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큰 빚을 졌지
선유곡주가 무창에 도착하고 나서 열흘이 지났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수련하고 밥을 먹고 밤에 잠을 잔다.
다만 단목운뢰의 표정이 좀 밝아졌다는 것이 다른 점이랄까.
그렇게 따진다면 백리평에게도 변화가 생기긴 했다.
표정이 더 진지해졌지만 그런 표정 한 편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하무백은 그런 생도들의 모습을 만족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변화는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다른 세 생도 역시 수련에 더욱 집중하고 있었으니.
순수한 비무대회인 동투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도들은 조금씩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 단목운뢰가 보여준 모습이 계기였다.
“크윽. 어때, 봤어?”
당진산이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봤지. 완벽히 실패였어.”
낙우진이 담담하게 답해줬다.
“아냐, 아냐. 분명 나도 변화의 틈을 찾아서…….”
당진산이 다시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다들 각자의 수련에 열중할 뿐.
하무백은 그 한 명 한 명의 수련을 세세히 살폈다.
‘제법. 능숙해지고들 있군.’
그중 발군은 단목운뢰와 백리평이었다. 그리고 연하민 역시 뒤처지지 않았다.
이 세 명의 재능은 하무백 역시 진작에 알아보았다.
단순히 재능만 놓고 본다면, 단목운뢰와 연하민 이 두 사람이 단연 교룡관 전체에서도 능히 수위를 다툴만했다.
남궁지후, 남궁지유 남매를 뛰어넘는 재능이다.
다만 무공의 입문이 늦었다는 약점이 있을 뿐.
단목운뢰가 먼저 그 약점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였고, 곧이어 연하민 역시 그런 모습을 보였다.
이제 무공에 입문한 지 일 년도 안 된 녀석들이 말이다.
백리평은 거기에 자극을 받은 것인지 하무백이 생각한 수준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선순환이었다.
이렇게 세 사람이 앞에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니, 당진산과 낙우진이 그 뒤를 따랐다.
이제 다섯 생도는 자신들이 익힌 무공에 대한 의문은 가지지 않았다.
그저 더욱 갈고 닦을 뿐.
“이야. 뜨겁네요.”
언제 온 것일까? 한설빙이 감탄하는 얼굴로 비스듬히 누워 있는 하무백의 곁에서 중얼거렸다.
“너네 조는?”
“쉬는 시간이요. 여기는 쉬는 시간도 없어요?”
“지들이 알아서 수련하고 알아서 쉬는 거지, 뭐.”
“무슨 교관이 이렇게 무책임해요?”
그 물음에 하무백은 피식 웃었다.
“나야 원래 그런걸.”
하무백의 대답에 한설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것보다 요즘 딴 일로 바쁘셔서 애들한테 소홀한 건 아니시고요?”
“응?”
“설란이가 걱정이 많더라고요. 요즘 오라버니가 신경 쓰는 일이 많은 거 같다고.”
갑자기 왜 찾아왔나 했더니.
설란 때문이었다.
“생도들을 끔찍이도 생각하는구나. 뭐, 그 생도의 보호자 되는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다만.”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한설빙이 다시 물었다.
“나도 내 생도 챙기느라 그런 거지, 뭐. 그리고 옛 부하들이 진 빚도 좀 갚아야 하고.”
하무백의 대답에 한설빙이 인상을 찌푸렸다.
옛 부하들이 진 빚이라는 부분 때문이다.
하무백의 옛 부하 중 하나가 바로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저희가 빚을 진 적이 있던가요? 전장에서 피 터지게 싸운 기억밖에 없는데…….”
“큰 빚을 졌지. 무흔이 녀석은 목숨을… 너도 적지 않은 빚을 졌던 거 같은데. 그 덕에 여기 이렇게 멀쩡하게 있는 거고.”
하무백의 대답에 한설빙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선유곡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하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수련에 한창인 생도들에게 두었을 뿐.
“무슨 일인 거죠? 그런 일이라면, 저도…….”
“아서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래도…….”
“네가 못 하는 일이라 그런다. 네 도움이 필요하면 내가 먼저 말할 거야.”
하무백의 단호한 말에 한설빙은 입을 다물었다. 하무백이 저런 모습이면, 어떤 말도 소용없음을 알고 있었던 탓이다.
“음… 왔나 보군.”
하무백의 시선이 동쪽 먼 곳으로 향했다.
무창에 새로이 진입하는 이들의 기척을 느낀 것이다.
그중에 익숙하면서 미묘하게 다른 기척이 있었다.
절맥증을 앓고 있는 이의 기척.
그랬기에 선유곡의 손님들이 도착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필요하면 말씀해주세요.”
하무백의 괴물같은 기감에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은 한설빙이 말했다.
“물론.”
그 말을 하면서 하무백이 몸을 일으켰다.
“운뢰. 좀 더 상대의 검로에 집중해라. 지난번 그걸 요행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평. 네 검에 좀 더 자신을 가지고. 하민. 자신의 검에 집중해. 진산. 마찬가지다. 상대의 검의 흐름의 틈을 억지로 보려 정신 빼고 있지 말고, 네 검의 흐름부터 봐라. 우진. 너도 네 검의 흐름에 더 집중하고.”
하무백이 그간 지켜본 다섯 생도의 수련으로부터 개선 방향을 한꺼번에 쏟아냈다.
“그럼 남은 시간은 자습.”
그리고 늘 그렇듯이, 자습이라는 말로 마무리.
다섯 생도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하무백의 신형이 사라졌다.
하무백이 향한 곳은 공손무외가 머무는 객잔이었다.
그 사이 별채가 있는 곳을 구한 것인지, 지난번의 그곳과는 다른 곳이었다.
위지군이 먼저 당도해 있었다.
그 역시 새로이 찾아온 이들의 기척을 느낀 것이다.
전서응으로 지속적으로 소식을 주고받은 것인지, 무창에 진입한 이들이 곧장 이 객잔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반 시진이 되지 않아, 별채로 열 사람이 들어섰다. 그중 마차에서 힘겹게 내려 부축받으며 걸어오는 여인이 있었다.
구음절맥을 앓고 있는 환자이리라.
“먼 길을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 서둘러 오느라 더욱 힘든 여정이었을 터. 특히나 그 여정을 버티느라 지유가 고생이 많았구나.”
공손무외의 말에 새로이 나타난 열 사람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 정말 우리 지유 치료가 가능한 것인가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묻는 여인.
공손무외의 딸이자, 구음절맥을 앓고 있는 궁소유의 어미인 공손화경이었다.
공손우경은 소곡주로서 선유곡을 비울 수 없었기에 그녀가 딸을 데리고 무창으로 온 것이다.
공손화경의 물음에 공손무외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지군과 하무백을 소개했다.
“지유를 봐주실 위지 대인이시다.”
일행의 얼굴에 이채가 어렸다.
공손무외와 함께 있는 모습에 짐작은 했지만, 어떻게 보더라도 의원이라기보다는 무인의 모습을 한 이였으니까.
“일단 맥부터 보겠습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위지군이 궁소유에게 다가가 맥문을 잡았다.
자신의 내공을 조금 흘려 넣어 궁소유의 혈맥을 살피길 잠시.
하무백에게 그녀의 맥문을 잡아보도록 했다.
하무백 역시 혈맥을 모두 살피고 궁소유의 손목을 놓자, 위지군이 하무백에게 물었다.
“어떤 것 같으냐?”
“아직 제자의 경험이 얕기는 합니다만… 칠음절맥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하무백의 대답에 위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 또한 그렇다.”
그 말에 자리에 있는 이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저 말은 곧 치료할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
강호 최고의 의술을 가지고 있다는 선유곡에서도 완치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그저 병증의 진행을 막고 있을 뿐인데.
저 사제는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저, 정녕 그게 사실입니까? 대인…….”
공손화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딸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으니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절맥증이라는 것이, 결국은 혈맥이 막히다가 끊어지는 천형입니다. 칠음절맥이나 구음절맥은 그 원인이 지나치게 강한 음기 때문인데… 다행히 본 사문에서 음기를 다루는 방법대로라면, 칠음절맥과 구음절맥이 별 차이가 없을 듯하군요.”
위지군의 담담한 설명에 공손화경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 역시 선유곡의 일원으로, 그 능력이 가히 극에 달한 의원이었다.
그랬기에 딸의 상태를 잘 알았다.
오음절맥과 구음절맥은 달랐다.
막히는 혈맥의 숫자가 다섯 개에서 아홉 개로 네 개가 늘었다는 것이,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복합한 문제들이 연이어 생겼다.
아홉 개의 혈맥을 동시에 보해야 했으나, 그 어떤 약재의 배합으로도 불가능했다.
겨우 찾아낸 방편이, 약재로 다섯 개의 혈맥을 보하고, 침술로 네 개의 혈맥을 보하는 방법이었으나, 때로는 중첩되기도 하고, 때로는 빠트리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홉 개의 혈맥을 균일하고 보하지 못하고, 차이를 두게 되었고, 그것이 병증의 치료를 다사다난하게 만들어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현재 아홉 개의 혈맥의 상태가 제각각입니다. 그래도 열심히 돌보신 덕에 혈맥이 더 막히지는 않고 있습니다만… 이 상태를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지요. 결국은 제일 약한 혈맥에서 문제가 생길 테니.”
위지군의 이어진 말에 공손무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자신들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원인이었으니.
“본 사문의 심법이면, 아홉 개의 혈맥을 동시에 균일하게 보할 수 있습니다. 우선 그것부터 시작하도록 하지요.”
“아, 아아아.”
공손화경의 입에서 감격의 울음이 흘러나왔다.
“흑, 흑흑. 흑흑흑.”
궁소유는 완치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에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간 담담한 듯, 초연한 모습을 연기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던가.
하루하루가 무섭고 두려웠다.
언제 혈맥이 막히고 끊겨 죽음을 맞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
그때, 자신은 과연 어머니와 아버지를 어떻게 봐야 할지, 남겨지는 그분들은 어떤 심정일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너무도 무서웠기에.
그 감정이 일시에 터져 나온 것이다.
“흑흑흑흑.”
그랬기에 궁소유의 울음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하무백과 위지군은 담담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손화경 역시 눈물을 흘리며 궁소유를 안고 토닥이고 있었다.
모녀의 눈물을 잠시 지켜보던 위지군이 먼저 자리를 떴다.
공손무외가 안내한 방이었다.
그 방은 치료를 위한 준비를 해둔 곳이었다.
“제가 치료하시는 모습을 보아도 되겠습니까?”
공손무외가 조심스레 물었다.
“결국 본문의 심법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침술입니다만… 선유곡이라면, 그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겠지요.”
위지군의 허락에 공손무외가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대인의 은혜에 그저 감사드립니다.”
위지군은 미소를 지으며 그런 공손무외를 일으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울음을 그친 공손화경과 궁소유를 공손비연이 안내해 데리고 왔다.
“오늘은 좀 고통스러울 테니, 수혈을 짚을 겁니다.”
위지군의 말에 궁소유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침상에 눕자 하무백이 가볍게 그녀의 수혈을 짚었다.
곧 깊은 잠에 빠져든 궁소유.
그런 그녀의 의복을 공손화경이 조심스레 벗겼다.
“비전을 볼 수 있게 허락해주신 대인께 감사드립니다.”
딸의 옷을 모두 벗긴 공손화경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공손화경과 공손비연 역시 시술을 볼 수 있게끔 허락해주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된 궁소유의 몸은 앙상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뼈밖에 남지 않은 몰골.
저런 상태로 겨우겨우 하루하루를 버틴 것이다.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침을 꺼내든 자는 하무백이었다.
하무백은 천천히 궁소유의 몸에 침을 꽂아 넣었다.
그 모습을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는 이는 공손무외, 공손화경, 공손비연 세 사람이었다.
“으음…….”
침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가끔씩, 궁소유가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는데도 느껴지는 고통인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몸에 빽빽하게 침이 꽂혔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하무백이 담담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