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94화 (94/312)

94화. 은인이시다

연무장 한쪽.

넓은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 아래 너른 바위.

분명 예전에는 없던 바위다.

어느 날인가부터 갑자기 생긴 바위로 지금은 하무백의 전용 좌석이었다.

지금 하무백은 그 바위에서 마치 와불이라도 된 것처럼 팔을 베고 옆으로 누워있었다.

입에서는 연신 하품이 나온다.

오늘의 수련이 시작된 지 채 반 각도 되지 않은 때인데.

“하암.”

이번에도 크게 소리를 내며 쩍 벌어지는 입.

다시 한번 하품이 나왔다.

“아우. 오늘은 그냥 그만하자. 외출일인데.”

귀찮음이 가득한 목소리.

하무백의 말에 칠 조 생도 다섯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벌써요?”

당진산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뭐, 더 하고 싶으면 자율학습 하던가.”

그리고는 몸을 일으키는 하무백은 털레털레 연무장을 벗어났다.

네 명의 생도는 그 모습을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다만 한 사람, 단목운뢰는 달랐다.

평소와 다르게 웃음 띤 얼굴로 자리를 정리했다.

“응? 운뢰. 가려고?”

당진산이 그 모습에 의외라는 듯 물었다. 늘 마지막까지 수련을 하는 수련 중독자가 그였으니.

“아, 응. 집에 좀 빨리 가봐야 할 것 같아서.”

단목운뢰는 그리 답을 하고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당진산은 별일이라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도 이만.”

그때 연하민이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에 남은 이들은 이제 셋.

“어떻게 할 거야?”

당진산이 낙우진과 백리평을 보며 물었다.

“난 아직 부족한 게 많아.”

일전 단목운뢰와의 비무를 떠올리며 백리평은 검을 휘둘렀다.

낙우진 역시.

“에효. 외출일이면 뭐하냐. 할 일도 없이 수련만 하는데.”

당진산은 한숨을 내쉬고는 검을 들었다.

외출일.

오전의 일과를 마친 후 외출하여 하루를 보내고 올 수 있는 날이다.

해서 휴식일이라고 하기도 한다.

단목운뢰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지난번에 교관님이 혜아에 대해 언질을 준 이후로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다.

하무백이 치료할 수 있을 거라고 원인을 알고 있다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제는 혜아가 밤에 아파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연무장에 도착해서도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는데, 교관님이 수련을 끝냈다.

단목운뢰는 빠르게 움직여 어느새 교룡관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움직이는데, 곁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응?”

고개를 돌리니.

면사를 한 연하민이 함께 걷고 있었다.

“우악!”

상상도 못 한 모습에 깜짝 놀란 단목운뢰가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연하민이 짧게 말하자 이내 단목운뢰는 진정하려 애썼다.

“어, 어디를 가는 거야?”

연하민이 자신의 곁에서 걷고 있는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단목운뢰가 조심스레 물었다.

“교관님의 도움을 받았지?”

돌아온 것은 대답 대신 물음이었다.

단목운뢰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운혜가 어떤지 나도 궁금해서…….”

이어진 말의 의미를 단목운뢰는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그러길 잠시.

“응? 운혜? 그러니까 우리 집에?”

단목운뢰는 뒤늦게 깨달은 사실을 여과 없이 입 밖으로 내보냈다.

연하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없이 걸었다.

그 모습에 단목운뢰는 더 이상 무어라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저 단목운뢰의 집을 향해 나란히 걸었다.

빈민가로 접어들자 단목운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연하민의 물음.

“그… 어르신 한 분이 안 보이셔서.”

그 말에 연하민은 지난번의 방문에서 보았던 거지 노인을 떠올렸다.

이내 그녀도 주변을 살폈다.

“그러네.”

그러나 찾을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아시려나.”

단목운뢰는 보이지 않는 노인의 안부가 걱정인 듯 중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연하민은 묵묵히 그 속도에 보조를 맞춰 걸었다.

“어머니! 운혜야!”

집에 도착하자마자 급한 마음에 단목운뢰는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갔다.

“오빠!”

집 안쪽에서 단목운혜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가 들어도 활기찬 기색이 역력했다.

금세 모습을 드러낸 단목운혜가 단목운뢰의 품에 폭 안겼다.

연하민은 그런 모습을 살풋 미소 지으며 바라보았다.

“앗! 예쁜 언니!”

단목운혜는 그런 그녀를 발견하고는 단목운뢰의 품에서 나와서는 순식간에 연하민의 품에 안겼다.

단목운뢰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몸이 정말 좋아졌구나.”

사실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이랴. 저리 건강해진 동생의 모습인데.

“운뢰 왔구나. 아직 올 시간이 아니라 여겼다만.”

어머니가 안방에서 나오셨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연하민이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운뢰의 동료분도 함께 오셨네요. 누추하지만 어서 오세요.”

어머니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운혜의 건강이 좋아진 만큼, 어머니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도 사라졌다.

“어머니 어떻게 된 거예요?”

단목운뢰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대체 어떤 기적이 일어났기에, 병약하고 고통에 괴로워하던 운혜가 저리도 밝아졌던 말인가.

“은인을 만났지. 큰 은인을.”

어머니가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 교관님께서…….”

하무백에게 들었던 말이 있었기에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단목운뢰.

“그래. 내가 은인을 모시고 왔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목운뢰와 연하민의 고개가 자연히 뒤로 돌아갔다.

“교관님…….”

하무백이 낯익은 노인과 함께 있었다.

“위 어르신?”

연하민은 위지군을 알아보았다. 유독 칠 조와 이십 조 연무장 근처 정리에 열과 성을 다하는 일꾼이지 않던가.

스스로를 위 노인이라 부르라 하지만, 칠 조 생도들은 꼬박꼬박 어르신이라 호칭했다.

“은인이시다.”

어머니가 위 노인을 그리 소개했다.

그 말에 단목운뢰와 연하민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으니까.

“집에 빨리 갈 줄은 알았다만, 벌써 와 있을 줄은 몰랐네.”

하무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교관님. 이게 대체…….”

“내 사부님이시다.”

간단한 소개.

그러나 그 내용은 간단치 않았다.

두 사람은 이제 얼이 빠져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허허. 운혜는 어서 들어가자. 오늘도 치료를 받아야지.”

“네. 할아버지.”

어느새 위지군과 제법 친해진 단목운혜였다.

“여기서 기다려라.”

하무백과 위지군이 단목운혜를 치료하러 들어갔다.

한참 후.

단목운혜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대견하구나.”

위지군이 그런 단목운혜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린 몸으로 버티기 쉽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하무백 역시 동감하는 표정이었다.

“이제 슬슬 약재를 쓰면 좋을 것 같다만.”

“떠난 지 열흘 정도 되었으니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습니다.”

하무백이 날짜를 셈한 후 말했다.

단목운혜에게 이불을 덮어준 후 두 사람은 안방을 나왔다.

그곳에는 궁금한 것이 잔뜩 있는 듯한 단목운뢰가 있었다.

어머니에게 저간의 사정을 들었을 텐데도 저런 얼굴이라니.

“더 궁금한 게 있나?”

“혜아는 건강해지는 거죠?”

이미 몇 번을 들었음에도 확인하고 싶은 게다.

“물론이다.”

하무백이 간결하게 답했다.

그러나 단목운뢰의 시선은 위지군에게로 향했다. 실질적으로 치료를 하고 있는 이는 위지군임을 들은 탓이다.

“걱정 말거라. 잘 치료될 터이니.”

인자한 웃음을 띤 위지군의 대답에 단목운뢰는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연하민은 작은 웃음을 띤 채 바라보고 있었다.

“응?”

그때 하무백이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왔나 보구나.”

위지군 역시 알아차렸다.

“그런데 혹을 좀 달고 왔군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아니다. 나도 이제 들어가 봐야지.”

위지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목운뢰와 연하민은 폭풍이 몰아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머니는 그런 두 사람을 이해한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제 곧 점심때인데, 식사를 함께 하는 게 어떠세요?”

어머니의 물음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연하민.

“아, 네. 감사합니다.”

연하민의 대답에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어머니는 주방으로 향했다.

오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집안 가득 퍼졌다.

요 며칠 사이 집안 사정에 여러모로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단목운뢰였다.

***

형산을 벗어난 뒤로 정말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렸다.

그 결과가 현재의 꾀죄죄한 모습이다.

벽력개는 말할 것도 없고 공손무외와 공손비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재를 짊어진 말들 역시 잔뜩 지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일행이 무창에 들어오고 나서 오래지 않아 하무백을 맞닥뜨렸다.

그들이 이리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

벽력개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하무백에 대한 미안함도 있었다.

“약재는 충분히 구해오셨군요.”

하무백의 시선이 다섯 필의 말등으로 향했다. 그리고 옆으로 움직여 함께 있는 두 사람에게 도달했다.

“그리고 예정에 없던 이들도 함께 왔구요.”

공손우경이나 선유곡의 명숙이 함께 있었다면 대번에 발작했을 듯한 태도요 말투였다.

그러나 공손무외는 침착했다. 공손비연은 그저 그런 공손무외 곁에 조용히 있을 뿐이다.

“사연이 좀 길다네.”

벽력개가 머쓱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걸 굳이 제가 알아야 할까요.”

하무백의 차가운 말.

그 말에 벽력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손무외의 얼굴에도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공손비연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선유곡의 곡주인 할아버지가 이런 대접을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에.

“그래도 한 번 들어보기는 해야 할 거 같군요. 저 정도의 약재를 받아 오셨는데.”

하무백의 시선이 다시금 말 다섯 필이 짊어지고 있는 약재로 향했다.

적지 않은 양이었다. 아니 엄청난 양이었다.

약재 목록은 하무백 역시 봤기에 어느 정도 양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사부님이 필요하다 한 정도라면 말 한 필이면 충분할 터였다.

그런데 저만큼이나 가져왔으니, 그 성의를 봐서라도 이야기를 한 번은 들어줄 수 있을 듯했다.

하무백의 말에 벽력개의 표정이 풀렸다.

“이리로 가시죠.”

하무백이 앞장섰다.

그렇게 간 곳은 하무백이 즐겨 찾는 허름한 주점.

대낮이었기에 텅텅 비어 있었다.

아니, 이곳은 올 때마다 늘 이렇게 비어 있었다.

망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

주인 영감은 거지가 들어왔음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하무백의 주문대로 술과 안주거리를 내오고는 사라졌다.

하무백의 시선이 공손무외에게로 향했다.

“선유곡의 곡주인 공손무외라 하네.”

그 말에 하무백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선유곡의 인물일 거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곡주인 줄은 몰랐다.

“공손비연이라 합니다.”

그녀의 소개에 하무백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정체는 짐작을 했었다. 무림오화에 대한 소문은 하무백도 대강은 들었으니.

선유곡의 선국화, 공손비연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무백이라 합니다.”

하무백이 짧게 말했다.

간단한 소개였지만, 그 여파는 작지 않았다.

벽력개가 이곳으로 오는 내내, 귀인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에 공손무외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온 것이다.

“호천단주…….”

공손무외가 작게 읊조렸다.

“지금은 그저 교룡관의 교관입니다. 해서 어쩐 일로 이리 찾아오셨습니까?”

“기실 내가 찾은 이가 하 단주인 것을 나는 지금 처음 알았네.”

그렇게 공손무외는 이곳까지 찾아온 사정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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