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래. 그래야지
하무백의 짜증 어린 외침에 다섯 명의 생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끔찍했던 산월마림을 떠올렸다.
사강시, 그리고 혈강시.
자신들이 교룡관을 수료하고 실제로 산월마림에 배치되면 상대해야 할 마물들.
일 년 차 생도들 중 그것들을 상대해 본 이가 있을까?
잠룡대, 와룡대의 이삼 년 차 생도들은?
단언컨대, 없을 것이다.
있다고 해도 한둘이나 될까?
비록 검진으로 상대했다 하나, 자신들은 그것들을 쓰러트리지 않았던가.
게다가 어딘지 모르게 약한 개체이긴 했지만, 연하민은 혼자서 혈강시 하나를 쓰러트렸었다.
교룡관으로 돌아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기 때문인가.
그 짧았지만 치열했던 나날들을 잊고 있었다.
다섯 생도의 두 눈에 서서히 총기가 돌아오고 있었다.
자신감 역시.
그런 변화를 알아본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이제야 좀 봐줄 만하네.”
하무백의 말에 당진산이 머쓱하게 웃었다.
“그, 아무래도 다른 명문정파의 제자들을 상대한다 생각하니, 그 녀석들 무공이 걸려서요. 시야가 좁아졌나 봅니다.”
변명과도 같은 말.
“너희들이 사강시를 상대한 검법도, 혈강시를 상대한 검법도 삼재검법이다. 제갈 교관의 방패술과 함께.”
하무백의 말에 다섯 생도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들도 명확히 깨달은 것이다.
자신들의 경험과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좋아. 그럼 이제 일대일 비무를 준비하긴 해야지. 평과 운뢰. 나와라.”
하무백의 지시에 두 사람은 연무장 가운데로 나가서 검을 맞대고 마주 섰다.
“그럼. 시작해!”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히기 시작했다.
***
벽력개가 선유곡에 도착한 지도 이틀이 흘렀다.
벽력개는 선유곡에 방문한 목적도 잊은 듯, 선유곡의 선대곡주인 공손대광의 위패 앞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배설의 욕구마저 내공을 사용해 억눌렀다.
퀭한 두 눈.
초점 없는 눈동자.
그것이 지금의 벽력개의 모습이었다.
두 시진 간격으로 공손무외가 잠시 들렀다가 벽력개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조용히 자리를 떴다.
그 덕에 이곳은 잠시지만 금지가 되었다.
공손무외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사흘째 되는 날, 늦은 밤.
“숙부님.”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한 공손무외의 입이 열렸다.
“…….”
벽력개는 아무 말이 없었다.
피로가 가득한 공손무외의 얼굴이다. 구음절맥의 치료가 벽에 막힌 탓이다. 그럼에도 걱정 어린 표정으로 벽력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선친의 지기지우인 벽력개다. 공손무외 자신에게도 친숙부 그 이상으로 대해주었던 숙부다.
그런 벽력개가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랬기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애초에 본곡을 찾으신 목적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선친의 귀천은 제가 말씀드린 후에나 아셨으니.”
움찔.
그 말에 벽력개가 반응을 보였다.
너무도 충격적인 소식에 그만 잊었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그래. 그랬지… 목적이 있어서 그 녀석을 찾아왔지. 헌데 그 녀석은 떠나고 없구만.”
씁쓸한 목소리다.
여전히 친우를 잃은 충격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선유곡을 찾는 이들은 많았다.
오늘도 곡문 앞에 사람들이 벌써 몇 명이나 찾아왔다.
남악 형산의 깊은 계곡까지 찾아오는 길은 험준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곳까지 찾아온다는 것은 그만큼 간절하다는 의미이고, 대부분이 가족의 병 때문이었다.
의원들이 치료할 수 없다고 포기한 병증을 앓고 있는 이들.
그런 이들이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고 험준한 길을 헤치고 찾아오는 것이다.
벽력개 역시 가까운 지인 중에 그런 사람이 있으니 이곳까지 선친을 찾은 것이다.
지난 전쟁에서 은거나 다름없이 사라졌던 그가 말이다.
게다가 자신에게 약재를 구해달라며 목록까지 전해주지 않았던가.
“이제 그만 하시려던 일을 하셔야지요.”
“그래. 그래야지.”
갈라진 목소리가 마치 쇠를 긁는 것 같았다.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로 벽력개가 돌아앉으며 말했다.
“약재를 좀 구하러 왔었지. 구하기 쉬운 것도 있지만, 귀한 것도 있다 하기에. 여기가 먼저 생각나더구나.”
벽력개의 말에 공손무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금 천하에서 가장 많은 약재를 가진 곳은 황궁이 아닌 선유곡이라는 말도 있었으니.
“이미 전해주신 목록의 약재를 모두 준비해 두었습니다.”
“고맙다. 역시 선유곡이구나.”
“헌데 여쭐 것이 있습니다.”
“나에게?”
벽력개의 물음에 공손무외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록의 약재를 준비하면서, 그는 기시감을 느꼈다. 묘하게 익숙한 약재들이었던 것이다.
왜 그럴까 고민하다가, 이유를 깨달은 그의 손이 부들거렸다.
“혹 환자가 절맥증을 앓고 있는 겁니까?”
공손무외의 물음에 벽력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선유곡의 곡주로구나. 약재만 보고도 병증을 알다니.”
“헌데 어찌 약재만 필요하신 겁니까? 환자를 데리고 오지 않으시고요.”
절맥증은 불치나 다름없는 난치의 병증이다.
현 강호에서 감히 절맥증을 치료할 수 있다고 호언할 의원은 없었다.
그것이 황궁의 어의라 할지라도.
전설 속에나 나오는 영약을 사용하면 치료할 수 있다는 풍문이 있으나, 증명된 바는 없었다.
공손무외가 알기로 백 년 내로 절맥증을 치료한 기록은 선유곡에서 오음절맥을 치료한 것이 전부다.
그랬기에 자신의 외손녀가 현재 곡에 와 있는 것 아니던가.
헌데, 환자를 데리고 오지 않고 약재만 데리고 오다니.
게다가 그 약재의 목록이 선유곡의 기록에 남아 있는 그것과 유사했다.
백 년 전 오음절맥을 치료할 때 사용했던 약재들 그것과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가 더 들 때까지 방도를 못 찾으면 데리러 오려 했다. 대광이도 흔쾌히 봐줄 아이이니.”
“누구이기에요?”
선친의 이름까지 나왔기에 환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천승이의 손녀다. 칠음절맥이라더구나…….”
“네? 단목 숙부의? 단목세가는 멸문당했던 것이…….”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공손무외가 깜짝 놀랐다.
천승이라는 이름.
그 역시 익히 알고 있었다.
단목세가의 마지막 가주 단목천승.
선유곡의 선대 곡주 공손대광.
개방의 전대 최고수 방호군.
이 세 사람은 죽마고우이자 지기지우였다.
공손대광이 어린 시절 잠시 단목세가에서 머무른 적이 있을 때 만들어진 인연이었다.
단목천승과 방호군은 공손무외에게는 혈육이나 다름없이 지낸 숙부들이었다.
“단목세가는 멸문당했지… 내가 멍청하고 못났던 탓에 말이다. 그래도 마지막에 겨우겨우 가서 천승이 녀석 마지막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핏줄을 무사히 데리고 나올 수 있었고.”
“그러시면 갑자기 사라지신 게…….”
“친우의 가문의 멸문을 막지 못한 죄인이 무슨 낯으로 강호를 활보하겠느냐… 마지막 남은 핏줄도 돌봐줘야 했고. 그마저도 제대로 돌보지는 못 했다만.”
회한으로 점철된 말에 공손무외는 가만히 있었다.
그 심정을 그로서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스러운 일이군요. 단목세가의 핏줄이 남아 있었다니…….”
한참 후에야 꺼낸 말이다.
“그래. 그 아이들마저 없었다면. 어쩌면 내가 대광이 놈보다 먼저 떠났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혈교 놈들에게 속은 것 때문에 단목세가가 멸문당한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이지 생의 의지가 고스란히 사라졌었다.
자신의 품에서 죽음을 맞이하던 친우, 단목천승이 자신의 며느리와 손자들을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그런데 큰일이군요. 칠음절맥이라니… 겨우 살아남은 귀한 핏줄인데.”
공손무외의 얼굴에는 깊은 근심이 서렸다.
단목천승의 자손이라면 자신에게도 절대 남이 아니었으니.
“절맥은 본곡에서도 치료가 쉽지 않습니다. 백 년 전에 오음절맥을 겨우 치료했을 뿐. 칠음절맥은…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제 외손녀가 구음절맥을 앓고 있는데도 그 치료를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애처롭기 그지없는 외손녀를 떠올린 탓이다.
“허. 선유곡에서도 말이더냐…….”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놀란 얼굴의 벽력개다.
“대광이 녀석이 살아 있었더라도 말이냐?”
“이런 말씀 드리기 송구합니다만… 제 의술은 이제 아버님의 그것에 버금간다고, 아니 그 이상이라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벽력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당히 아비를 뛰어넘었다 말하는 친우의 아들이 대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귀인(貴人)을 만난 것이로구나.”
“귀인이라니요?”
의구심이 든 목소리로 공손무외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칠음절맥은 그 진단조차 굉장히 어려운 병증이다. 평범한 의원은 그 원인조차 모른다.
그런데 벽력개는 칠음절맥이라 정확히 알고 약재를 구하러 왔다.
그 약재는 어떻던가.
오음절맥의 치료 약재와 유사했다. 일부 몇 종류는 달랐지만. 그랬기에 자신이 절맥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라 알 수 있지 않았던가.
거기에 환자는 데리고 오지 않고, 약재만 구하러 왔다. 상태가 더 나빠지면 환자를 데리고 오려 했었다고만 하고.
거기에 더해 귀인이라니.
벽력개가 한 말들을 찬찬히 복기해보니 이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설마 칠음절맥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겁니까?”
스스로 말을 하고도 믿을 수 없는지 공손무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으니.
설마 하는 심정으로 던진 물음이었는데.
벽력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공손무외는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저, 정말입니까?”
감히 사기꾼에게 속은 것은 아니냐 물을 수 없었다.
벽력개가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던가.
게다가 벽력개가 가지고 온 약재 목록.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다.
절맥증은 하나의 혈맥이 막히는 일음절맥부터 삼음, 오음, 칠음, 구음절맥이 있다.
막히는 혈맥의 숫자가 늘어날 수록 치료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한다.
그랬기에 구음절맥을 치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차에 칠음절맥을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선유곡도 오음절맥을 치료한 것이 전부이지 않던가.
“천운이 닿았다.”
“허…….”
벽력개의 대답에 공손무외는 한탄과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강호는 넓었고 기인이사는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았다.
선유곡이 의술에서는 강호 최고라 여겼건만, 자만이었다.
“그 귀인은 어느 분이십니까? 어려운 부탁입니다만, 감히 제가 가르침을 청해도 될까요?”
그 조심스러운 물음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그럴 수밖에.
그의 외손녀의 생명이 달린 문제였으니.
구음절맥의 치료 난이도는 칠음절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들보다 뛰어난 귀인이니 어쩌면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불러온 절박함이다.
“내가 감히 답을 할 수 없는 일이로구나.”
앞서 공손무외가 외손녀가 구음절맥을 앓고 있다 말했기에, 벽력개는 그의 심정을 충분히 알았다.
그럼에도 그가 가부를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허면, 그 귀인을 만날 수 있게만이라도 해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공손무외는 벽력개에게 무릎을 꿇으며 부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