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85화 (85/312)

85화. 백부…….

혈강시였다.

비틀비틀 걷는 연백량은 혈강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나갔다.

이제 그는 혈강시 하나도 상대할 수 없는 몸이었으나, 두려움 따위는 없는 듯했다.

“크르르.”

혈강시는 그대로 연백량에게 달려들었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한 손을 휘둘렀으나, 아무 기력 없는 허우적거림에 불과할 뿐이다.

혈강시의 이빨이 그대로 연백량의 목에 틀어박혔다.

“크윽…….”

연백량의 입에서 허약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무백은 무심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인과응보다.

애초에 천륜을 저버린 욕망을 품은 자의 최후라기에는 호사스럽기까지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크르르르르.”

혈강시가 만족스레 피를 빨고 연백량의 목을 놓아주자, 연백량의 입에서도 사나운 울음이 흘러나왔다.

눈에 초점이 사라졌다.

연백량.

그가 혈강시가 된 것이다.

단전에 구멍이 뻥 뚫린 혈강시.

“쯧.”

혀를 차며 손아귀에 쥐고 있던 흑마잠혈고를 터트린 하무백은 그대로 신형을 날렸다.

이렇게 일단락 지었으니, 이제 생도들에게 돌아가야 할 때다.

하무백마저 사라지고 홀로 남은 연백량, 아니 혈강시.

“크르르르르.”

사나운 울음을 흘리는 그것은 한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었을 때는 비틀거리던 걸음이, 혈강시가 되고는 힘이 있는 걸음이 되었다.

그렇게 혈강시는 한곳을 향해 곧장 나아갔다.

***

“늦으셨네요?”

하무백이 모습을 드러내자 한설빙이 의외라는 얼굴로 말했다.

“예상외의 일이 좀 있어서.”

하무백이 짧게 답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전부?”

한설빙의 물음에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내가 무슨 피에 미친 마두로 보이는 건가?”

그 말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곳에 그들을 끌어들인 것이 하무백 아니던가.

마두는 아닐지 몰라도, 적어도 무서운 인물인 것은 맞았다.

“한 명도 없어.”

이어진 말에 한설빙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적어도 연백량.

그만큼은 하무백이 처단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정말로 한 명도 없어.”

하무백은 다시 한번 말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무백의 손으로는 단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무서운 차도살인지계네요.”

“애초에 이곳에 들어오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하무백은 담담히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그것이라도… 연가의 전력 정도면 하나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 않나요? 어떻게 단주님이 손을 쓰지 않고…….”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한설빙.

“손을 안 쓴 건 아니야.”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다.

“후우.”

그때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강시들을 모두 쓰러트린 생도들이 하무백과 한설빙 주변으로 돌아온 것이다.

“제법이군.”

하무백이 담담히 말했다.

그 말에도 생도들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짙게 찌든 피곤이 있을 뿐.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요?”

당진산이 잔뜩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하무백이 짧게 답했다.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달성했다.

연가의 문제도 처리했고, 생도들에게 어느 정도의 실전 경험을 쌓게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저, 정말요?”

당진산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너무도 갑작스레 훈련 종료를 알리는 것이었으니까.

“그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하고.”

이어진 대답에 당진산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려는 찰나.

“내일까지 할까?”

하무백이 물었다.

“아, 아닙니다! 당장 한 번 더 끝내버리죠!”

언제 기력을 회복한 것인지, 당진산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래. 좋은 자세야.”

그 외침에 한설빙이 싱긋 웃으며 걸음을 뗐다.

진법 외곽으로 가서 다시 한번 강시들을 끌고 올 요량인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라 했으니.

적당한 녀석으로 하나만 끌고 와야지.

그리 생각하며 진법의 외곽으로 나온 한설빙.

그녀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진법에 막혀 주변을 배회하는 혈강시 한 개체.

그것 때문이었다.

“크르르르르르.”

사납고도 사나운 울음을 흘리는 그것은.

“여, 연백량…….”

한설빙은 연백량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단전에 구멍이 뚫린 채, 진법 주변을 배회하는 혈강시가 연백량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단전의 구멍은 하무백의 솜씨임이 분명했다.

죽이지는 않았지만, 단전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어떤 면에서는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처사였다.

아니, 단전이 파괴되었다고 하지만, 어찌 연가의 소가주가 강시가 되어 이곳에 있는가.

다른 연가의 무사는 어디로 가고.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완벽하게 끝내야지.”

연가의 소가주 연백량은 이제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저 혈강시 한 개체가 있을 뿐이다.

저 혈강시가 이곳에서의 마지막 훈련 상대가 되리라.

한설빙은 그 강시를 이끌고 생도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하무백의 눈썹이 움찔했다.

강시가 되었지만, 그 기척으로 알 수 있었다.

연백량이었던 혈강시다.

그것이 어느새 진법 근처에까지 도달했다 싶더니, 한설빙이 그것을 이리고 이끌고 오고 있었다.

멀리서 강시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혈강시네.”

“그렇군.”

단목운뢰의 중얼거림에 백리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은 이제 강시의 울음소리로 혈강시와 사강시를 구분할 정도까지 경험을 쌓았다.

“그런데 한 개체라고?”

낙우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믿기지 않은 탓이다.

마지막이라 했는데, 겨우 한 구라니.

하무백 교관과 한설빙 교관이 이렇게 쉬울 리가 없는데.

그런 의구심이 머리를 지배하는 찰나.

한설빙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뒤를 쫓아오는 혈강시.

“아…….”

혈강시의 모습을 확인한 누군가의 입에서 비명인지 탄성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연하민이었다.

당연했다.

이 자리에서 그 혈강시의 모습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이였으니.

당진산과 백리평, 주우명 명문거파의 식솔이고 제자라고는 하나, 언제 연가의 소가주를 마주할 일이 있었을까.

당진산과 백리평은 배분이 미치지 못했고, 주우명은 사부와 함께 은거에 가까운 생활을 한 탓이다.

오직 연하민만이 그 얼굴을 알았다.

한 가문에서 지독하리 만한 취급을 당하며 얼굴을 마주하던 이였으니.

“백부…….”

연하민이 작게 중얼거렸다.

작은 말소리였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었기에 그녀를 향해 고개가 획 돌아갔다.

혈강시가 그녀의 백부라는 것은 그만큼 놀라운 일이었으니.

혈강시와 연하민의 눈이 마주쳤다.

“크르르르. 크르르르르.”

혈강시가 울음을 흘렸다.

그 속에 감정이 깃든 것처럼 들렸다.

마치 환희와도 같은.

하지만 연하민은 그 속에서 다른 것을 느꼈다.

“강시가 되어서도 여전하군요.”

시리도록 깊은 원한이 담긴 말이다.

챙!

검을 뽑아 든 그녀가 혈강시를 향해 다가갔다.

“위험해!”

주우명이 외쳤으나, 연하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구도 연하민을 말리지 못했다.

그녀의 기세가 그렇게 만들었다.

“교관님!”

당진산이 다급히 하무백을 바라보며 외쳤다.

“이제 일대일 정도는 감당 가능하잖아.”

하무백이 무뚝뚝하게 당진산의 외침에 답했다.

“그, 그래도…….”

당진산이 미련이 가득한 얼굴로 말을 끝내지 못하자 어느새 다가온 한설빙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크아아앙!”

그때 혈강시가 사나운 울음을 터트리며 연하민을 향해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연하민의 목을 노렸다.

초점 없는 눈이 번들거리며 욕망으로 가득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연하민은 분명히 알아보았다.

초점마저 잃어버린 눈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욕정을.

강시가 되어서도 결코 놓지 못하는 추잡하기 그지없는 그 욕망을.

“더러운.”

연하민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올랐다.

서걱.

혈강시의 한쪽 귀를 잘라내며 연하민이 혈강시를 지나쳤다.

다시 몸을 돌리는 연하민.

혈강시 역시 연하민을 돌아보았다.

다시금 날아가는 검.

혈강시의 한쪽 눈에 검이 틀어박혔다.

“그 눈으로.”

이어서 다시 움직이는 검.

“어딜 보는 겁니까.”

남은 한쪽 눈에 다시금 검이 틀어박혔다.

혈강시는 강시가 될 때 본신이 가진 능력에 기반하여 그 힘을 가진다.

연백량은 단전이 파괴되고, 흑마잠혈고 때문에 선천진기마저 소진된 상태에서 혈강시가 되었다.

그러니 혈강시라고는 하나, 약하기 그지없었다.

연하민의 검에 그저 허우적거리며, 욕망에 가득한 이빨을 들이밀 뿐이다.

두 눈마저 잃은 지금은 방향조차 찾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연하민의 검은 쉬지 않았다.

그간 켜켜이 쌓아온 원한이 잔뜩 실린 검이다.

혈강시의 팔이 떨어지고 다리가 잘렸다.

마지막으로 그 목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끄어어어…….”

땅에 떨어진 목은 마지막까지 울음을 흘렸다.

퍽.

내공을 가득 실은 발이, 그 머리마저 짓밟아 터트렸다.

“후우…….”

긴 한숨을 쏟아내는 연하민.

그녀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생도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런 연하민을 똑바로 바라보는 이는 오직 하나였다.

하무백.

“후련하냐?”

담담한 물음.

연하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서서히 현실을 직시했다.

눈동자가 잘게 떨리려는 찰나.

“너는 강시 하나를 처단한 것뿐이다.”

하무백의 말이 귀를 파고들었다.

떨리던 눈은 이내 안정을 찾았다.

연하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나직한 감사의 말.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길고 긴 악몽이 이제 끝났다.

깊디깊은 밤이 가고, 이제 찬란한 여명이 밝아오는 것만 같았다.

[설마 이것까지 의도한 거예요?]

한설빙이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으로 전음을 보냈다.

하무백은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예상치 못한 일 때문에 이렇게 되었네.]

그랬다.

설마 연백량의 단전에 흑마잠혈고가 있을 줄이야.

그것 때문에 그의 단전을 파괴했고, 그가 어느 정도 제정신을 차렸다.

그럼에도 욕정을 버리지 못하고 홀로 마림 속으로 들어오다가 강시가 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하랴.

하무백은 그가 물러간다 하면 보내줄 요량이었다.

단전까지 파괴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을 테니까.

단전을 잃은 그가 계속해서 소가주일 수는 없었음이니.

[연자경이 가만히 있을까요?]

한설빙은 뒷일을 걱정했다.

장남을 잃은 연가의 가주의 분노를.

[그가 날 상대로?]

하무백의 물음.

연자경.

그는 하무백의 진정한 실력을 아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산월마림에서 아들의 실종에 대한 책임을 하무백에게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무백에게 단전을 잃었다는 보고는 받겠지만.

동시에 그의 몸에서 흑마잠혈고가 나왔다는 보고도 받을 터.

연자경이 움직일 명분이 부족했다.

[그리고 소가주가 사라진 가문 내부를 정리하는 게 더 시급할 거다.]

맞는 말이다.

차남은 지난 전쟁에서 죽었고, 장남은 이번에 실종이다.

남은 아들은 셋이다.

그중 둘은 개망나니.

후계를 정하기가 골치 아플 것이다.

막내를 소가주로 올리느냐, 아니면 아들을 건너뛰고 손자들 중 후계자를 찾느냐.

이제 연가는 신경을 쓸 일이 없었다.

“자, 우선 산월장성으로 복귀한다. 준비해라.”

하무백의 지시에 생도들의 동작이 빨라졌다.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나는 것이다.

우두커니 서 있는 연하민을 두고 다른 여섯 생도는 짐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

“실패한 듯합니다.”

수하의 보고에 예초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은 했지만, 결과가 나오니 언짢았다.

“산월마림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동주산이 겨우 백오십 정도의 무사들만 이끌고 장성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 말에 예초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그녀가 알고 있는 하무백의 성정이라면 한 명도 살아나올 수 없었으니.

“연백량은?”

“없었습니다…….”

“당한 건가?”

“알 수 없습니다.”

수하의 대답에 예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산월마림은 그런 곳 아니던가.

흔적도 증거도 남기지 않는.

하무백은 그런 곳으로 연가의 무사들을 유인했다.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했건만 역시나였다.

하무백, 그놈은 괴물이었다.

이렇게 딸의 복수는 또 한 발 멀어졌다.

놈에게 자식을 잃은 이가 이렇게 또 한 명 늘어났다.

“연자경에게 정보를 흘려.”

호북연가의 가주, 연자경.

그는 과연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반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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