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89화 (89/312)

89화. 칠음절맥입니다

하무백이 향한 곳은 한 담장 앞이다.

그 앞에 늙은 거지가 쭈구리고 앉아 있었다.

하무백이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방 노인이라고 들었습니다만.”

거지 노인은 언젠가 단목운뢰가 방 할아버지라 불렀던 이였다.

“흘흘. 그래. 내가 방가일세.”

방 노인은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째 내가 팽가에서 그 난리를 치고, 이번에는 산월마림에서 연가랑 그 난리를 쳤는데… 무창이 조용하다 했습니다. 철담개 그 노인네가 무창으로 달려올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하무백 역시 빙그레 웃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만.”

방 노인의 대꾸에 하무백은 그저 고개만 주억거렸다.

“지난 전쟁에서 전장을 초토화시키다가 홀연히 사라진 개방의 최고 고수 벽력개의 성이 방씨라 들었습니다.”

그 말에 방 노인이 흠칫 반응을 보였다.

벽력개(霹靂丐).

개방 역사상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절대고수였다.

개방의 대호법이었던 그는 현 부방주인 철담개의 윗 항렬로, 따지자면 전대 고수였다.

그야말로 전장의 적들을 쓸어버리고 다니던 절대고수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다.

개방으로서는 커다란 전력의 손실이었던 사건이다.

그렇게 갑자기 사라진 그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이다.

그것도 볼품없는 거지의 행색을 하고서는.

하무백도 그를 직접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지난 전쟁에서는 늘 다른 전장에서 싸웠으니.

“이런 곳에서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르신.”

정천맹주조차 제 편할 대로 대하는 이가 하무백이다. 그런 그가 어르신이라 하며 존대를 하는 이라니.

“흘흘. 그리 대우해주니 고맙구만. 자네 소문은 많이 들었다네. 예나 지금이나.”

벽력개 방 노인도 하무백의 존재를 익히 알고 있었다. 지난 전쟁의 활약뿐만 아니라 최근의 일까지.

“단목세가의 멸문 때문이었습니까?”

믿도 끝도 없는 질문이다.

하무백이 던진 물음에 벽력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빛은 복잡했다. 그중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것은 회한과 후회였다.

“내가 놈들에게 속지만 않았어도… 막을 수 있었던 일이야. 멍청하게도. 내가 달려갔을 때는 모든 게 끝나 있었지.”

자신에 대한 혐오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냥 단순한 관계는 아니었나 보군요.”

“불알친구였네. 당시 가주였던 환이 그 녀석과는 말이지. 클클.”

“죽마고우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나 같은 거렁뱅이에게는 그 정도 말이면 충분해.”

하무백의 말에 벽력개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늦게나마 도착했을 때는 정말로 다 죽어 있었어… 아무것도 없었지. 환이 그놈만 겨우 숨이 붙어 있어서. 그놈이 나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이 저 아이들을 돌봐 달라는 거네. 겨우겨우 탈출시켰다고.”

하무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전쟁 중에, 가문이 멸문을 하는 와중에 여인의 몸으로 어찌 아이를 데리고 이곳 무창까지 온 것인가 했다.

방 노인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는 그의 도움이 있지 않을까 추측을 했었는데.

역시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벽력개가 전장에서 사라지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보호했으니, 아이를 가진 여인의 몸으로 이곳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운뢰의 말로는…….”

“배신자 새끼 말인가? 물론 나도 들었네. 여전히 쫓고 있는 중이야.”

분노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혹시 세가의 무공도 가지고 계십니까?”

하무백의 물음에 벽력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가의 맥을 끊을 수야 없지 않은가. 환이 그 녀석이 직접 알려준 비고를 알고 있다네.”

그랬다.

단목세가 정도의 명문세가쯤 되면 만약을 대비한 비고 정도는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헌데, 왜…….”

하무백의 의문에 벽력개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화. 그 아이가 원하지 않았네. 그 참화를 겪으며 강호라는 곳에 환멸을 느낀 게지.”

그럴만했다.

하룻밤에 가문이 사라지는 것을 겪었으니.

“그래도 저리 살고 있으면…….”

하무백이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곧 멈췄다.

그들의 사정이다.

굳이 하무백이 참견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자신이고, 그들은 그들이다.

하무백으로서는 절대 여화의 심정을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음이었다.

“하면, 단목운혜 그 아이의 병세는 알고 계셨습니까?”

벽력개가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나로서는 도무지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었네. 뭐, 나 같은 무인이 병증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까만, 그래도 저자의 어지간한 의원만큼은 안다고 여겼는데… 해서 선유곡 쪽으로 어떻게든 부탁해보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는 중이었다네.”

“칠음절맥입니다.”

하무백이 짧게 말했다.

그 말에 벽력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예상치 못한 병명 때문이다.

“그, 그게 정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하무백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하무백과 위지군의 기감 바깥에 머물렀기에, 벽력개는 여화와 그들 사이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

그저 방문했다가 떠난다는 정도만 알 뿐.

“허어… 그 불쌍한 아이를 어찌하나… 아니야. 절맥이라도 방법이 없지는 않을 터. 내가 직접 선유곡으로 가봐야겠군.”

결심한 듯 결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벽력개.

“만나서 반가웠네. 운뢰 그 녀석 잘 부탁하네. 자네라면 알아봤겠지만, 제법 재능이 있는 아이야.”

그리고 몸을 돌리려는 찰나.

“칠음절맥이라면 치료할 수 있습니다.”

벽력개의 발을 붙잡는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황급히 몸을 돌리는 벽력개에게 하무백은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저, 정말인가? 그 말?”

모두 들었음에도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물음이다.

“제 동생의 일입니다. 그리고 제 스승님의 일이고요.”

가족과 스승을 두고 허언을 할 리는 없었다.

“허, 허허. 허허허. 고맙네. 정말 고마워…….”

벽력개는 어느새 하무백의 두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잘 먹어야 한답니다.”

벽력개를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라면야. 내 해결할 수 있네. 비록 거렁뱅이지만 말일세. 지금까지야 여화 그 아이가 거절해서 어쩔 수 없었지만, 운혜 그 아이의 건강이 걸린 일이니 이제 거절하지 않을테지.”

그 말에 하무백의 의문이 하나 더 풀렸다.

벽력개 정도의 인물이 은밀히 지켜주고 있는데도 저리 가난하게 살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단목운뢰의 어머니가 도움을 거절한 것이다.

자식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 도움을 받아도 되었을 법도 한데…….

하무백은 이내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상념을 지웠다.

어차피 그들의 일이다.

“그리고 이런저런 약재들도 필요할 겁니다.”

“미리 알려만 준다면 어떻게든 구하겠네. 선유곡의 약재 창고라도 털어오지.”

한편으로는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무백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벽력개도 다시 몸을 일으켰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하는 벽력개의 눈시울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늘 눈물을 참 많이 본다는 생각이 든 하무백이다.

벽력개가 나서겠다 했으니, 자잘한 문제는 모두 그가 해결해 줄 것이다.

이제 신경 쓸 것은 칠음절맥의 치료 과정뿐이다.

하무백은 천천히 교룡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호남성 형산.

중원 오악 중 남악이다.

그만큼 깊고도 험준한 산이나, 당금에 있어서 더 유명한 것은 선유곡이었다.

신진팔대문파 중 일좌를 차지하고 있는 선유곡이 자리한 곳이 바로 형산이었다.

선유곡 깊은 심처에 수심이 가득한 이들이 모여 있었다.

“이번에도 실패인가?”

“그렇습니다.”

“허어, 어찌한단 말인가. 분명 의서에 나와있는 대로 진행하였거늘.”

“다시 한번 검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다른 의서를 찾아보는 것이…….”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었다.

중원 최고의 의술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선유곡이다.

그런 곳의 중진들이 모여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앞에 둔 듯 수심에 잠긴 모습이다.

“신서(神書)를 열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중년 사내의 말에 상석에 앉은 노인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노인은 이곳 선유곡의 곡주 공손무외였다.

“아직 곡의 모든 역량을 사용한 것이 아니다. 좀 더 치료해 본다. 더군다나 일단은 절맥의 진행은 멈춘 상태이니.”

고심을 하던 그가 결정을 내렸다.

곡주의 결정은 절대적이었기에 다들 고개를 숙였다.

다만 신서를 열어보자 했던 중년인만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아버님. 아니 곡주님. 진행을 멈췄다 하나 일시적인 겁니다. 구음절맥입니다. 언제 어떻게 진행될지 모릅니다. 신서를 열어봐야 합니다.”

중년인은 선유곡의 소곡주 공손우경이었다.

아들의 주장에도 공손무외는 고개를 저었다.

“신서를 열어본다는 것은 희생이 너무 크다. 아직은 좀 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여기는 선유곡이야.”

“하지만 환자가 만물련주의 금지옥엽입니다. 혹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공손우경이 걱정 어린 얼굴로 말했다.

만물련.

역시나 신진팔대문파 중 한 곳을 차지하고 있는 문파였다.

대장장이들이 모여 만든 문파로, 중원 최고의 병장기를 만들어내는 곳이다. 또한 기관진식에 있어서도 가히 중원 최고라는 자부심을 가진 곳이다.

“아직 우리가 알고 있는 치료법이 더 남았다. 게다가 백 년 전에 오음절맥도 치료한 기록이 있어. 그 방법들도 다 사용하지 않았다.”

“환자의 몸이 약합니다. 그 치료법들을 모두 시도해보는 것을 버틸 수 있을까 염려됩니다. 특히나 절맥으로 인해 기맥과 혈맥이 약해 몸을 보하는 영약을 쓰는데도 한계가 있는 상황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곡주와 소곡주,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가진 두 사람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부딪혔다.

자리한 다른 의원은 두 사람 중 어느 한쪽의 편도 들 수 없었다.

양쪽 다 일리가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으니.

“그래도 신서는 안 된다.”

“아버님!”

공손무외의 단호한 말에 공손우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은 안 된다. 그것은 최후의 방책이야. 신서는 의술이 아닌 술법이다. 우리는 의문(醫門)이다. 의술이 먼저야.”

“의문이기도 하지만 주술과 술법 또한 본곡의 중요한 기둥입니다.”

공손우경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쾅!

그 모습에 공손무외가 주먹으로 거대한 탁자를 내리쳤다.

“네 이놈!!! 소곡주라는 놈이 자그마한 난관에도 신서에 의지하려 하느냐! 신서를 여는 대가가 무엇인지 정녕 모른단 말이냐!”

“구음절맥의 치료법이 어찌 작은 일입니까!”

공손우경은 지지 않았다.

“그래 구음절맥의 치료법이 어려운 난관이라 하자. 그 난관을 신서에 의지해 쉬이 해결하면 다음은 어떨 것 같으냐? 더 쉬운 일도 신서에 의지하려 할 게다. 그렇게 신서에 의지하다 보면 신서의 유혹에 빠져 무작정 신서만 찾게 되고 스스로를 망가뜨리게 된다. 아니 본곡을 망가뜨리겠지. 신서는 사용하기에 따라 신서가 아닌 마서(魔書)인 거다!”

공손무외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공손우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신서에 의지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구음절맥은 그 정도로 난해한 병증이었다.

정확히는 체질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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