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보인다
챙! 챙!
검과 검이 요란하게 부딪혔다.
비무는 백리평의 우세로 흘러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단목운뢰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것도 아니었다.
백리평은 단목운뢰를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간의 검진 수련으로 합을 맞춰온 덕에 서로를 잘 알고 있는 탓이다.
거기에 더해 장족의 발전을 한 단목운뢰의 실력까지.
서로 삼재검법으로 상대의 허점을 노리지만 번번이 막힌다.
다만 백리평이 더 능숙하고 경험이 많았기에 우세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하무백은 가만히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다가 외쳤다.
“천성검법을 사용해도 좋다!”
그 외침에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던 세 생도의 시선이 하무백을 향해 돌아갔다.
지금까지 검법은 오직 삼재검법만 사용하게 하던 교관 아니던가.
아니, 애초에 다섯 생도들 중 네 사람은 오직 삼재검법만 알고 있었다.
당진산의 편법을 익혔을 뿐, 검법은 익힌 것이 없었기에.
오직 백리평만이 다른 검법을 익히고 있었다.
지금 하무백이 그것을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한 것이다.
백리평의 두 눈이 반짝였다.
삼재검법을 익히면서 봉인해둔 사문의 절기, 천성검법.
봉인 이후에 직접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머릿속 심상에서의 수련은 계속해 왔다.
검의 움직임이 변했다.
지금까지 네 가지 검로만 보여주던 움직임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그러자 단목운뢰는 대번에 당황해서 검로가 어지러워졌다.
우세가 점차 압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검을 움직이는 백리평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몇 개월 만에 펼쳐보는 천성검법이다.
그간 오직 삼재검법만을 수련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심상수련을 했다고 하나, 직접 검을 움직인 것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의 퇴보를 각오했던 터다.
헌데 지금 사용해보니 결과는 전혀 달랐다.
진일보했다.
이전에는 미처 제대로 펼쳐내지 못하던 움직임이 지금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왔다.
마치 이전부터 익숙하게 사용해 왔다는 듯 말이다.
그 때문일까.
단목운뢰의 손발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그 모습에 하무백이 인상을 찡그렸다.
“집중해라! 운뢰! 내가 뭐라 그랬지!”
하무백의 외침이 단목운뢰의 귀를 찔러 들어갔다.
아무리 복잡한 변화를 보이는 검로라 하더라도 결국은 근본적인 움직임 네 가지로 구성된다던 가르침.
오늘 들었던 말 아니던가.
단목운뢰가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백리평이 펼치는 검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여전히 뒤로 밀리기에 급급했지만, 적어도 단목운뢰의 눈빛은 바뀌었다.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모른던 것에서, 상대방의 검의 변화를 분석하겠다는 의지.
점차 단목운뢰의 검이 안정을 찾아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백리평이 단목운뢰를 압도하고 있었다.
‘보인다!’
단목운뢰는 깜짝 놀랐다.
교관님의 말대로였다.
집중해서 관찰을 하고 있으니, 밤하늘의 별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천성검법의 절묘한 변화 속에서 검의 기본적인 네 가지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백리평의 검이 막 가로 베기에서 찌르기로 움직임의 변화를 보이려는 찰나.
단목운뢰의 검이 그 사이를 절묘하고 찌르고 들어갔다.
아래에서 위로 올려치기.
삼재검법에는 없는 움직임이다.
하무백이 말했던 기본적인 움직임도 아니었고.
그런데 단목운뢰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히 울리며 백리평의 검이 위로 튕겨 나가고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완벽한 무방비의 상태.
여기서 단목운뢰의 일격만 들어가면, 지금까지의 열세를 완벽히 뒤집고 승리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백리평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두 눈을 부릅뜨고 놀랐다.
그런데 놀란 것은 단목운뢰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행동이 만들어낸 결과에 깜짝 놀라서 이어서 공격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는 멍하니 백리평을 바라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만!”
그때 하무백의 외침이 들렸다.
두 사람은 검을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당진산이 얼떨떨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연하민과 낙우진 역시 비슷한 반응이었다.
이들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들 셋 역시 백리평의 천성검법이 보여주던 변화에 감탄하고 있었으니.
하무백은 그런 생도들의 반응에 혀를 찼다.
“쯧. 그저 넋 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군.”
하무백의 질책에 머쓱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세 생도다.
“운뢰. 넌 뭘 봤지?”
하무백이 단목운뢰를 향해 물었다.
“그, 그게… 가로 베기랑 찌르기로 구성된 검의 움직임이랄까, 베기에서 찌르기로 변화를 하려는 순간이랄까…….”
단목운뢰가 주저하며 말하자, 백리평이 두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당진산은 입을 쩍 벌렸다.
그게 보인다고?!?
그런 경악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다.
검법이 변화에서 변화로 이어지는 틈. 그것을 그리 쉽게 봤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것을 보는 이들을 고수라 부르는 것이었으니까.
단목운뢰가 무공에 입문한 지는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다. 절대 가능할 리가 없는 시기인 것이다.
하무백이 피식 웃으며 그런 생도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도 할 수 있는 거다. 뭘 그리 놀라.”
“네? 하지만 제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
당진산이 부정하려 하자 하무백이 그 말을 잘랐다.
“그거야 넋 놓고 구경했으니 그렇지. 운뢰처럼 필사적으로 변화를 분석하지 않고.”
뼈를 때리는 지적이었다.
“다른 사람의 비무라고 그저 구경만 하지 마라. 나라면 어찌할지 집중해서 보고, 분석해야지.”
이젠 뼈를 때리다 못해 잘근잘근 부수는 말이다.
“백리평.”
“네.”
하무백의 부름에 백리평은 침울한 목소리도 답했다. 자신의 수준이 고작 그 정도였나 하는 자괴감 때문이다.
“천성검법을 펼쳐보니 어땠지?”
“그게…….”
자신이 느꼈던 그 성취를 백리평은 솔직히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럴 수밖에.
단목운뢰에게 너무도 손쉽게 파훼 당하지 않았던가.
“잘했다. 훌륭했어.”
백리평이 차마 대답을 못 하고 있자 하무백이 먼저 말했다.
그 내용은 칭찬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백리평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검의 변화나 움직임이 훨씬 매끄럽고 자연스러워졌다. 본인도 느꼈지?”
그 물음에 백리평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만큼 열심히 수련을 한 결과다. 삼재검법의 움직임은 결국 검의 가장 기본적인 움직임. 기본이 튼튼해진 만큼 검의 움직임이 좋아진 거야.”
“아!”
칠 조 생도들은 작은 탄성을 흘렸다.
“어때? 이래도 잠룡대나 와룡대 생도들을 상대하는 것이 걱정되나?”
“아닙니다!!!”
하무백의 물음에 다섯 사람은 동시에 답했다.
두 사람의 비무로 하무백은 칠 조 생도들에게 그간의 성과와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었다.
***
벽력개는 난감한 얼굴로 그런 공손무외를 바라보았다.
“후우. 마음 같아서는 그리해주고 싶다만, 귀인이 달리 귀인이시겠느냐. 혹여라도 언짢아하실까 그것이 저어되는구나.”
벽력개의 말에도 공손무외는 그저 무릎을 꿇고 있을 뿐이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벽력개.
“후우.”
결국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네 외손녀면 대광이 녀석의 증손녀고 그 말은 나에게도 증손녀라는 소리다. 내가 귀인께 말은 꺼내 볼 테니 함께 가자꾸나.”
“감사합니다.”
공손무외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약재는 모두 넉넉하게 챙겼습니다. 숙부님께서도 좀 쉬십시오.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다시 무창으로 가려면 말이다.”
벽력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손무외는 그런 벽력개를 거처로 안내했다.
푹신한 침상에 몸을 누이는 벽력개를 확인한 후, 공손무외는 바쁘게 움직였다.
챙겨야 할 일이 적지 않았다.
곡주가 곡을 비우는 일 아니던가. 공손무외는 정말 많은 일을 정리했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벽력개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다. 그 정도 되는 고수라면 사실 기력을 회복할 것도 없었다.
다만 친우를 잃은 마음의 상처가 그의 기력을 쇠하게 했기에, 내공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서야, 기력이 회복된 것이다.
“아버님… 정녕 가시려는 겁니까?”
공손우경이 불신 가득한 눈으로 채비를 마친 공손무외를 바라보았다.
“길이 있을지도 모르니 가봐야지.”
“칠음절맥이라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공손우경의 말에 공손무외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숙부님의 말씀이다. 허언일 리 없는 일이지.”
“하지만…….”
공손무외의 단호한 말에도 공손우경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 그 아이를 치료하기 위한 방도를 찾는 일이다. 네가 그토록 바라는 일이지 않더냐.”
“그래도, 아버님께서 곡을 비우신다니…….”
“내가 없어도 네가 충분히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다. 그 아이의 치료 역시 마찬가지.”
이틀 내내 비슷한 대화를 나누었다.
가려는 공손무외와 그런 아버지를 말리려 하는 공손우경.
공손우경으로서는 절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보증을 한 이가 벽력개라는 전대 무림명숙이었기에, 차마 강하게 이야기하지 못할 뿐.
그가 생각하기에 칠음절맥을 치료했다는 이는 사기꾼일 뿐이었으니.
너무도 완고한 아버지의 모습에 공손우경은 더 이상 말릴 수 없음을 인정했다.
“아버님. 정 그러시면 연아를 데려가십시오.”
“응?”
“옆에서 수발을 들 이는 데려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손우경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뒤에 서 있던 한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는 그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공손비연.
공손우경의 장녀로 무림오화의 중 한 사람이었다.
세인들에게는 선국화(仙菊花)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 모습을 실제로 본 이는 손가락에 꼽는다는 미인이었다.
“다른 이들도 많은데, 굳이 연아를?”
“아버님의 말씀대로면 중차대한 일입니다. 그런 만큼 아무나 데려가실 수는 없지요.”
이미 전날 밤, 이럴 경우는 대비해 준비해둔 터였다.
딸 아이에게도 충분한 언질을 주었고.
무엇보다 딸 아이가 가진 능력이 있기에, 수발을 핑계로 함께 보내는 것이다.
의술과 술법의 문파, 선유곡.
공손비연은 의술과 술법 모두에서 빼어난 실력을 가진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중 다른 이들은 도무지 익히지 못한 술법을 하나 익혔고, 그 사실은 공손비연과 공손우경만 알고 있었다.
공손무외에게도 아직 알리지 않은 것이다.
그 이유는 공손비연이 그 술법을 완성한 것이 불과 열흘 전이라는 것도 있었다.
선유곡의 모든 역량이 구음절맥의 치료에 집중된 데다가, 벽력개의 갑작스러운 방문 등, 미처 알릴 틈이 없었던 것이다.
공손우경은 아버지로부터 칠음절맥을 치료했다는 귀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공손비연의 새로운 술법을 당분간은 숨겨야겠다 마음 먹었다.
그녀로 하여금 그 귀인을 직접 확인케 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럼 이만 출발하도록 하지. 빠를수록 좋으니.”
벽력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들이 투레질했다.
험한 산길이나.
우마차가 갈 수 없는 길이었기에, 다섯 필의 말에 약재를 잔뜩 실었다.
오랜 시간 짐을 싣고 이 험준한 산길을 오갔던 말들이었기에, 운반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리라.
“알겠습니다. 숙부님. 이만 출발하도록 하지요. 비연아. 너도 어서 가자.”
그녀가 이미 여정을 꾸리고 나온 것을 알아보았다.
아들이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 이상 실랑이하지 않고 데려가기로 한 것이다.
“네. 할아버님.”
공손비연은 다소곳이 대답을 하고는 공손무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