“흐, 흑마잠혈고…….”

물음에 답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동주산이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에 하무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알고 있네.”

하무백의 말에 연백량이 몸을 떨었다.

그도 그 이름은 들은 적이 있었으니까.

간악하고도 무도한 마교 놈들이 만들어낸 마물 아니던가.

하지만 그것은 마교 놈들이 스스로 잠력을 폭발시키기 위해 사용하던 마물이다.

그것이 왜 연백량의 단전에서 튀어나온단 말인가.

“짚이는 곳은?”

하무백의 물음에 연백량은 허무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이십 년은 늙어 보였다.

기력이라고는 한 줌도 없는 얼굴이다.

당연한 일이다.

하무백이 단전을 헤집으며 완전히 파괴했으니까.

내공이 모두 흩어져 사라졌으니.

게다가 흑마잠혈고가 자리하고 있지 않았던가.

흑마잠혈고(黑魔潛血蠱).

마교의 수많은 고독 중 하나다.

중독된 숙주의 단전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숙주의 내공을 야금야금 먹으면서 자란다.

고독이란 본디 쌀알같이 작은 독충이다.

하지만 이놈은 달랐다.

실뱀처럼 자라서 단전에 똬리를 틀고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숙주의 욕망을 자극하여 들끓게 한다.

숙주가 욕망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을 때를 노려, 숙주의 선천진기를 먹어 치운다.

그리고 그중 절반을 숙주의 단전에 쏟아내는 것이다.

그 절반의 선천진기가 단전에 내공으로 자리를 잡아 숙주는 어마어마한 양의 내공을 사용하게 되는 것이다.

조금 전의 연백량처럼.

마교 놈들은 이것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절반의 선천진기를 잠혈고에게 주어야 하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나머지 절반의 선천진기로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으니.

때문에 지난 정마대전에서 얼마나 많은 정파의 무인들이 흑마잠혈고에 치를 떨었던가.

그것이 지금 정파의, 그것도 오대세가 중 수위에 있다는 호북연가의 소가주의 단전에서 나온 것이다.

연가의 무사들은 넋이 나간 얼굴이다.

그럴 수밖에.

얼마 전 팽가에서 벌어진 일을 이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지금 그 일이 연가에서 일어난 것이다.

팽가가 혈교라면, 연가는 마교.

둘 모두 정파 무림인이라면 끔찍하게 치를 떠는 곳 아니던가.

“이,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소가주의 몸에 저 마물이 들어 있다니!!”

동주산이 발작하듯 외쳤다.

그럴 수밖에.

연백량을 지척에서 보필한 그다. 그도 모르는 일이 연백량에게 일어난 것이다.

“이거 안 보여?”

하무백이 잠혈고를 내밀었다.

아직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잠혈고가 이 정도 크기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선천진기를 먹어야 할까?”

“…….”

동주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알려진 것보다 상당히 큰 크기다. 상당히 오랫동안 연백량의 몸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놈은 아마도 욕정을 먹고 자란 거겠지.”

하무백의 말에 연백량의 노쇠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흑마잠혈고를 빼내고 나니, 어느 정도 이성이 돌아온 것이다.

“허, 허허, 허허허.”

허탈한 웃음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흑마잠혈고가 먼저는 아니었을 거야.”

하무백의 이어진 말.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연백량이 연하민에게 음심을 품은 것이 잠혈고 때문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음심을 품은 것이 먼저이리라.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린 마교의 잔당 어느 놈이 은밀히 잠혈고를 연백량의 몸에 심은 것이다.

고독을 심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알일 때는 그저 먼지와 같으니.

하지만 연백량 정도의 고수라면, 능히 알아볼 정도는 된다.

그것이 연백량의 몸에 들어있으니, 알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무백의 눈에서 무극명륜안이 다시 한번 발동되었다.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수상한 놈은 없었다.

마교의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는 놈은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놈들은 아니었다.

‘끈질긴 놈들 같으니. 뽑아도 뽑아도 사라지지 않는 잡초 같은 놈들.’

하무백이 인상을 찡그렸다.

-크크크. 세상이 모두 속았구나. 그래서 나도 속았구나. 만약 알았다면 이렇게 억울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것을… 오늘 승리했다 기뻐하지 말아라. 마교는 영원할지니…….

마교교주 석원초.

그의 최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절로 기분 나빴던 웃음.

패배하여 죽음을 맞는 자가 지을 수 있는 웃음이 아니었다.

‘개홍천 그놈도 그렇고…….’

혈교교주도, 마교교주도.

모두 최후의 순간에 석연치 않은 찝찝함을 남겼다.

“주산아…….”

그때 힘없는 목소리로 연백량이 동주산을 불렀다.

“네. 소가주님.”

“모두 이대로 본가로 돌아가거라. 가는 길이 험난하겠지만, 능히 갈 수 있을 거다.”

연백량이 축 처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두 눈에는 회한이 가득했다.

“소, 소가주님께서는…….”

“난 아직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루지 못했구나.”

그 말에 동주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지경이 되어서도.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고 올랐다.

흐릿한 눈으로 연백량은 하무백의 흔적이 이어졌던 곳을 바라보았다.

하무백이 나타난 후 거짓말처럼 강시 놈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어쩌면 그 아이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지 않을까.

“내 헛된 욕심이 세가의 무사들의 애꿎은 목숨을 앗았구나. 내 직접 그들을 만나 용서를 구해야 할 거야.”

기력이 없는 목소리였다.

힘이 없는 게 아니라, 정말로 삶의 목표 같은 것이 사라진, 곧 죽을 것만 같은 목소리.

“소가주님. 모시겠습니다.”

동주산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돌아가라고!!! 이건 소가주령이다!”

연백량의 입에서 터진 노성.

조금 전 기력 없는 목소리의 주인이 맞나 싶은 외침이었다.

“소가주님…….”

“난 이곳에 온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돌아가라. 남은 전력이라도 보존해야지.”

그리고 손을 휙휙 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한 손은 여전히 구멍 난 단전을 움켜쥐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동주산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가주를 제외한 이들은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소가주령.

연백량이 그것을 발동한 이상, 연가의 식솔들은 반드시 그것을 따라야 했다.

하지만 소가주를 저리 놓아둘 수는…….

그러나 이내 체념했다.

소가주의 등에 보이는 체념, 회한 그리고 미련.

그 복잡한 감정을 읽었기에.

“돌아간다.”

동주산은 남은 이들에게 그리 말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하무백을 향했다.

자신들을 막을 것인가, 돌려보내 줄 것인가.

하무백은 막지 않았다.

무사들은 연백량의 뒷모습을 일별한 후 왔던 길을 속속 돌아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이곳에는 하무백과 연백량만이 남았다.

연백량은 하무백 따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오직 그 아이가 있으리라 생각되는 곳으로 걸음을 한발 한발 옮겼다.

“크르르르.”

그때 사나운 울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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