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자만했다
아침이 밝았다.
수련 시간에 맞춰서 연무장에 나온 맹룡대 칠 조 생도들은 흠칫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가 하무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 왔니?”
한설빙이 다섯 사람을 돌아보며 물었다.
“네.”
당진산이 대표로 대답했다.
“난 하 교관님 말씀만 전해주고 갈게. 우리 애들 봐줘야 하니.”
그 말에 다섯 사람은 한설빙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예상할 수 있었다.
“자습. 그럼 난 간다.”
정말 칠 조 생도들이 예상한 그 말을 남기고 떠나는 한설빙.
“이번에는 무슨 일일까?”
당진산이 생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라고 알고 있을 리 없었다.
다들 고개만 갸웃거릴 뿐.
그 중 오직 단목운뢰만 가슴 속에 작은 기대를 가졌다.
‘어쩌면…….’
동생의 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 시각.
하무백은 위지군과 함께 무창의 빈민가를 걷고 있었다.
위지군은 복잡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희를 만났던 곳도 이런 곳이었지.”
먼 과거를 회상하는 말.
그 말에 하무백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네가 어째서 그 아이에게 마음을 쓰는지 알 거 같구나.”
위지군의 말에 하무백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다.
그 사이 단목운뢰의 집 앞에 도착했다.
“계십니까?”
하무백의 말에 집안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좀 기다리니 움막의 문이 열리며 여화가 모습을 나타냈다.
“아, 교관님. 어찌 이 누추한 곳에 오셨습니까?”
여화는 한눈에 하무백을 알아보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하무백이 여화의 과례를 말리며 말했다.
“운뢰에게 들은 것이 좀 있어서요. 동생인 운혜가 좀 아프다고요.”
그 말에 여화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네…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스럽지만, 어젯밤도 많이 힘들어하다가 좀 전에 겨우 잠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리 조심히 움직였던 것이다.
“이 분은 제가 아는 의원이십니다. 여려 병증에 조예가 있어 모시고 왔습니다.”
하무백이 위지군을 소개했다. 간단한 역용으로 모습을 바꾼 상태였다.
여화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단목운뢰의 교관이 자신들의 사정을 듣고 의원까지 대동해 나타날 줄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여화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딸의 상황이, 그녀로 하여금 거절의 말은 생각지도 못하게 했다.
응당 거절하는 것이 예의임을 알고 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어젯밤에 많이 아파했다고요?”
“네.”
위지군의 물음에 여화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답했다.
“주기가 어떻게 됩니까?”
“전에는 열흘에 하루 정도였습니다만… 최근에는 사나흘에 한 번 정도 그럽니다.”
그 말에 위지군의 얼굴이 살짝 경직됐다.
생각보다 절맥의 진행이 빠른 듯하기 때문이다.
“일단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추하지만 안으로 드시지요.”
위지군의 말에 여화가 문을 열고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허름한 입구를 지나 안쪽 방에 들어가니, 단목운혜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땀에 젖은 머리칼이 지난 밤, 그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위지군이 조심스레 단목운혜의 손목 맥문을 잡고는 내공을 불어넣었다.
자신의 내공으로 천천히, 부드럽게 단목운혜의 내부를 관조해 나갔다.
여화는 간절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부디 무슨 병인지만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병증의 이름조차 모르는 막막한 상태 아니던가.
“너도 살펴보거라.”
위지군의 말에 하무백도 조심스레 단목운혜의 손목을 잡았다.
하무백은 자신의 내공을 조심스레 단목운혜에게 불어 넣었다.
“으음.”
조금 불편했는지 단목운혜가 뒤척였다. 위지군이 손을 잡고 있을 때는 전혀 없었던 반응이다.
하무백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역시 나는 아직 모자라구나.’
그런 하무백의 기색을 읽은 것인지 위지군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더 조심스레 내공을 운용하니 단목운혜의 뒤척임이 멎었다.
하무백은 천천히 그녀의 내부를 관조했다.
설란의 몸은 살펴본 경험이 없었다.
하설란에게 칠음절맥이 발병했을 때, 하무백의 경지는 지금에 비해 낮았기에 감히 시도하지 못했다.
혹여라도 동생의 몸이 자신 때문에 상할까 두려웠던 것이다.
지금은 충분한 경지에 올랐다 생각했건만.
‘자만했다.’
모두 살핀 후 하무백은 살며시 단목운혜의 손목을 놓았다.
“어, 어떻습니까?”
여화가 긴장한 낯빛으로 물었다.
조금 전 단목운혜가 뒤척일 때는 그녀는 자신도 모르고 두 손을 꽉 쥐기도 했었다.
“잠시 자리를 옮기시지요.”
위지군은 그리 말하며 단목운혜의 수혈을 부드럽게 짚었다.
그녀는 그저 자연스레 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침실을 나와 식당의 구색을 갖춘 방 식탁에 앉았다.
낡은 찻잔이 식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무슨 병인가요?”
잘게 떨리는 눈가. 안절부절못하는 눈빛. 제발 이번만은 병명이라도 알았으면 하는 간절함이다.
“칠음절맥(七陰絶脈)이라는 병증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병증이 아닌 체질이지요.”
“아, 아아…….”
그녀의 입에서 복잡한 감정이 담긴 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디어 병의 원인을 알았다는 안도와 동시에 그 병에 대한 절망감이 한데 섞여 있었다.
그녀 역시 무가의 며느리로 살았던 사람이다.
칠음절맥이라는 체질에 대해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위지군을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우리 혜아는 죽는 날만 기다려야 하는 건가요? 계속해서 저렇게 괴로워하며… 어떻게 고통만이라도 줄일 방법이 있을까요?”
모르는 게 약이고 아는 게 병이라는 말이 있다.
절맥에 대해 몰랐다면, 이제 병의 원인을 알았으니 어찌 치료할까 의욕을 보였을 테지만.
절맥에 대해 알고 있으니, 희망의 끈을 놓아 버린 모습이다.
“칠음절맥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위지군이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은 비록 이렇게 지내고 있습니다만… 두 아이는 한때나마 세가의 적손이었습니다. 전쟁의 참화에 저희만 이리 남았습니다만. 저도 세가의 일원이었으니, 작은 지식은 가지고 있습니다.”
여화의 대답에 위지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알고 계신지요.”
“타고난 음기(陰氣)가 강하고, 혈맥이 가늘고 약한 탓에 혈맥이 가닥가닥 끊어지다가 이윽고 죽음에 이르는 체질이라 알고 있습니다. 보통은 열여덟을 넘기지 못한다고…….”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리 빨리 포기를 하고, 딸의 고통만이라도 줄여 달라고 한 것일 게다.
위지군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치료법이라고 알려진 것들이 터무니없는 것들이지요. 완치되었다는 사람도 없고요.”
그 말에 여화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선유곡에서나 치료가 가능할 지도 모른다고 들었습니다.”
조심스러운 말이다.
선유곡.
신진팔대방파 중 한 곳으로 강호 제일의 의술을 지닌 문파다.
의술뿐만 아니라 술법에서도 강호 제일을 다투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여화가 치료를 부탁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시기에는 이릅니다.”
“네?”
위지군의 말에 여화의 얼굴에 작은 기대가 어렸다.
“세상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제가 칠음절맥을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험난한 과정을 거쳤지만요.”
“아… 아… 아!”
말을 잇지 못하던 여화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어, 어르신. 제발, 제발, 제발!! 불쌍한 저희 혜아를, 혜아를… 부디… 사, 살려주세요…….”
무릎을 꿇고 위지군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는 여화.
하무백이 얼른 여화를 일으키려 했건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살려주겠다는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혜아가 깨겠습니다. 일단 일어나십시오. 부인. 제가 왜 어르신을 모시고 왔겠습니까.”
하무백의 말에 그제야 여화가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이런 병일 거라 짐작은 하고 왔습니다. 무백이가 그리 알려줬으니.”
그 말에 여화의 시선이 하무백에게로 향했다.
“제 동생 역시 같은 체질이었습니다. 해서 지난번에 보았을 때, 그러지 않을까 추측했었지요.”
“그, 그러시면 동생분께서는…….”
간절함이 담긴 물음이다.
“지금 맹룡대 이십 조의 생도입니다.”
하무백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
여화의 두 눈에 희망이 생겼다.
“그것도 여기 어르신께서……?”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르신…….”
여화의 시선이 위지군에게로 향했다.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시일이 제법 걸리고 쉽지는 않을 겁니다만.”
“가, 가, 감사합니다.”
여화가 다시 털썩 무릎을 꿇었다.
“흑흑. 흐흐흑. 흑흑.”
그리고 하염없이 울었다.
이번만은 하무백도 말리지 않았다.
그녀의 심정을 알았기에 그냥 마음껏 울게 내버려 둔 것이다.
한참을 기다려 여화가 진정했다.
“치료법은 어려울 게 없습니다. 음기를 약화시키고, 양기를 키우며, 혈맥을 튼튼하게 해준 후 혈맥을 넓히면 되지요.”
“그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위지군의 모습에 여화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할 방법을 몰랐기에, 지금까지 불치라 알려져있는 것이지요. 저도 그 방법을 찾는 과정이 험난했습니다. 그리고 치료법 또한 고통스럽고 험난했고요.”
“혜아는 이겨낼 거에요.”
“그럼 일단 오늘은 먼저 가볍게 음기를 억누르는 침을 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잠들어 있으니 지금 바로 하도록 하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곧 단목운혜는 침상에 나신으로 누웠다.
앙상하게 말라 뼈밖에 없는 몸.
“흐윽.”
딸의 앙상한 몸을 본 여화는 다시 한번 눈물을 삼켰다.
위지군은 하무백을 보았다.
“전력을 다해 잘 살피거라.”
“네.”
이 또한 가르침이었다.
하무백은 곧바로 무극명륜안을 펼쳤다.
위지군은 무심한 눈으로 침을 단목운혜의 몸에 놓았다. 빠르고 정확한 손놀림.
그 하나하나가 모두 하무백의 뇌리에 박혔다.
침술이 진행됨에 따라 단목운혜의 몸안의 기운의 움직임이 변했다.
넘치기 직전까지 가득 차 있는 음기. 그 음기의 흐름이 잔잔하게 잦아들었다.
아마 저 음기가 출렁일 때마다 혈맥이 버티지 못했기에 극심한 통증이 있었으리라.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끊어진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단목운혜의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일 각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백여 개의 침이 단목운혜의 전신에 꽂혔다.
마지막 침을 꽂자, 음기의 흐름이 완전히 멈추는가 싶더니, 방향이 바뀌었다.
세맥으로 아주 천천히 조금씩 흐르더니, 침을 따라 조금씩 허공으로 흘러나왔다.
그에 따라 주변에 한기가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다.
“이, 이건?”
으슬으슬함을 느낀 여화가 위지군을 바라보았다.
“음기가 조금씩 빠져나오는 겁니다. 아주 미세하게 빠져나온 게 이 정도인 음기를 저 작은 몸 안에 담아두고 있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꼬. 쯧.”
위지군이 안쓰러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단목운혜를 내려다보았다.
“한 시진 정도 이러고 있으면 될 겁니다. 그러면 밤에 고통스러워하는 일이 많이 줄 겁니다. 보름에 한 번 정도로요. 물론 보름이 되기 전에 제가 다시 올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여화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잘 먹어야 합니다. 사실 칠음절맥의 진행 단계로 보자면 혜아의 음기는 아직은 초기입니다. 헌데 저 정도의 고통은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갈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몸이 약한 탓에 증상이 빨리 나타난 거지요.”
“네. 명심하겠습니다.”
한 시진이 지났다.
위지군은 침을 모두 뽑고는 집을 나섰다.
여화는 문 앞까지 나와 두 사람을 배웅했다.
“살펴 가십시오.”
꾸벅 인사를 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걸음을 옮겼다.
“봤느냐?”
“네.”
“란아를 치료하면서 알게 되고 깨달아 완성한 거다. 제대로 익혀 두거라. 란아 덕에 탄생한 침술이니. 란아는 저 과정에서조차 고통을 참아야 했었다. 모자란 사부 때문에.”
그때를 떠올린 것인지 위지군의 두 눈에 습막이 어렸다.
“감사합니다.”
하무백은 그 말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헌데 혜아 저 아이가 잘 먹고 지낼 수 있겠느냐?”
“제가 해결해야지요.”
그 말을 남기고 허리를 꾸벅 숙인 하무백은 위지군과는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