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이 답답이들아!
“응?”
벽력개가 공손무외를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무외. 왜 네가 나오는 게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벽력개.
그의 물음에 공손무외는 정말이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벽력개를 바라보았다.
“어찌하여 이제야 찾아오신 겁니까… 방 숙부.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허탈함. 그리고 원망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울먹거리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말하는 공손무외.
“왜 그러는 게냐. 무외야. 무슨 일이 있는 게야? 대광이는 어디 가고?”
공손무외의 모습에 벽력개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뒤따라온 수하들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현 곡주는 물론이거니와 선대 곡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부르는 거지 노인에, 그런 그를 숙부라 칭하는 현 곡주의 모습이라니.
저런 사람이 있을 리가…….
그때 누군가 한 사람이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 벼, 벽력개 어르신…….”
선대곡주의 죽마고우이자 지기지우가 벽력개인 것을 생각해낸 것이다.
눈앞의 저 노인이 벽력개라면, 곡주의 저런 반응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안으로 드셔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공손무외가 다시 한번 말했다.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기에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비가 내온 차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곳까지는 어인 일로 찾으셨습니까? 저희가 숙부님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는데…….”
공손무외의 물음에 벽력개는 품에서 꼬깃꼬깃 접힌 종이를 꺼냈다.
“그럴 연유가 좀 있었다. 오랜 시간 연락도 없이 지내다가 이렇게 염치없이 찾아온 건, 여기에 있는 약재를 구할 수 있을까 해서다. 네게 부탁하려니 더 면목이 없구나. 대광이는 어디에 있는 게냐?”
벽력개가 재차 물었다.
공손무외는 종이를 받아 들었다.
“오 년 전에 귀천하셨습니다.”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하려 했으나, 이미 공손무외의 눈시울이 붉게 변해 있었다.
순간 벽력개의 움직임이 멈췄다.
여태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기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이다.
“대, 대광이가 어찌 되었다고?”
이윽고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벽력개.
“귀천하셨습니다.”
“…….”
벽력개는 한참을 아무 말도 없었다.
그 시간은 찻잔의 김이 모두 사라지고서도 상당한 시간이 흐를 때까지였다.
“어찌 된 게냐?”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병환이 깊으셨습니다.”
“선유곡주의 생을 다하게 할 병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선유곡이라 한들 모든 병증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치료할 수 있는 병증보다 치료할 수 없는 병증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병증이 희귀하다 할 뿐이지요.”
“으음…….”
공손무외의 솔직한 말에 벽력개는 침음을 삼켰다.
기실 단목운혜의 절맥증도 과연 선유곡에서 치료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자신 아니던가.
자신과 선유곡주의 인연이면 단목운혜의 치료를 부탁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쉬이 행하지 못한 것은, 단목운혜의 병세를 과연 치료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절맥증인 것을 몰랐음에도.
해서 하무백에게는 선유곡에 부탁하려 알아보는 중이라 둘러댄 것이다.
진실은 그 자신이 확신을 갖지 못한 탓이다.
아니 확실히 치료할 방도가 선유곡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은 절대 자신이 부탁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
“신서는. 신서가 있지 않느냐.”
벽력개가 힘겹게 입을 열어 물었다. 추궁 같아 보일 수도 있었기에 조심스러운 말투다.
자신은 친우가 떠난 것이지만, 눈앞의 공손무외는 아비가 떠난 것이었기에.
“지금 제 모습을 보십시오.”
공손무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제야 벽력개는 공손무외의 얼굴을 찬찬히 살필 수 있었다.
친우가 떠났다는 소식에 경황이 없어 조카나 다름없는 녀석의 얼굴도 제대로 살피지 않은 것이다.
공손무외의 얼굴을 확인한 벽력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열었구나. 열었어.”
한탄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벽력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그 얼굴은, 벽력개가 알고 있는 공손무외의 나이와는 맞지 않았다.
오히려 벽력개 자신의 친우라 해도 사람들이 믿을 정도로 늙어 있었다.
“네. 열었습니다. 전대 장로님 두 분과 함께 은밀히 열었지요. 아버님이 정신을 잃고 계실 때 허락도 받지 않고 제 독단으로 열었습니다. 해서 그 사실을 아는 이는 이제 곡에 저밖에 없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세 명이 함께 열었는데 아는 이가 하나라니.
“장로 두 사람은…….”
“천수가 얼마 남지 않은 분들이셨습니다…….”
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렇게 열었던 신서의 답은 불가(不可)였습니다.”
허망한 표정으로 말하는 공손무외.
자신의 수명에 다른 두 장로의 남은 천수를 대가로 열었건만, 돌아온 답이 불가라니.
“신서라 해서 전지(全知)는 아니었습니다. 만병통치도 아니었고요.”
무력한 말이었다.
이것이 공손무외가 공손우경의 주장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신서라고 만병통치가 아님을 그는 알았기에.
“골옹(骨癰)이라는 병증이었습니다. 뼈속에 옹(癰)이라는 독소가 자리해 뼈를 잡아 먹고, 다른 장기를 잡아먹어 이윽고 생을 다하게 하는 지독한 병증입니다. 그 옹을 제거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약도, 침도 그 어떠한 것으로도요.”
“…….”
벽력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침묵하고 있을 뿐.
공손무외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흘려보냈을까.
“대광이. 그 녀석은 어디에 있느냐?”
“모시겠습니다.”
벽력개의 물음에 공손무외는 그를 아버지의 위패를 모셔둔 사당으로 안내했다.
공손대광.
친구의 이름 넉 자가 새겨진 위패를 가만히 바라보는 벽력개.
“대광아. 대광아. 우리 중 가장 오래 살 것 같았던 네 놈마저 그리 떠나고 이제 나 혼자 남았구나…….”
공손무외는 뒤로 물러나 벽력개가 선친과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배려했다.
현 곡주가 지키고 있었기에 감히 근처로 오는 이가 없었다.
“천승이가 떠난 것이 나 때문이라 생각했다. 내 잘못이라 생각했어. 그 충격에 세상을 등지고 있었는데… 그 사이 네 놈마저 떠나고 나 혼자 남았구나… 내가 죄인이다. 죄인이야. 날 찾았을 텐데… 찾았을 텐데…….”
벽력개의 두 눈에서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으허허허엉!!!”
그는 울음을 참을 생각이 없는지,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공손무외는 그 모습에 기막을 펼쳐 그 소리가 퍼져나가지 않게 하였다.
***
“후우.”
운공을 마치고 단목운뢰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단전에 제법 내공이 모인 것이 느껴졌다.
맹룡대에 들어온 것이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처음 들어왔을 때를 생각하면 상전벽해와도 같은 변화였다.
이 모든 것이 한쪽 바위에 기대어 지루한 듯 하품을 하고 있는 교관, 하무백 덕이었다.
다음 수련은 검진이었다.
그 수련을 위해 가검을 가지고 병기대로 향하는데, 당진산이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하무백을 향해 돌아섰다.
하무백은 그 시선을 느꼈음인지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뭔데?”
귀찮은 듯한 물음.
“저희 동투제는 참가 안 하는 겁니까?”
당진산의 물음.
그제야 다른 생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잊고 있었다.
어느새 나뭇잎이 붉게 물들고, 가을이 완연한 날씨다.
가을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
곧 겨울이 올 터다.
그러면 교룡관에서는 동지(冬至)에 동투제(冬鬪祭)를 치르고 후반기가 끝난다.
하투제가 일 년 차 생도들만 대상으로 하는 조별 유격전 성격의 비무제였다면, 동투제는 교룡관 전 생도를 대상으로 하는 그야말로 진짜 비무였다.
생도들 개인 간 일대일 비무였기에 당진산이 물은 것이다.
맹룡대의 수련 과정은 여전히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번 산월마림에서의 실전 수련 역시 검진의 수련이지 않았던가.
“동투제는 개인 비무였지, 아마?”
하무백의 물음에 당진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흐음.”
잠시 턱을 쓰다듬는 하무백.
“나가고 싶은 거냐?”
이어지는 물음.
당진산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하무백의 시선이 다른 생도들을 향했다.
다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교룡관의 다른 생도들과 비교해서는 어떤지 확인하고 싶은 호승심의 발로였다.
“하투제처럼 동투제 역시 맹룡대는 별로 참가를 안 한다고 한다만…….”
이유는 뻔했다.
잠룡대나 와룡대에 비해 턱없이 약했으니까. 나가봐야 결과가 뻔한 것이다.
“흠. 음. 흠.”
생도들의 대답에 하무백은 계속해서 생각하는 듯하더니, 스스로 머리를 긁으며 일어났다.
“그럼 나가면 되지. 뭐, 어려울 거 있나.”
너무나 간단한 대답.
“그런데 계속 검진 수련만 해도 될까요?”
결국 당진산이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개인 비무인 동투제를 나가고 싶은데, 단체 수련인 검진 수련만 해서 되겠냐는.
하무백은 팔짱을 끼고는 생도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뭐, 개인 비무를 대비한 수련을 원하는 것 같은데… 그러자면 현 수준을 알아야겠지? 각자 일대일로 짝을 지어서 비무를 해봐.”
갑작스러운 주문이다.
다섯 명이니 한 명은 남을 터.
누구와 짝을 지을 것인지,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필 때.
“그보다 삼재검법과 삼재권법 만으로 괜찮은 겁니까?”
당진산이 연이어 물음을 던졌다.
불안한 것이다.
상대는 와룡대와 잠룡대의 생도들일 텐데, 그들이 익힌 무공을 고작 삼재검법과 삼재권법만으로 상대한다는 게.
그 물음에 다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생도들도 불안한 것이다.
삼재검법이 어떤 것인지 잘 알기에.
게다가 이번은 검진을 이루는 것도 아닌, 일대일 비무 아니던가.
하투제 때는 유격전이라는 상황상, 지형의 이점을 이용해 다대일의 전투로 유도할 수 있었지만, 동투제는 그런 것은 불가능했다.
“이거야, 원.”
하무백은 답답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칠 조 생도들이 현재 자신들의 실력에 대해 감을 못 잡아도 너무 못 잡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은 하무백이 수련용 가검을 뽑아 들었다.
“자, 봐라. 이렇게 내려 베고, 이렇게 옆으로 베고, 그리고 이렇게 찌르고. 이 세 가지 움직임 말고 뭐가 더 있지? 아 사선 베기 정도 있겠지만, 그것도 내려 베기랑 옆으로 베기가 되면 응용 가능한 움직임이지.”
직접 검을 휘두르며 보여주는 움직임.
간결하고 빨랐으며, 깔끔했다.
“그래도 와룡대나 잠룡대 생도들은 훨씬 변화가 많고 수준 높은 무공을…….”
당진산이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하무백이 그 말을 잘랐다.
“그러니까 그런 변화의 근본이 되는 움직임이 뭐냐고. 내가 방금 보여준 네 가지 움직임을 벗어나는 게 있나?”
“…….”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변화는 결국 기본에서 나오는 거고, 삼재검법은 그 기본이다. 기본에 완숙하면 그 변화의 맥을 파악하고 끊는 것도 할 수 있어.”
“그, 저 내공은…….”
단목운뢰가 조심스레 물었다.
내공을 익힌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그다.
그랬기에 단목운뢰는 늘 내공이 걱정이었고, 그 부분에 대한 열등감도 컸다.
그 기색은 연하민과 낙우진에게도 있었다.
“내가 파악한 바로는 이제 너희 셋 내공도 교룡관에서 중간은 갈 거다.”
하무백이 단목운뢰, 연하민, 낙우진 세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말에 세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잠룡대와 와룡대의 생도들은 나름 명문가와 명문정파에서 어릴 때부터 수련을 쌓아온 이들이다.
고작 일 년도 되지 않은 시간에 그런 이들과 비슷한 수준의 내공이라니.
믿기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그 좋은 약을 두 번이나 먹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하무백이 뭘 그리 놀라냐는 듯 말했다.
그 말에 다섯 생도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그들의 깊은 상처를 떠올리게 만든 약이다.
좋은 약이라기보다는 먹는 것이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약이었으니.
“아무리 그래도…….”
당진산이 여전히 자신 없는 모습으로 주저했다.
하무백은 진심으로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
“교룡관에서 산월마림의 혈강시를 상대해 본 녀석이 몇이나 있을까? 너희는 그걸 했다고. 이 답답이들아!”
마지막 말에는 짜증이 가득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