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90화 (90/312)

90화. 내가 직접 가보겠다

공손우경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다시금 강하게 말했다.

“오음절맥과 구음절맥은 같은 절맥증이지만 치료의 난이도가 다릅니다. 오음절맥은 다섯 개의 혈맥이 막히지만, 구음절맥은 아홉 개의 혈맥입니다. 전신의 주요혈맥 아홉 곳이 모두 막힌단 말입니다. 오음절맥의 치료법을 연구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도 없고요.”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었기에, 자리에 함께한 다른 의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무외 역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신서를 여는 대가가 무엇인지는 너도 잘 알 게다.”

분노에 가득 찼던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다. 그 목소리에는 질책과 걱정이 가득했다.

“제 수명이지요. 제 수명이 좀 깎인들, 그 아이는 새로운 삶을 얻게 될 겁니다.”

“네 놈 하나의 수명이 아니다. 신서를 열려면 세 사람이 필요하다. 세 명의 수명을 깎아서 그 아이를 치료하는 게야. 아무리 만물련주의 금지옥엽이라 하나…….”

“아버지!”

공손우경이 큰 소리로 외치며 공손무외의 말을 잘랐다.

“그 아이는 분명 만물련주의 금지옥엽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의 외손녀입니다. 저에게는 조카이고요!”

공손무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더는 말이 없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였다. 그러나 선유곡의 곡주라는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야 했다.

자신의 손녀라 하나, 만물련의 자손.

엄밀히 따지면 외인이었다.

외인을 살리고자, 선유곡의 소중한 인재들의 수명을 소모할 수는 없었다.

신서는 취향이 까다로웠다.

아무나 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재능이 반짝반짝 빛나는 이들에게만 반응했다.

“아버지!”

공손우경이 다시 한번 외쳤다.

“결정된 대로 시행한다. 시간이 없다 했으나, 현재 절맥의 진행은 멈췄으니 어느 정도 시간은 벌었을 터. 어떻게든 치료법을 찾아낸다.”

그 말을 끝으로 공손무외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더 이상의 이견은 허용치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아…….”

그 모습에 공손우경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신서를 여는 것은 곡주의 허락이 필수적이었다.

신서를 봉인해둔 곳의 열쇠가 곡주의 신물(信物)이었으니.

“지유야. 지유야. 어찌하면 좋겠느냐… 불쌍한 것…….”

공손우경은 구음절맥을 가진 조카의 이름을 읊조리며 두 눈을 감았다.

***

단목운혜의 치료는 순조로웠다.

사흘에 한 번씩 위지군과 하무백이 집으로 방문해 침을 놓았다.

그럴 때마다 눈에 띄게 안색이 좋아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밤에 고통에 괴로워하는 일도 없어졌다.

여화가 벽력개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인지, 단목운혜의 몸도 몰라보게 좋아졌다.

얼굴에 포동포동 살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잘 먹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좋구나.”

침을 거둬들이며 위지군이 담담히 말했다.

수혈을 짚어 두었기에 오늘도 단목운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목을 잡아 내부를 살피던 위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약을 써도 될 듯하다.”

하무백이 위지군의 눈짓에 따라 단목운혜의 손목을 잡고 내부를 살폈다.

그간의 변화를 직접 확인하는 과정이다.

위지군은 단목운혜를 치료하는 한편 하무백을 가르치고 있었다.

하설란을 치료하면서 얻게 된 절맥증의 치료법을 제자에게 전하는 것이다.

“필요한 약재는…….”

위지군은 약재를 하나하나 알려주었다. 하무백은 그것들을 듣자마자 바로 외웠다. 이제 이 약재들을 벽력개에게 알려주면 될 일이다.

그러면 그가 알아서 구해올 것이다.

‘선유곡의 약재 창고라도 털어오겠다 했으니.’

하무백은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만한 각오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으니.

오늘의 치료를 모두 마치고 교룡관으로 돌아가는 길.

하무백은 역시나 위지군과 헤어져 벽력개에게로 향했다.

위지군에게는 이미 벽력개의 존재와 그의 조력을 알려둔 상태였다.

“고생이 많네.”

여전히 빈민가의 담벼락에 기대 앉아 있던 벽력개가 하무백을 보자 반가운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하루하루 나아지는 단목운혜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이제 약을 써야 할 때입니다.”

“혈맥이 제법 단단해진 모양이구만.”

하무백이 한 말의 의미를 대번에 알아차리는 벽력개다.

“겨우 이 정도인 거죠. 약재는…….”

하무백은 약재를 하나하나 자세히 알려 주었다.

벽력개는 어디서 난 것인지, 다 부러져 가는 지필묵을 꺼내 빠르게 받아 적었다.

“후우. 제법 많구만.”

“앞으로 더 많아질 겁니다.”

하설란을 치료하는 데 들어간 모든 약재를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알았고, 그것만 해도 지금 알려준 약재와 비교할 수 없이 많았다.

그랬기에 그리 확언할 수 있는 것이다.

“알았네. 내 준비하지. 시일은 조금 걸릴 듯한데 상관없는가?”

“이제야 약을 쓸 수 있을 최소한을 넘어선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침으로 혈맥을 다스리다가 약재가 준비되는 대로 약을 쓰면 될 겁니다.”

하무백의 대답에 벽력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하무백은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홀로 남은 벽력개.

다시금 약재를 받아 적은 종이를 살폈다.

이제 시작이라는데 필요한 것들이 상당했다.

게다가 그로서는 처음 듣는 약재도 몇 있었다.

“이제 시작인 게 이 정도란 말이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약재가 필요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벽력개라 하나, 그 많은 약재를 모두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벽력개가 모든 것을 구할 수는 없었다. 하무백도 벽력개가 모든 약재를 구해오기를 바란 것은 아닐 터.

그럼에도 벽력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모든 약재를 구하고 싶었다.

“후우. 결국은 털 수밖에 없겠구만.”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벽력개.

“어디 보자… 호남성이라. 제법 먼 길이 되겠어. 이 나이 먹고 빨리 다녀올 수 있을지 모르겠구먼.”

벽력개가 그리 중얼거린다 싶은 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마음먹은 순간 땅을 박찬 것이다.

벽력개의 경공은 엄청한 속도를 보였다.

그의 별호인 벽력의 의미 중 하나는 섬전처럼 빠른 경공이었다.

아침 첫 수련 시간.

맹룡대 칠 조 인원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장간의 잡일꾼들이 연무장으로 찾아온 것이다.

“교관님. 저건?”

“응? 너희들 요즘 외공 수련 시간이 좀 편하잖아. 그럼 안 되니까.”

당진산의 물음에 하무백이 태연하게 답했다.

“아니. 적응한 것이 왜 안 된다는 겁니까…….”

당진산이 하소연했다.

“그러면 외공 수련이 안 되지. 최대한 힘들게 괴롭혀 줘야 수련이 되는 법이니까.”

그 말에 당진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진산은 입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 말은 선을 넘어도 심하게 넘은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리 말한다만 난 저 정도로는 수련이 안 돼서 안 하는 거다. 수련 안 하고 노는 게 아니고. 뭐, 정 궁금하면 내가 하는 수련 언제 한 번 함께 해보든지.”

하무백이 귀신같이 당진산의 불만을 눈치채고 말했다.

그 말에 당진산은 세차게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냥 저희 수준에 맞는 수련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당진산은 재빨리 흉측한 쇳덩이를 향해 달려갔다.

이미 다른 생도들은 일꾼들을 도와 쇳덩이를 제자리에 놓고 있었다.

반년이 넘게 수련한 것들인지라, 익숙하게 정리했다.

더 무거워진 것이 달라졌을 뿐.

정리가 끝나고 바로 수련이 시작되었다. 이틀에 한 번 하는 외공 수련.

단목운뢰가 낑낑거리며 무거운 쇳덩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하무백이 그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다친다. 그건 수련이 아니라 학대인데.”

하무백의 말에 단목운뢰가 우뚝 멈췄다.

사실 그날 하무백에게 고민을 이야기하고 상당한 시일이 지났다.

아직 외출일이 돌아오지 않아 집에 가보지 못한 상태.

하무백으로부터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기에 심란한 마음에 몸을 혹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 그날 수련에 나타나지 않고 어딘가로 갔었건만.

“외출일이 곧이지?”

“네.”

움직임을 멈춘 단목운뢰가 답했다.

“집에 가보면 좀 놀랄 거다. 혜아가 이제는 밤에 아파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무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말에 단목운회의 표정이 대번에 달라졌다.

“그, 그럼…….”

기대가 가득한 얼굴.

하무백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조금 좋아진 것뿐이야. 그렇게 쉽게 치료되는 병이 아니다. 앞으로 차차 더 좋아질 거야. 그러니 넌 네 일을 제대로 해.”

하무백은 단목운뢰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다른 생도를 살피러 움직였다.

***

뽀얀 먼지를 잔뜩 뒤집어썼다.

그럼에도 외모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애초에 땟국물이 줄줄 흐르던 거지였으니.

그렇게 도착한 곳은 형산 깊숙한 곳의 한 계곡.

아는 이들이 거의 없다는 선유곡의 본산이었다.

“후우. 힘들었구만.”

허리를 툭툭 치며 벽력개가 태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누, 누구냐!”

갑작스레 나타난 인영에 수문위사들이 깜짝 놀라 경계태세를 취하며 외쳤다.

심산유곡에 위치한 선유곡인지라, 저런 괴인을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음이니.

“자네들 곡주 친울세. 가서 호군이 왔다 전하시게나.”

그리 말한 벽력개는 근처 바위에 등을 기대고는 털써 주저앉았다.

그의 기행에 수문위사는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일단 보고를…….”

괴인이긴 하지만, 스스로 곡주의 친우라 칭하는 이다. 자기들 선에서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수문위사 조장이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곡주의 친우라는 말 때문일까.

보고는 빠른 속도로 윗선으로 올라가 반 시진이 되기 전에 곡주에게 당도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이 곡의 정문에 나타났다는 보고 치고는 이례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왠 거지 같은 이가 나타나 내 친우라 주장한다고?”

공손무외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흠…….”

공손무외는 기억을 더듬었다. 없었다. 자신의 친우 중에 기별도 없이 이렇게 거지 꼴로 나타날 이는 없었다.

“그, 호군이 왔다 전해 달라했답니다.”

막 입을 열려던 공손무외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 이름 때문이다.

“호군이라 하였다고?”

살짝 높아진 목소리.

“네. 그렇습니다.”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공손무외는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아는 이들 중 호군이라는 이는 단 한 명이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강호에서 사라졌던 이름.

그가 아니 그분이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것이라고는 어찌 상상이나 했던가.

그렇게 애타게 찾을 때도 찾지 못했던 분 아닌가.

‘혹시 사칭… 아니, 아니야. 직접 확인하면 될 일이다.’

공손무외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직접 가보겠다.”

그 결정에 수하들은 깜짝 놀랐다.

곡문에 괴인이 나타났다고 곡주가 직접 나설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괴인을 데리고 오라 하면 될 일 아니던가.

그러나 수하들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공손무외는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고, 곡주님!”

수하들이 재빨리 그 뒤를 따랐다.

곡의 정문까지 이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공손무외가 경공까지 사용해가며 빠르게 움직인 탓이다.

수문위사들은 갑작스러운 곡주의 출현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든 말든 공손무외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는 노거지.

분명 자신이 아는 얼굴이었다.

기억 속의 얼굴보다 더 늙었지만 말이다.

“어, 어찌…….”

공손무외의 목소리가 떨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