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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무공교관-87화 (87/312)

87화. 좀 걷자

“오셨습니까?”

느즈막한 오후, 허름하고 한산한 주점에서 하무백은 스승 위지군을 맞았다.

하설란이 산월마림으로 향했기에, 위지군은 은밀히 그 뒤를 따랐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스승의 염려였다.

산월마림에서도 위지군은 줄곧 은밀한 곳에서 하설란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하무백이 산월장성을 넘는 순간 따로 움직인 것이다.

하무백의 부탁 때문이었다.

“늙은 사부를 너무 부려 먹는 것 아니더냐?”

자리에 앉는 위지군의 옷 여기저기 쌓인 흙먼지가 그의 여정이 제법 피곤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 말씀하시는 것과는 다르게 즐거워 보이십니다.”

싱긋 웃는 하무백.

위지군도 마주 웃었다.

“그래. 오랜만에 강호를 주유하니 즐겁기도 하더구나. 당금의 강호는 옛날과는 많이 달라. 평화로워진 만큼 좋은 기운이 많았어. 수고 많았다.”

위지군이 강호를 주유하던 시절은 마교와 혈교 때문에 강호 곳곳이 흉험하고 뒤숭숭했다.

긴 전쟁 끝에 지금의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거기에 하무백도 일조를 했고.

위지군은 전쟁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본디 피를 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성정에 더해, 하설란의 치료가 더욱 시급하고 중요했으니까.

“어디서 온 놈이었습니까?”

하무백이 물었다.

“네 예상이 맞았다.”

스승의 대답에 하무백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극명륜안으로 살핀 놈의 내공의 흐름은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어딘가 낯익은 면이 있었다.

확신이 필요했기에, 스승님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는데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힘을 숨겨두고 있더구나. 꿍꿍이를 가진 것 같은 녀석들이야.”

위지군의 말에 하무백은 동의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습니다. 설마 사부님과 저의 이목을 거기까지 속이는 녀석이 있을 줄은 예상치 못 했습니다.”

“철저히 잠입과 은신만을 수련한 녀석이긴 했다만. 사실 나도 좀 놀라긴 했다.”

산월마림 깊숙한 곳에서 혈강시들을 상대할 때, 우연히 느낀 기척이 아니었다면 하무백도 위지군도 몰랐을 놈이었다.

하무백의 기감을 속이고 그 거리까지 들어올 줄이야.

당시 얼마나 놀랐던가.

역시 천하는 넓다고 생각했으나, 설마 그곳에서 온 놈일 줄이야.

“그런데, 그곳에서 그런 은잠술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알 수 없지. 그곳의 것인지, 다른 곳의 것인지. 강호가 혼란하지 않았더냐.”

위지군이 술잔을 기울였다.

하무백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마교의 잠혈고까지 사용한 놈들이니, 어쩌면 마교의 다른 유산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다만, 그때 하무백이 무극명륜안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마공의 흔적은 없었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짧은 술자리를 가졌다.

“이제 그만 일어나자. 난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어. 짤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클클.”

일꾼 위 노인이 자리를 오래 비우기는 했다. 하지만, 이미 일꾼들을 꽉 휘어잡았기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기유찬. 그 귀찮은 놈을 어찌 속여 넘겨야 할지 모르겠다.”

일꾼 하나까지 세세하게 챙기는 존재를 잘 넘겨야 한다는 관문이 남았지만.

위지군이 먼저 떠나고 곧 하무백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슬슬 복귀 시간이로군.”

1박 2일의 외출일이 끝나가고 있었다. 교룡관의 생도들은 아쉬운 마음으로 하나둘 교룡관으로 향하고 있으리라.

그때 하무백의 눈에 익숙한 인영의 뒷모습이 모였다.

보고 있자니 재미있었다.

축 처져서 걷던 녀석이 갑자기 기운을 차린 듯 가슴을 펴는 모습이라니.

“무슨 일 있었나?”

하무백이 슬쩍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갑작스러운 출현에 깜짝 놀란 인영의 주인 단목운뢰.

그는 상대가 하무백임을 확인하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진정시켰다 싶은 순간, 가슴에 자리한 걱정이 치솟아 올랐다.

“교, 교관님… 도와주세요…….”

두 눈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서럽게 말했다.

아니 간절히 말했다.

하무백은 그 모습에 깜짝 놀랐다.

감정의 요동이 커도 너무 크지 않은가.

그것도 이런 대로 한복판에서.

여기저기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이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는 수군거리기도 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을 쓸 가치가 없었으나, 요즘은 조금씩 신경을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동생이 함께 있는 탓이다.

“일단 교룡관으로 복귀가 먼저다. 그러고 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도록 하지.”

“네…….”

하무백의 말에 단목운뢰는 힘겹게 답했다.

***

밤이 깊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단목운뢰.

당진산이 몇 번이나 무슨 일인지 물었으나, 입을 꾹 닫고는 고개를 저을 뿐이다.

당진산의 입장에서는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었지만 어쩌겠는가, 당사자가 저러니.

그렇게 자정이 넘은 시각.

단목운뢰의 두 눈은 여전히 맑았다.

그럴 수밖에.

교룡관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나누자 했던 교관님이다.

언제 자신을 찾아올까 하는 생각에 쉬이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지금 단목운뢰에게 남은 희망은 오직 교관님이었으니.

[자나?]

그때 귓가에 울리는 교관님의 전음성.

단목운뢰는 벌떡 침상에서 일어났다. 옆을 보니 당진산은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창밖으로 나와라.]

이어진 지시에 단목운뢰는 황급히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이전이었다면 겁이 나서 후들거렸겠지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산월장성의 성벽도 아무렇지 않게 오르내리지 않았던가.

창밖으로 나온 단목운뢰는 몸을 훌쩍 날려 아래에 내려섰다.

그곳에는 하무백이 기다리고 있었다.

“좀 걷자.”

하무백이 앞장서 걸었다. 단목운뢰가 그 뒤를 따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무슨 일인 거냐?”

하무백이 물었다.

“혜아가, 혜아가 많이 아픕니다.”

단목운뢰는 침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은 목소리다.

애써 울먹거림을 억누르려 한 기색이 완연했다.

“요즘 가끔씩 밤에 아프다고 괴로워하면서 잠도 못 잔다고 합니다. 어제 보니 몸도 보통 상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하무백은 단목운뢰의 여동생을 떠올렸다.

단목운뢰의 집을 처음 찾아갔을 때 보았던 병색이 완연한 아이.

한눈에 절맥증을 앓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그것도 아마.

‘칠음절맥(七陰絶脈)일 거야.’

사실 몰라볼 수 없는 병증이다.

바로 하무백의 여동생, 하설란이 앓았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병증이었으니.

하무백의 가슴 한 켠이 욱신거렸다.

지금 단목운뢰의 심정이 어떨지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하무백 자신이기 때문이다.

처음 발병했을 때의 당혹감과 무력감.

병증이 무엇인지 알았을 때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그 절망.

그리고 사부님이 치료할 수 있다고, 굉장히 어렵지만 치료해 보겠다고, 아니 반드시 치료하겠다고 하셨을 때의 그 실낱같지만 절실하고도 간절했던 희망.

그 모든 감정을 느끼고 극복하여 오늘을 맞았다.

완치되어 건강해진 여동생, 하설란.

처음 그 소식을 서신으로만 접할 때도 얼마나 기뻤던가.

세상을 다시 사는 듯한 기쁨이었다.

교룡관으로 와서 오랜만에 찾아가 다시 만났을 때의 그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칠음절맥을 앓고 있을 때 떠나서, 완치되기 전에 잠깐 봤었다.

그다음 만남에서 완치된 그 아이의 건강한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니.

그때 하무백의 감정이 어떠했을까.

어떤 말로도 표현을 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이 녀석도 나와 같다.’

하무백은 슬픔과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는 단목운뢰의 눈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았다.

그랬기에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치료할 수 있을 거다.”

나직하지만 힘이 있는 말이다.

그 말에.

단목운뢰는 두 눈을 부릅떴다.

순식간에 붉게 물드는 두 눈.

금세 주룩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토록 바라는 말을 들었을 진데,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흘러내린다.

“정말인가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이다. 난 허언은 하지 않아.”

“하지만, 의원들에서는 원인조차 모른다고…….”

“난 원인을 안다.”

“진맥 한 번 하시지 않으셨잖아요. 그저 잠깐 본 것이 전부인데…….”

단목운뢰는 믿기지 않은 듯, 계속해서 물었다.

하무백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그럼에도 그 반론마저 하무백이 깨부수고 진실로 동생이 완쾌할 수 있음을 확인받으려는 간절한 심정의 발로였다.

하무백은 그 간절한 심정을 알았기에 그저 담담히 대답해 주었다.

“같은 병증을 앓았던 아이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완쾌해서 건강해졌지.”

그 말에 단목운뢰의 두 눈은 더 없이 커졌다.

“누, 누군가요? 그 사람이.”

“하설란. 내 동생이다.”

“아, 아, 아…….”

하무백의 대답에 단목운뢰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는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흐어어엉!!!”

그리고는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안도의 울음이다.

하설란.

수없이 부딪힌 생도 아니던가.

산월마림의 그 험난한 여정도 함께 하지 않았던가.

그 누가, 그녀가 병약한 시절이 있었으리라 생각이나 할까.

자신 역시 상상도 못 한 말이다.

그녀가 자신의 동생과 같은 병증을 앓았고, 다 나아서 건강해졌단다.

그 말인즉슨, 혜아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온몸을 덮치는 안도감에 단목운뢰는 그저 서럽게 울뿐이다.

역시 교관님에게 답이 있었다.

교관님을 찾기를 잘했다.

그런 생각에서였다.

“다만.”

이어진 하무백의 말에 단목운뢰는 울음을 멈췄다.

“치료가 쉽지는 않다. 란이도 몇 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한다. 험난한 길이지.”

하무백은 묵묵히 단목운뢰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울음을 그친 단목운뢰는 결연한 얼굴로 하무백을 쳐다보았다.

“상관없습니다. 방법이 있다면 반드시 치료할 거예요!”

단호한 목소리다.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각오가 가득한.

하무백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자라.”

그 말을 남기고 하무백은 몸을 돌렸다.

단목운뢰는 그렇게 멀어져 가는 하무백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믿음직스러워 보이는 등이다.

첫 만남에서는 참으로 원망스러운 교관이었으나, 이제는 세상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스승이었다.

***

“응? 무슨 일이더냐?”

한창 운기에 집중하던 위지군은 하무백의 기척에 가부좌를 풀고 눈을 떴다.

야심한 시각에 갑자기 찾아온 제자다.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었기에 위지군의 얼굴에는 걱정이 어렸다.

“칠음절맥. 치료법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습니다.”

위지군은 가만히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제가 맡은 아이의 여동생이 칠음절맥입니다.”

“흐음…….”

“란이도 그렇게 괴로워했었습니까? 온몸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잠도 못 잘 정도로…….”

하무백이 침울한 얼굴로 물었다. 그 목소리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오빠라는 인간이 여동생의 아픔은 모른 채 피를 뒤집어쓰며 전쟁터를 전전하고 있었으니.

죄책감이 한꺼번에 밀려온 탓이다.

“그 정도면 병증이 제법 진행이 된 상태겠구나. 란이는 그 정도로 진행되기 전에 치료에 들어갔었다. 물론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기는 했다만. 잠도 못 잘 정도로 아팠던 적도 있고.”

“그렇군요.”

하무백의 목소리가 한층 어두워졌다.

“이제 지난 일이다. 그보다 그 아이 이야기해보거라.”

하무백은 자신이 처음 만났을 때의 단목운혜의 상태, 그리고 오늘 단목운뢰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흐음. 네가 이미 발견했다면 언제고 치료해야겠다 마음먹고 있었을 터.”

“네. 하지만 제 생각보다 절맥의 진행이 빠른 듯합니다.”

하무백은 아직 일 년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으니.

“사람 마음대로 진행이 된다면 그게 어디 절맥증이겠느냐. 날이 밝는 대로 한 번 가보도록 하자.”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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