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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무공교관-102화 (102/312)

102화. 뭔가 착각하나 본데…

“약속이요?”

궁소유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되물었다.

“만나게 해준다고 했으니까.”

불친절한 대답.

하지만 그 대답만으로 이내 궁소유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저, 정말인가요?”

되묻는 궁소유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제 그 정도로 회복은 됐으니. 그 아이도 그렇고.”

하무백의 대답에 궁소유가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무슨 이야기인가요?”

공손화경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사부님께서 유아에게 약속을 하셨지요. 혜아와 유아 두 아이가 모두 건강해지면 한번 자리를 마련해 보시겠다고요.”

하무백의 대답에 공손화경은 작은 탄성을 흘렸다.

그 이야기를 할 때 그녀도 곁에 있었으니까.

다만 그녀는 잊고 있었을 뿐이다.

궁소유는 가슴에 꼭 간직하고 있었고.

“약도 잘 먹고, 치료도 잘 받고. 건강도 많이 좋아졌다. 그런데 계속 별채에 머무르고만 있으니 답답할 법도 한데, 잘 참고 있고. 이제 바람도 쐴 겸 나가봐도 될 거다.”

하무백의 말에 궁소유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그러다가 이내 미소가 사라지고 걱정이 자리했다.

“그런데 호위무사들은 어떻게…….”

기본적으로 만물련 련주의 호위단이다. 하지만 궁소유는 련주의 금지옥엽.

련주와 함께 있는 이상 호위단이 궁소유의 안위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그간 그녀를 방치하다시피 내버려 뒀던 과거가 우습게도.

궁무혁과 함께 있기 때문인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궁무혁이 제지하려 하여도 련주와 그 자손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이 호위단의 본분이라는 말만 반복할 뿐.

“나와 함께 움직인다면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지.”

태연한 하무백의 말에 궁소유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호위단은 여전히 하무백이 제집 드나들 듯, 이곳 별채를 드나든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으니.

“다만, 련주께서는 이곳에 머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련주께서 움직이시면 저들이 함께 움직이니까요.”

하무백의 말에 궁무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상관없습니다. 몸이 많이 좋아진 덕에 최근 연구 중인 암기가 있어… 저야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 더 편합니다.”

실제로 궁무혁은 어느 정도 건강이 회복된 후로 복잡한 설계도를 두고 고민에 잠겨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두 분은…….”

하무백의 시선이 공손무외와 공손화경에게로 향했다.

사실 호위단은 더 두 사람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어찌하든 상관이 없었지만.

“우리도 이곳에서 쉬고 있겠네. 조용히 잘 다녀오게나.”

“알겠습니다.”

공손무외의 말에 하무백이 짧게 답했다.

“그럼 간단히 채비하고 이 각 뒤에 출발토록 하지요. 저는 그동안 잠깐 련주님을 좀 봐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외출 결정에 궁소유와 공손화경이 바빠졌다.

별채에 갑작스레 바쁜 움직임이 생겼지만, 호위단 그 누구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무백이 펼쳐놓은 기막 때문이었다.

***

만물련 후원의 우거진 숲.

낮이건만 이곳은 늦은 저녁처럼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고목들이 하늘을 빽빽하게 가린 탓이다.

궁도혁이 이곳 후원을 홀로 거닐었다.

정확히는 깊숙한 곳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 있었군.”

그러던 중 한 인영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빨리 오셨군요.”

야행복에 복면을 쓴 사내다.

“네놈이 만물련에 있는 시간을 한 시라도 줄이려면 빨리 와야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는 궁도혁.

“그러신 것 치고는 련주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고 계시더군요.”

마치 복면 아래 감춰진 입이 빙그레 웃고 있을 듯한,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다.

궁도혁은 인상을 썼다.

저 말을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인지, 저놈이 마음에 안 들어서인지.

복잡한 심사였다.

“련주가 회복되고 있습니다.”

이어진 복면인의 담담한 말.

그런 그의 태도에 궁도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다는 거지?”

“이런. 련주와 영애의 건강이 회복된다는 소식에 영애에 대한 감시까지 강화하신 분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로군요.”

돌아온 대답에 궁도혁은 이를 악물었다.

반박하고 싶었으나 틀린 말이 없었기에.

저놈이 자신의 가슴에 심었던 작은 욕망의 씨앗은 이미 싹을 틔워 무럭무럭 자라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련주가 되어야만 그 욕망이 충족될 정도의 거목이 되어버린 씨앗.

“흥. 그렇게 자신하더니, 일 처리가 엉망이군.”

궁도혁의 말에 복면인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할 수밖에 없는 지적입니다. 저희도 정말 예상치 못한 일이니까요…….”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복면인.

“무창. 그곳에 무언가 있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저희들의 힘으로도 미처 파악 못한… 그래서 요즘 무창에 관심을 기울이는 중입니다.”

“흥. 말은 번지르르하군.”

“그래서 말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뭘 말인가?”

복면인의 물음에 궁도혁은 또 한 번 물음으로 답했다.

“련주와 영애 말입니다. 원래는 자연스레 공자께 련주의 자리가 흘러가게끔 되어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틀어졌으니 말입니다.”

궁도혁의 두 눈이 번득였다.

“무슨 의도인 거지?”

으르렁거리는 듯한 궁도혁의 물음에 복면인은 재빨리 양손을 펴서 들어 보였다.

“아무런 의도가 없습니다. 저희는 단지 앞으로의 매끄러운 일 처리를 위해 당사자의 의사를 물은 겁니다. 사실 공자께서 련주가 되지 못할 것 같다면 저희도 여기서 손을 떼야 하거든요. 그간 들어간 품이 아깝기는 합니다만, 감당이 가능한 정도라서요.”

“손을 뗀다라… 자신 없으니 그만두겠다는 거군. 날 들쑤셔 놓은 거야 네놈들 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니 말이야.”

잔뜩 날 선 목소리였다.

“흐음. 뭐, 그렇게 생각하셔도 달리 드릴 말씀이 없군요. 맞는 말씀이기도 하고.”

순순히 인정하는 복면인.

“하. 뭐라? 지금 감히 내 앞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인다고!”

궁도혁이 결국 분노를 터트렸다.

그의 몸에서 무서운 기세가 넘실넘실 피어올랐다.

전신의 내공을 몽땅 끌어올렸다.

복면인은 차가운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분위기 역시 순식간에 바뀐 것이다.

“공자? 뭔가 착각하나 본데…….”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기세가 복면인의 몸에서 솟구쳐 올랐다.

그 기운은 순식간에 궁도혁의 기세를 먹어 치우고는 그를 압박했다.

“내가 힘이 없어서 네놈에게 고분고분한 게 아니야. 단지 적당히 쓸모가 있으니 좋게 좋게 가려 그런 거지. 적당히 대접해 줄 때 그 대접에 만족하는 게 좋을 거야.”

살기 어린 음성.

그 차갑고도 잔혹한 음성에 궁도혁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궁도혁의 기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그의 기세가 죽자 복면인 역시 언제 그랬냐는 듯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너, 너희들은 대체…….”

살짝 떨려 나오는 목소리.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요. 공자. 앞으로 공자는 어찌하고 싶은 것인지 생각해보시죠. 사흘 뒤에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복면인은 사라졌다.

어둑어둑한 후원의 숲에 오직 궁도혁만이 홀로 남아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우와!”

면사를 한 꼬마 소저가 연신 감탄을 흘리며 거리를 둘러보았다.

궁소유였다.

객잔의 별채를 빠져나오는 것은 정말 우스우리만큼 쉬웠다.

궁소유를 안아 든 하무백이 가볍게 걸음을 옮기는데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그렇게 나온 무창 나들이는 궁소유에게는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무백은 곁에서 그저 무심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니 무심히 바라보고 있노라 본인은 생각했지만,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간 것이 누가 보더라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무백은 궁소유가 거리를 구경한다고 가다가 멈추며 시간을 끌어도 재촉하지 않았다.

남는 것이 시간이었고, 딱히 약속 시간을 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랬기에 궁소유가 하고 싶은 대로 두는 것이다.

그녀가 그간 얼마나 답답하고 절망적인 삶을 살아왔는지 알기 때문이다.

하무백은 이미 이런 모습을 한 번 보았다.

동정호의 청란도를 나서 처음 땅을 디뎠을 때 동생의 모습이 저랬으니.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서서히 거리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궁소유도 그것을 느꼈는지, 분위기가 점점 차분해졌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궁소유가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지. 여기는 무창이라는 도시가 가진 그림자의 시작점 정도겠군.”

명석한 궁소유는 대번에 그 의미를 이해했다.

그리고는 다소곳한 모습으로 하무백의 곁에서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림자는 점점 진해졌다.

이윽고 그림자가 가장 어두운 부분인 듯한 곳의 움막집 앞에 하무백이 멈춰 섰다.

“여기인가요?”

하무백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면 된다. 백아.”

안에서 들려온 것은 사부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궁소유도 금세 알아차렸다. 그녀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어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위지군이 낡은 다탁에 웃음 띤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곁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

“아… 예쁘다…….”

그 모습을 본 궁소유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뱉은 말에 화들짝 놀라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언니도 예뻐요! 헤헤.”

그때 단목운혜의 어여쁜 목소리가 그런 그녀의 무안함을 없애 줬다.

“할아버지께 들었어요. 저보다 더 아픈 언니가 있었는데, 절 만나러 올 거라고요.”

밝은 얼굴, 밝은 목소리.

함께 하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아이였다.

“아아, 그래. 궁소유라고 해.”

“단목운혜예요.”

위지군의 손짓에 궁소유가 면사를 벗고 다탁의 한자리에 앉았다.

그때 여화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이 아이의 어미예요. 귀하신 분이라 은인께 들었어요. 하찮은 것이지만 언짢아하지 말고 들어 주세요.”

차와 간단한 다과였다.

그 말에 궁소유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에요. 정말로 귀하고 과분한 대접이에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녀의 모습에 여화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절맥증을 앓고 있는 두 아이는 그렇게 금세 친해졌다.

공감대가 많은 탓일 거다.

위지군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란이도 있으면 좋을 뻔했구나.”

“시간은 많습니다.”

위지군의 말에 하무백이 담담히 대꾸했다. 그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타핫!”

“흐앗!”

커다란 기합성이 울려 퍼지며, 검광이 번뜩였다.

두 청년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챙! 챙챙! 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맹룡대 칠 조의 다섯 생도는 그 모습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과연 대단하네.”

낙우진이 중얼거렸다.

“이거 동투제 결승전을 미리 보는 거 같은데?”

백리평이 질린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지금 눈앞에서 대련하고 있는 남궁지후와 주우명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보이고 있는지 절절히 느끼는 중이다.

“그런데 쟤들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냐?”

당우진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지금 여기는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이었으니.

“그야 교관님이 없으니까.”

단목운뢰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하아. 딱밤 한두 대에 끝날 녀석들이 지금 여기서 칼춤을 추는구나…….”

당진산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리자.

“넌 딱밤 한 대도 안 되잖아.”

연하민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당진산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사이 대련은 점차 마지막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단목운뢰가 검을 쥐고 벌떡 일어섰다.

“나도 좀 부탁해!”

당진산은 질렸다는 듯 그런 단목운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무장 가운데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단목운뢰.

그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응?”

그리고는 한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당진산의 물음에 단목운뢰는 이내 주우명과 남궁지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니. 뭔가 이상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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