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우리 사부님 말씀이야
“구음절맥이라…….”
이야기를 모두 들은 하무백이 중얼거렸다.
공손무외는 그런 하무백을 긴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왔다.
선유곡의 곡주였기에, 하무백에 대한 진실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더 없이 조심스러웠다.
선유곡은 그야말로 정도무림 의술의 최고봉에 있는 문파였다.
그랬기에 신진팔문에 속했으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적대하지 않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선유곡에는 우호적이었다. 언제 선유곡의 신세를 지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리고 그런 존중은 하무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난 전쟁에서 선유곡에서 지원 나온 의원들에게 수하들이 신세를 많이 졌으니.
“선유곡의 일이라 하니 도울 수 있으면 돕겠습니다.”
하무백의 대답에 공손무외의 얼굴이 환해졌다.
“지난 전쟁에서 진 빚이 적지 않으니까요.”
이어진 하무백의 말에 공손무외는 담담한 신색으로 말했다.
“그건 응당 해야 할 일이었다네.”
천하제일의문(天下第一醫門)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다만 그런 그들도 구음절맥에는 막혀 있었다.
“다만, 칠음절맥을 치료할 수 있는 이는 제가 아닙니다. 저도 지금 배우는 중입니다.”
하무백의 말에 공손무외의 얼굴 근육이 순간 멈췄다.
당연히 하무백일 거라 생각한 탓이다.
조금만 생각했으면 아닐 거라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건만.
“제 사부님이십니다. 일단 사부님께 여쭤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하니 별수 없었다.
일단 거처를 정하고 기다릴 수밖에.
그렇게 허름한 주점에서의 대화는 끝이 났다.
하무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벽력개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거참. 난 고민에 고민 끝에 데리고 온 거네만. 이리 쉽게 승낙할 줄 몰랐군.”
“목숨의 빚은 무겁습니다. 비록 제 목숨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하무백은 그리 말하고 주점을 벗어났다.
덩그러니 남은 세 사람.
“선유곡이 덕을 많이 쌓았어.”
벽력개의 칭찬에 공손무외와 공손비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자부심이었다.
“아닙니다. 숙부님.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저 괴팍하고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친구가 너를 대하는 태도만 보아도 알 수 있지.”
“네?”
공손무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저 친구에 대해 들은 것이 아무것도 없느냐?”
“지난 전쟁에서 대활약 한 영웅이고, 본신의 실력이 가히 맹주에 버금간다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만.”
공손무외의 말에 공손비연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는 공손무외와 달리 하무백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 덕이다.
“쯧. 첩첩산중에 들어앉아서 세상 돌아가는 것은 나보다 더 모르는구나.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이 정파 무림을 어떻게 뒤집어 놓았는데…….”
“곡 외부의 일은 장로나 호법들과 우경이에게 맡겨 놓는 편이다 보니. 송구스럽습니다.”
“어르신. 어떤 일이 있었는데요?”
공손비연이 흥미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관심을 보이는 이가 있으니, 흥이 동한 것일까?
벽력개는 술 한잔 들이키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냈다.
공손비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그게 진실로 가능한 일입니까?”
공손무외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가능하고 불가능하고를 떠나서, 이미 일어난 일이다.”
“허어…….”
공손무외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뿐이다.
“수틀리면, 정천맹 장로도 세가의 가주도 안중에 없는 놈이다. 그런 놈이 선유곡만은 저리 존중을 하는 게야. 저런 놈일수록 은과 원이 확실하지. 다행히 선유곡은 저놈에게 은을 많이 쌓아둔 모양이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앞으로도 저놈과 잘 풀어나가 보거라. 내가 괜히 재미있으라고 저놈 이야기를 이리 길게 한 게 아니야.”
“알겠습니다.”
벽력개의 당부에 공손무외는 무겁게 대답했다.
“알겠지?”
벽력개의 시선이 공손비연에게로 향했다.
“네.”
공손비연은 다소곳한 자세로 답했다.
그런 그녀의 두 눈 깊은 곳에는 흥미가 조용히 자리했다.
***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외출일이자 휴식일의 첫날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백리평은 연무장에 남아 있었다.
당진산도 낙우진도 조금 전에 숙소로 돌아갔다.
오직 그만이 마지막까지 남아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지난번의 단목운뢰와의 비무에서 그가 보여줬던 모습.
그 모습이 계속해서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탓이다.
“휘유. 정말 열심히 하는걸?”
그때 감탄의 말이 백리평의 귀에 들렸다.
검을 내리고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백리평.
주우명이었다.
“그거 알아? 이 부근 연무장에서 혼자 남은 생도라는 거?”
지난 산월마림으로의 훈련 이후 많이 친해진 칠 조와 이십 조의 생도였다.
이십 조의 생도라고 해봐야 주우명과 하설란이 전부였지만.
“그렇게 됐나?”
“그렇게 쫓기듯 검을 휘두르면 아니 휘두르니만 못하다.”
갑자기 튀어나온 주우명의 말에 백리평의 눈썹이 꿈틀했다.
“우리 사부님 말씀이야.”
이어진 주우명의 설명에 백리평은 막 떨어지려던 입술을 다시 닫았다.
“내가 교룡관에 오기 며칠 전, 혼자 수련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사부님께서 해주신 말씀이지.”
그 말에 백리평의 두 눈에 의문이 어렸다.
무당산에 있던 그가 쫓기듯 검을 휘두를 일이 무엇이 있다고.
“그때 너희들 이야기를 들었거든. 하투제라는 비무대회에서 남궁지후를 꺾은 맹룡대의 생도들. 나도 모르게 조급함이 든 거지. 과연 어떤 녀석들인지 말이야.”
주우명이 피식 웃었다.
“지금 너를 보니 그때의 내가 보이는 거 같아서.”
“아…….”
백리평은 낮은 탄성을 흘렸다.
“그때 난 교룡관에 올 때까지 검을 못 잡았어. 사부님이 그리하라 하셔서.”
주우명은 그 말을 남기고는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백리평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의 대화를 곱씹었다.
잠시 검을 들어 바라보다가, 검집에 넣었다.
그 후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하무백이 먼발치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쯧.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군.”
연무장에서 계속해서 느껴지는 백리평의 기척에 막 다시 온 참이었다.
그런데 주우명이 백리평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고 떠났다.
과연 저 녀석은 그 조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흘흘. 어리게만 보았는데 잘 크고들 있구나. 서로 모자란 부분을 챙겨줄 줄도 알고.”
“그러게 말입니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위지군. 그 역시 조금 전의 일을 모두 본 것이다.
“그래, 왜 온 것이라더냐?”
낮의 일을 물었다.
하무백은 담담히 선유곡에서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했다.
“흐음. 구음절맥이라…….”
잠시 고민하는 위지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의원은 아니다. 다만 란아를 어떻게든 치료하려다 보니, 절맥에 대해 잘 알게 된 게지.”
사문의 기록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선천적으로 기맥이 약했던 제자들의 수련법이나, 치료법에 대한 기록도 있었으니.
“선유곡에서 방법이 없었는데, 과연 내가 찾은 치료법이 효과가 있을까?”
이미 치료한 경험이 있는 칠음절맥에는 자신을 보였으나, 구음절맥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위지군이었다.
“사부님께서 적어주신 약재 목록을 보고 이곳까지 찾아온 이들입니다. 무언가 단초를 본 것이겠지요. 저도 아직은 사부님께 배우는 입장인지라 아무런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하무백의 대답에 위지군은 지그시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짙은 노을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래. 구음절맥도 결국은 절맥증. 한 번 보도록 하자. 네가 목숨 빚까지 졌다고 하는데. 제자의 빚은 곧 사부의 빚인 게다.”
“감사합니다.”
하무백은 웃었다.
지난 전쟁에서 선유곡에 진 빚이 적지 않았다.
특히,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담무흔은 그야말로 사경에서 살아났다.
선유곡의 치료 덕분에.
해서 하무백은 목숨의 빚이라 한 것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했다고, 가보자꾸나.”
그렇게 두 사람은 공손무외와 공손비연이 거처로 정한 객잔으로 향했다.
어느 객잔인지 미처 알릴 틈도 없었지만, 하무백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기척을 읽었기에.
막 객잔 1층에 도착하니 저녁 식사 무렵이었다.
왁자지껄 소란스러워야 할 객잔이 조용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
하무백이 들어서고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공손비연이 면사를 살짝살짝 들추며 식사를 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 찰나의 순간을 집중해서 보겠다는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고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조용할 수밖에.
심지어 점소이 마저 그러고 있으니.
하무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아름다운 미모는 그 자체로 때로는 이렇게 민폐가 되기도 했다.
하무백을 먼저 발견한 이는 공손무외였다. 그는 하무백의 뒤에 따라오는 노인을 발견하고는 그가 귀인임을 직감했다.
“어서 오게나. 이리 빨리 와주다니, 고맙네. 귀인을 뵙습니다.”
공손무외가 위지군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 포권을 취했다.
그 모습에 공손비연 역시 젓가락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여기저기서 안타까움이 가득한 작은 탄성과 한숨들이 흘러나왔다.
“객실은 정하셨습니까?”
“정했다네. 이 녀석이 1층에서 식사를 하자고 보채서 내려왔더니, 이런 꼴이구만.”
하무백의 물음에 공손무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산속에만 있던 녀석이라 그런 겐지. 쯧.”
객잔에 모여든 사람들의 시선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하는 공손무외.
하무백은 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되었다.
그 와중에 공손비연은 면사 아래로 작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면 객실로 가셔서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아무래도 그래야겠네. 귀인께서 어려운 걸음 하셨는데, 못난 모습을 보여 죄송합니다.”
공손무외가 위지군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허허. 영손께서 워낙 빼어나셔 그런 일이니 괘념치 마시지요.”
위지군이 웃으며 답했다.
공손무외가 앞장서 객잔 위층의 객실로 향했다. 선유곡의 곡주답게, 객잔의 최상층의 가장 좋은 객실이었다.
“별채가 있는 객잔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근처에서는 찾지를 못했네.”
별채가 가장 좋은 선택이긴 했으나, 교룡관 근처의 객잔 중 별채가 빈 곳이 없었던 모양이다.
“위지군이라 합니다. 이 녀석의 사부이기도 하지요.”
위지군의 소개에 공손무외도 마주 허리를 숙이며 다시 인사를 나누었다.
“마음이 급하실 터인데,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와드리지요. 제자가 큰 빚을 졌다 하니, 사부 된 도리로 도와 드려야지요.”
자리에 앉자마자 나온 허락의 말에 공손무외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귀인.”
“허허. 귀인이라는 호칭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곡주.”
“귀인께서 불편하다 하시니… 그러면 위지 대인이라 칭하겠습니다.”
예를 다한 말에 위지군은 더 이상 거절의 말을 하지 못했다.
“한 가지 아셔야 합니다. 저는 의원이 아닙니다. 그저 무인이지요. 다만, 제자가 칠음절맥이었기에, 제자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찾다가 절맥을 치료하게 된 겁니다. 구음절맥은 저도 방법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칠음절맥을 치료하신 그 방법이라도요.”
“현재 제가 돌보고 있는 칠음절맥의 아이가 있습니다. 해서 제가 귀곡으로 가기는 어려울 듯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위지군의 말에 공손무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서를 보내도록 하지요. 몸이 약한 아이이니, 이곳까지 오는 데 시일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