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98화 (98/312)

98화. 더 좋구나

“알 수 없는 노릇 아니겠느냐. 지유에 이어 궁 서방까지 부탁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면목이 없기도 하고…….”

공손무외가 어두운 안색으로 답했다.

“너무 염치없는 일이긴 하지요.”

공손화경도 금세 수긍했다. 딸의 목숨을 살리는 이들에게, 남편의 병도 봐달라고 하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 구해놨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

“저 어린 것의 목숨을 구한 것만 하더라도 우리로서는 큰 은혜를 입은 것이다.”

공손무외의 시선이 침상에서 잠에 빠져 있는 궁소유에게로 향했다.

이제 겨우 열다섯.

절맥증은 보통 열여덟을 넘기지 못한다. 가장 오래 버텼던 기록은 스물.

궁소유는 선유곡에서 최선을 다해 돌보고 있으니 그보다는 오래 생존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젊은 나이에 생을 다할 시한부임은 부정할 수 없는 바.

그 아이에게 새로운 삶을 줄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공손무외와 공손화경에게는 더없이 큰 은혜요, 빚이었다.

“네가 이곳에 계속 머물러 있거라. 아무래도 내가 만물련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이윽고 결심한 듯 공손무외가 말했다.

그 말에 공손화경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버지. 그건…….”

공손무외는 선유곡의 곡주다. 그런 그가 사사로이 타 문파를 방문하는 것은 보통 큰일이 아니다.

그가 방문해주기를 바라는 문파가 한둘이 아니었기에.

사실 그의 이번 외유에 무창 근처에 있는 문파들에게도 끊임없이 연락이 왔다.

근처에 오신 김에 잠시라도 들려달라고.

그럼에도 그러지 않은 것은, 선유곡과의 교분을 맺는다는 것이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중원 최고의 의술을 지닌 선유곡.

그곳의 곡주가 방문했다는 것은 해당 문파로 하여금 어깨에 상당히 힘을 줄 수 있게 해주는 행사였으니까.

더욱이 같은 신진팔대방파에 속한 만물련을 공손무외가 방문한다는 것은,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서는 꽤 언짢아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만물련주가 그의 사위였음에도 방문을 자제하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만물련주 역시 선유곡을 방문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만났던 것은 만물련주가 소련주이던 때 공손화경과 혼인식을 올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알고 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하지만 난 이곳에 와서 대인을 만나고서야 깨달았다. 그것들이 다 부질없는 일임을. 내 가족을 우선 살리고 봐야 할 일이다. 내가 능력이 없으면 모르겠다만, 어찌 몸이 쇠약해지는 사위의 맥 한 번 짚어보지 않을 수 있겠느냐.”

공손무외의 단호한 말에 공손화경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허면, 절맥증의 치료법은…….”

“너와 비연이면 충분하다. 너희가 우선 기록을 남겨두면 그것을 같이 연구하면 될 일이다. 내가 직접 보는 것만 못하다만… 그것보다 사위의 목숨이 더 중하지. 지유를 살리면 무엇하느냐. 아비가 먼저 떠나버리면 그 또한 그 아이에게는 큰 슬픔이거늘.”

“감사합니다. 아버지.”

공손화경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

하무백은 두 눈을 감고 내공을 아주 조금 밀어 넣었다.

그리고 무극여의심법의 경로를 응용하여 조심스레 내공을 운용했다.

정말로 실낱같은 내공이다.

이걸로 조심스레 막혀 있는 혈맥을 안에서 뚫으며 단단히 만들었다.

혈맥을 뚫고 주변으로 흩어지려는 내공을 시침한 침들이 붙들고 혈맥의 벽으로 밀어 넣어 혈맥을 튼튼하게 보한다.

이 방법을 찾기 위해 위지군이 얼마나 노력하였던가.

필사의 노력 끝에 발견한 방법이다.

무극여의심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방법.

다른 내공 운용법은 막힌 혈맥을 뚫지 못했고 도리어 혈맥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으음…….”

아직 고통이 느껴지는 것인지 궁소유가 가는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지금 그녀는 맨정신이었다.

그녀가 원했기에 오늘 처음으로 수혈을 짚지 않았다.

하무백은 무심한 표정으로 치료를 진행했다. 궁소유의 반응에는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마음이 흔들려 내공의 운용이 틀어지면, 오히려 그게 더욱 큰일이었기에.

하무백은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담담히 내공을 운용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궁소유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내공을 거둬들인 하무백은 그녀의 나신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침들을 조심스레 뽑아내고 얇은 이불을 덮어준 후 위지군과 함께 방을 나섰다.

“점점 더 내공의 운용에 익숙해져 가고 있구나. 장하다.”

위지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사부님께서 잘 가르쳐주신 덕입니다.”

하무백의 말에 위지군이 실소를 흘렸다.

“녀석. 입에 발린 말은.”

그럼에도 위지군은 기분이 흡족해 보였다.

일각 쯤 흘렀을까.

방문이 열리고 공손화경과 공손비연, 궁소유가 나왔다.

“그래, 몸은 좀 어떤고?”

위지군의 물음에 궁소유는 살풋 웃었다.

“가벼워도 너무 가볍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붉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건강한 혈색이 돌아와, 창백하기만 하던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팔도 조금 통통해진 것이, 식사로 섭취하는 음식들의 영양분을 몸이 충실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좋구나.”

위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을 곡주께서 보셨으면 무척 기뻐하셨을 텐데요.”

하무백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죄송할 뿐입니다. 대인의 도움을 청하고는 정작 아버지께서 자리를 비우셔서…….”

공손화경이 고개를 숙이며 사죄의 말을 전했다.

“아,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무백이 당황해서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만물련주께서도 건강이 안 좋으시다고요.”

일전에 공손무외가 하무백과 위지군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떠났었다.

그때는 궁소유의 상태가 상태인지라 자세히 묻지는 않았었다.

허나 오늘은 궁소유의 혈색도 강히 돌아오고, 맨정신에 치료받을 정도로 호전되었기에 사정을 물을 여유가 생긴 것이다.

“네. 본디도 몸이 약한 이였습니다만… 최근 들어 갑자기 상태가 나빠져서. 아버님께서 한번 살펴보겠다고 가신 겁니다. 미천한 제 실력으로는 도무지 원인을 알 수가 없어서…….”

공손화경의 말에 그녀는 물론이고 궁소유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현 만물련주시면… 분명 지난 전쟁에서 만천혈뢰를 개량하셨던 분이…….”

“네. 맞아요. 제 남편이 소련주 시절에 개량을 했었습니다. 지금은 아예 다른 암기를 개발했고요.”

하무백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천혈뢰.

호천단원들 모두 한 개씩 지니고 있던 암기였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반전을 위해 가지고 있던.

당가의 암기는 주로 독과 침을 이용한 반면, 만물련의 암기는 대부분 폭약을 이용했다.

해서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만물련의 만천혈뢰가 당가의 암기보다 훨씬 유용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폭약을 사용한 암기이다 보니, 불발과 오폭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나 지니고 움직일 때 갑자기 폭발을 일으켜 아군에 피해를 입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부분을 혁신적으로 개량한 이가 현 만물련주였다.

그 개량 덕에 불발과 오폭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그 이후로 호천단도 비상용으로 만천혈뢰를 하나씩 지니게 되었고, 절체절명의 순간 그 도움을 심심치 않게 받았었다.

“지난 전쟁에서 만천혈뢰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았습니다.”

하무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만천혈뢰가 없었다면 실패했을지도 모를 작전도 있었지요. 혹여 곡주께서도 원인을 찾지 못하신다면, 제가 살펴봐도 폐가 되지 않을까요? 물론 제가 살펴본다고 딱히 수가 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만.”

공손화경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하무백이 먼저 저리 말해줄 줄이야.

불감청이언정 고소원 아니던가.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공손화경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궁소유 역시 함께였다.

“아닙니다. 제가 본다고 무슨 수가 나겠습니까. 저나 사부님은 무인이지 의원이 아닙니다. 다만 절맥을 치료할 수 있을 뿐입니다.”

하무백이 다시 한 번 당황했다.

공손 모녀의 과한 예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도에게는 쌀쌀맞게 대하는 하무백이 이렇게 호구처럼 선유곡과 만물련을 도와주려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지난 전쟁에서 그들에게 그만한 빚을 졌기에, 갚으려 하는 것 뿐.

전쟁이란 참으로 처참하다.

그 지옥도에서 조금이라도 생환의 확률을 올려줄 도움이라면.

큰 빚이었다.

하무백은 그리 생각했다.

하무백 자신은 몰라도, 적어도 수하들은 선유곡의 의술과 만물련의 암기로 도움을 받았으니.

그리고 그 덕에 한 명이라도 더 살아 돌아왔으니.

팽가와 하오문, 연가에는 그리 얼음처럼 차가웠던 하무백도 선유곡과 만물련에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영애의 상태가 특수한 경우일 뿐, 의술은 곡주께서 중원 최고이시니, 제 도움이 필요할 일은 없을 겁니다.”

하무백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잠시 상태 좀 보자꾸나.”

그때 위지군이 궁소유의 손목을 잡고 진맥을 행했다.

“흐음. 더 좋구나.”

진맥을 마친 위지군의 말에 선유곡 사람들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 정도면 나흘, 그러니까 두 번 정도 치료를 더 받은 후에 약을 써도 되겠다.”

현재 궁소유의 혈맥이 너무 약했기에, 치료 후 회복 기간 하루를 두고 이틀에 한 번 치료를 받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벌써 약을 써도 된다니.

예상보다 빠른 회복 속도였다.

“벌써 말인가요?”

공손화경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역시 미처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구음절맥이니 만큼 시일이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칠음절맥보다 악화 속도가 빠른 만큼 회복 속도도 빠를 줄은 미처 생각 못 했습니다. 지금 치료 중인 칠음절맥 아이와 비교하더라도 확연히 빠르군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공손화경이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연이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위지군, 하무백 사제가 방문하는 날이면, 도통 공손화경과 공손비연의 허리가 펴질 틈이 없었다.

“저… 할아버지…….”

궁소유가 조심스레 위지군을 불렀다. 위지군이 그리 부르라 이른 다음부터 할아버지라 칭하고 있었다.

“혹시 그 아이를 만나볼 수 있을까요? 저보다 어린데다 그동안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단목운혜에 대한 이야기를 딱히 한 적이 없는데, 저 정도로 알고 있다니.

하무백은 의문을 가졌다가 금세 그 답을 찾았다.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이야기를 전해줄 사람이.

약재를 구해오겠다며 선유곡으로 갔다가, 이들을 데리고 온 이, 벽력개였다.

벽력개와 이들의 인연은 이미 들은 바가 있었다.

전대 선유곡주와 벽력개가 죽마고우라는.

그 인연이면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었으리라.

“게다가 그 아이의 할아버지가 제 증조부와 절친한 친우셨다고…….”

단목가와 선유곡, 그리고 벽력개.

이들의 인연에 대해서도 궁소유를 치료해주며 벽력개에게 들었다.

깊은 감사의 인사와 함께.

“그렇군. 따지고 보면 혜아가 유아 너의 당고모뻘 되겠구나.”

배분을 굳이 따지면 그리 되었다.

위지군의 말에 궁소유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그래. 둘 모두 더 건강해지면 한 번 자리를 마련해보자꾸나.”

그렇게 하무백과 위지군이 돌아갔다.

사흘이 흘렀다.

무창의 입구.

공손무외가 자신의 사위와 함께 마차를 탄 채로 무창의 성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은 공손무외로서도 미처 예상치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