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어찌 허투루 쓰는 겁니까?
실종(失踪).
두 글자에 불과할 뿐인 단어다.
하지만 그것이 가진 의미는 무겁고도 무거웠다.
종적을 잃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태를 칭하는 말이지 않던가.
그 대상이 무려 장남이다.
연자경은 눈앞의 보고서를 담담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 속은 달랐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당장 불살라버릴 수 있을 것만 같은 노화가 피어오르고 있었으니.
“공후를 불러라.”
수하를 향한 나직한 명.
그의 명령을 받은 수하는 조용히 물러났다.
“하무백…….”
그 이름을 중얼거리는 연자경의 얼굴에는 난감함이 가득했다.
“하오문…….”
그 이름을 중얼거리는 연자경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제 아들을 꼬아낸 것이 결국은 하오문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같잖은 수작을. 죽일 놈들.”
여러 경로를 통해 자신에게 들어온 정보. 그중 그 책임을 하무백에게로 돌리는 정보가 여럿이었다.
출처는 뻔했다.
하오문.
연자경, 자신이 하오문과 하무백 사이의 일을 모를 리 없다.
해서 그 수작이 가소로웠다.
그 수작에 넘어간 아들이 안타까웠고.
다만.
흑마잠혈고.
그것만은 이야기가 달랐다.
대체 어떤 놈이 그 마물을 아들의 몸속에 심었을까.
하오문 놈들은 모르는 정보.
동주산이 작성해 보낸 보고서에만 나와 있는 내용이었다.
“그 아이에 대한 집착이 과하다 여기고는 있었지만 설마 그 마물 때문일 줄이야…….”
혼자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책이 가득했다.
흑마잠혈고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연자경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단전을 살피는 것이었다.
연백량의 몸에 심었다면, 자신의 몸에 심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머리카락 한 올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전신을 관조했다.
몇 번이고 반복을 한 후에야 자신의 몸은 깨끗함을 확신할 수 있었다.
‘마교 놈들이 왜 백량이를…….’
알 수 없었다.
혈교와 마교의 잔당은 분명 천하 곳곳에 남아 있을 터.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을지 속속들이 알기에는 천하가 너무 넓었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가문의 후계자 문제다.
막내를 제외한 남은 아들 녀석 두 놈은 싹수가 없었다.
그저 개망나니일 뿐이다.
연가의 자식이었으니 그나마 그렇게 살 수 있을 뿐.
평범한 범인의 가정에서 태어나 그리 살았다면, 벌써 비명횡사했을 놈들이다.
“그 두 녀석뿐인가…….”
복잡한 감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연자경.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막내아들 아니면, 손자들 중에서 찾아야 하는데, 손자 중에 마음에 드는 녀석은 하나뿐이었다.
하필 이번 사달에 함께 하며, 홀로 먼저 마림을 벗어났던 녀석.
괘씸하기 그지없는 녀석이지만, 동시에 가문을 맡길만한 유일한 녀석이었다.
동주산의 보고서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려한 티가 역력했다.
그에 따르면 이번 사달도 결국 연공후의 조언을 무시하고 제 고집만 부린 아들놈의 행동에 대한 결과였으니.
“그 아이도 처리하기 귀찮아졌군.”
미모를 이용해 적당히 정략혼의 도구로 이용하려 했건만.
하무백의 보호 하에 들어가 버렸다.
이것도 결국은 연공후 때문이었으니.
여러모로 복잡할 수밖에 없는 심정이었다.
“후우…….”
연자경의 현재 심사를 보여주는 깊은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하무백 일행은 산월장성에 도착했다. 성벽 위에 오른 하무백은 물끄러미 산월마림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한설빙의 물음에 하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슬쩍 숲을 바라보고는 장성을 내려왔다.
입술조차 달싹이지 않았기에, 그 순간 하무백이 누군가와 전음을 나누었음을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교룡관으로 복귀하는 길은 평온했다.
산월마림에서 치열하게 강시들과 싸웠던 것들이 모두 한바탕 꿈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분위기도 훨씬 좋았다.
언제부턴가 항시 무언가에 쫓기는 듯했던 연하민의 얼굴에도 평온이 찾아왔다.
교룡관 복귀 이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저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다만 하무백은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음을 알고 있었다.
‘언제 찾아오려나.’
바로 연백진.
교룡관의 부관주였다.
연 가주의 아들인 이상 그에게도 이번 일에 대한 소식이 전해질 터.
“정말로 연 가주는 신경 안 쓰시는 건가요? 하오문에서도 정보를 흘렸을 텐데요.”
무사태평한 하무백의 모습이 걸렸던 것인지 한설빙이 물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연 가주가 걸리는 듯했다.
그 물음에 하무백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저기, 하 교관님?”
“너도 알고, 나도 알아. 연 가주가 어떤 사람인지.”
한설빙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절대 나에게 책임을 묻지 못해. 애초에 책임질 일도 없거니와.”
호북연가의 가주, 연자경.
그는 절대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그의 그런 철학이 호북연가를 오대세가 중 수위의 자리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번에도 한설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익히 아는 사실이니까.
“나와 싸우면, 그건 지는 싸움이야.”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말이다.
또한 반박할 수 없는 말이다.
연백진이 하무백을 찾은 것은 그날 밤이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
“형님은 편히 가셨습니까?”
긴 침묵 끝에 나온 물음이다.
“그걸 내가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않소.”
하무백의 대꾸에 연백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산월마림까지 간 이다.
그리 쉬이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연공후도, 동주산도 연백량의 최후를 지켜보지 못했다.
그를 산월마림에 남겨둔 채 떠났을 뿐.
그가 어찌 되었는지는 그를 마지막까지 지켜본 이만이 알 터.
그게 하무백이라 확신했지만, 정작 본인이 저리 나온다니.
“본가의 무사들과 산월마림에서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다툼이랄 것까지야. 그저 작은 실랑이였소. 실제로 부딪힌 것도 아니고.”
그 말이 맞았다. 하무백이 연가의 무사들에게 직접 손을 쓰지는 않았으니.
“형님과 제법 손속을 나누셨다 들었습니다만.”
“피차간에 깊게 이야기해서 좋을 일은 아니라 생각하오만?”
돌아온 대답.
그 말에 연백진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맞는 말이다.
하무백이 연백량의 단전에서 마교의 마물을 끄집어냈으니.
“알겠습니다.”
체념한 듯한 담담한 대답이다.
기실 하무백이 맹룡대 칠 조의 생도들을 데리고 산월마림으로 가는 데 편의를 제공한 것이 연백진 그 자신 아니던가.
어쩌면 그 역시 이번 일의 공범이었다.
***
“아, 아파. 아파. 아파… 엄마…….”
가녀린 목소리가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절박한 그 목소리는 그것이 단순한 통증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아, 혜아야. 이를… 이를 어째!”
단목운뢰와 단목운혜.
이 두 남매의 어미인 여화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다.
달포 전부터 단목운혜는 가끔식 야심한 밤에 이렇게 고통에 몸부림쳤다.
작고 가녀린 몸에 대체 어떤 병마가 들었기에 이토록 괴로워하는 걸까?
단목운뢰가 교룡관에 들어간 후, 보내주는 돈으로 제법 큰 의원을 찾아가 보기도 했으나 다들 고개를 저었다.
병명조차 알지 못했다.
예전 힘들게 찾아갔던 의원에서 원인을 모른다고 한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명의로 소문난 유명한 의원을 찾기에는 가진 돈이 부족했다.
그곳에서마저 모른다 하면 어찌할지.
운뢰가 고생해서 번 돈을 허투루 쓸 수도 없었다.
그저 긴긴밤, 딸을 꼭 끌어안고 괜찮을 거라고, 곧 나을 거라고 토닥여 주는 것 말고는 어미인 여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은 붉게 젖어 있었다.
그렇게 긴 밤을 보내고 새벽이 밝은 무렵.
그제야 단목운혜는 색색거리며 간신히 잠에 들었다.
이제 통증이 잦아든 모양이다.
또 하루를 보냈다.
이런 나날을 앞으로 얼마나 더 보내야 하는 것일까.
여화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수척해져만 갔다.
그렇게 또 며칠을 보냈을까.
한동안 소식이 없던 단목운뢰가 집으로 왔다.
산월마림으로의 여정을 마치고, 교룡관으로 돌아온 지 열흘.
이제야 겨우 휴식일을 받아 이른 아침에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갑작스레 산월마림으로 가게 되면서, 집에 소식조차 전하지 못했었다.
“어머니!”
집 앞에서 큰 소리로 외치고 집으로 들어간 단목운뢰.
어머니는 반가운 얼굴로 단목운뢰를 보는 한편 검지를 입술 앞에 조용히 세우셨다.
조용히 하라는 손짓.
그 모습에 흠칫 단목운뢰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예쁜 얼굴로 잠들어 있는 여동생 단목운혜가 있었다.
지난번에 왔던 것이 한 달도 넘어서였으니.
정말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다.
동생은 여전히 예뻤다.
단목운뢰 또한 여동생이 있었기에, 교관님이 가끔 하설란에게 보여주는 행동을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 역시 그럴 것 같았으니까.
그 생각에 잠깐 미소를 짓던 단목운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전보다 좀 더 야윈 듯한 동생의 모습.
그제야 어머니의 모습도 다시 제대로 살폈다. 어머니 역시 수척해져 있으셨다.
“저, 어머니…….”
단목운뢰는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전해드린 돈을 아끼느라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지낸 건 아닌지 걱정이 된 탓이다.
그런 아들의 기색을 읽은 여화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뢰아야. 네가 고생해서 보내준 돈으로 나와 혜아는 잘 먹고 잘 지내고 있어.”
인자한 어머니의 목소리.
왈칵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 목소리에 기력이 없는 것이 느껴진 탓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단목운뢰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어머니는 고민 가득한 복잡한 눈빛으로 그런 아들을 바라보았다.
결심을 한 여화는 긴 한숨을 먼저 내쉬었다.
“후우.”
“어머니.”
“그래. 최근 혜아가 좀 많이 아팠단다.”
그 짧은 말에 단목운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저 작고 어린 것이 많이 아팠다는 이야기에 자연스레 나온 표정이다.
“매일 그런 것은 아니고, 며칠에 한 번 정도. 밤에 아프다고 그러면서 잠을 못 자는구나. 그제도 그러더니, 어제는 잘 잤다. 네가 오는 걸 알아서 그런 것인지, 이렇게 잘 자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어머니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의원에서는 뭐라고 해요?”
단목운뢰의 물음에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가는 곳마다 모르겠다고만 하는구나.”
이래서는 자신이 맹룡대와 들어가기 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도 원인을 모른다 했었다.
좀 더 큰 의원에 가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그러면 무창에서 가장 큰 의원에…….”
이내 단목운뢰가 다급히 말하자 어머니가 대꾸했다.
“아서라. 그곳에 간다고 혜아의 병을 알아낸다는 보장이 없지 않느냐. 네가 힘들게 벌어온 돈을 허투루 쓸 수는 없다.”
“혜아의 건강을 위한 건데, 그게 어찌 허투루 쓰는 겁니까?”
단목운뢰가 울먹이는 소리로 물었다.
“원인을 모른다는 이야기만 다시 들을까, 나는 그게 두렵구나.”
어머니의 대답에 단목운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얼마 후 잠에서 깬 단목운혜는 평소와 다름없는 밝은 모습을 보였다.
밥도 잘 먹었다.
그렇게 집에서 하루를 보낸 단목운뢰는 교룡관으로 향했다.
자신이 집에 있는 동안 단목운혜가 아프지는 않았지만,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단목운뢰가 맹룡대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이던가. 가족을 위해서였다.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도 있었지만, 돈을 벌어 가족을 보살필 수 있다는 것 역시 중요한 이유였다.
그런데 동생이 아프다.
많이 아프다.
헌데, 그 원인을 알 수가 없다. 의원도 모른단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어찌 일이 이리된단 말인가.
푹 숙인 고개, 축 처진 어깨.
머리는 복잡하기만 했다.
그렇게 교룡관으로 복귀하던 중, 지난 일이 떠올랐다.
그래, 분명 한동안 연하민의 상태가 자신과 비슷했었다.
걱정이 가득해 보였으니.
그것이 산월마림을 다녀오면서 해결이 된 듯했다.
그 이후로 다시 예전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리고.
후련하냐고 묻던 교관님과 ‘고맙습니다’라 답하던 연하민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교관님이다.
연하민의 걱정거리를 해결해준 것은 교관님이 분명했다.
그때 다들 그럴 것이라 생각은 했었다.
그럼에도 단목운뢰가 그때를 다시금 떠올린 이유는 간단했다.
이제 자신에게도 걱정거리가 생긴 것이다.
세상 하나밖에 없는 혈육의 건강에 대한.
‘그러고 보니…….’
하무백이 자신의 집을 처음 찾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교관님은 한눈에 단목운혜가 아픈 것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단목운뢰의 가슴에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
어깨가 펴졌다. 고개를 들었다.
교룡관으로 향하는 단목운뢰의 걸음에 힘이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