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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무공교관-104화 (104/312)

104화. 아닐 수도 있다

깊은 밤.

하무백이 숙소의 지붕에 올라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동정호가 있을 어딘가.

“왜 그러느냐?”

어느새 다가온 위지군이 하무백과 같은 곳을 바라보며 물었다.

“청란도 생각이 나는 게냐?”

오늘 단목운혜와 궁소유의 만남을 지켜보았기에, 예전 생각이 나는가 싶어 묻는 것이다.

“아닙니다.”

“허면?”

“무언가 기분 나쁘면서도 익숙한 것이 저 너머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말입니다.”

“기감에 잡힌 것이더냐?”

하무백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예감? 직감? 그런 것 같습니다.”

대답을 들은 위지군이 물끄러미 먼 곳을 바라보았다.

“네가 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다만, 나에게도 느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저 오늘 마교 놈들을 만난 것 때문에 그런 것이겠지요.”

하무백의 말에 잠시 뜸을 들인 위지군이 입을 열었다.

“아닐 수도 있다.”

“네?”

“어쩌면 네 앞을 막고 있던 작은 벽을 넘은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네?”

하무백은 눈을 끔뻑거리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벽을 넘다니.

최근 들어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그저 매일 꾸준히 조금씩 수련하며 계속해서 정진할 뿐.

“너는 이제 내가 가보지 못한 곳에 발을 디딘 게다.”

위지군이 대견하다는 얼굴로 하무백을 보았다.

현재 하무백의 무공 수위는 위지군과 거의 대등한 정도였다.

경험의 차이로 인한 미숙함은 있을지언정, 경지 자체는 거의 비슷했다.

경험이라는 부분도, 실전 경험 측면에서는 오히려 하무백이 나을지도 몰랐다.

다만 세월이 주는,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해결할 수 없는 경험의 차이였다.

그런데 하무백이 사부인 위지군보다 먼저 벽을 넘었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라.

위지군은 그런 기꺼운 마음으로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실감이 잘 안 나는군요.”

하무백이 얼떨떨하다는 듯 말했다.

그럴 수밖에.

지난 두 번의 전쟁에서 수많은 피를 뒤집어쓴 자신이 벽을 넘다니.

상상해본 적도 없는 일이다.

“피 냄새를 빼는 과정에서 너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느낀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오늘 일이 계기가 된 것이지. 다만, 작은 벽이기에 너조차도 명확히 느끼지를 못한 것이고. 계속 정진하면서 온전히 네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게다.”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하는 위지군.

“오늘 일이라니…….”

마교의 버러지들 네 놈을 보고 극도로 분노해서 다시 잔혹하게 피를 뒤집어쓸 뻔한 그 일?

만약 그때 사부가 나타나지 않고, 생각했던 대로 움직였다면…….

“천운이었다. 네가 그런 기로에 있는 줄은 너도 모르고 나도 몰랐으니. 그때 네가 찰나에 솟아오르는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잡아먹혔다면, 어쩌면 주화입마에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였다.

두 사람 모두 그 징후를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감사합니다. 사부님.”

하무백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그저 하늘이 도운 거다. 좀 전에 말했다시피 너도 모르고 나도 몰랐으니.”

“네.”

“이번 일로 확실해졌구나. 너는 피 냄새를 좀 더 빼내야 한다. 아직도 제법 남아 있어.”

“네.”

스승의 조언에 하무백은 순순히 긍정할 뿐이다.

“마교나 혈교 놈들을 만나더라도, 자신을 잃으면 안 된다. 잃으면 그 순간 주화입마에 빠질 수 있다.”

“명심하겠습니다.”

복면인이 동정호의 이름 모를 누각에서 무창을 바라보고 있을 때, 사부와 제자는 교룡관의 한 지붕에서 그가 있는 동정호를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

눈 주변이 퀭하다.

눈에는 핏발이 한가득이었다.

최근 며칠 사이에 체중이 열 근(64kg)은 빠진 듯하다.

당연히 얼굴도 야위었다.

최근 보는 사람마다 걱정어린 말을 건넸다.

그럼에도 궁도혁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궁무혁은 몸이 선천적으로 약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괴짜였다.

몸이 약했기에, 선유곡과 혼맥을 맺었다. 물론 단순히 이득에 따른 계산만으로 이루어진 혼인은 아니었지만.

몸이 약했기에 할 수 있는 것이 제한되었고, 그것에 빠져드는 괴짜가 되었다.

그런데 천재였다.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

그랬기에 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련주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련의 일보다는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몸도 약하고 련의 일을 멀리하는 련주.

자연히 궁도혁이 부련주로서 그 일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부련주라 하나 련주나 다름이 없는 상황.

궁도혁은 이러한 현실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들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지금은 다르다.

당연히 자신이 련주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궁무혁과 궁소유가 회복하고 있는 지금, 자신의 것이어야 마땅할 련주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만 같았다.

가졌다가 잃는 것.

그런 상실감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가진 적도 없었고, 애초에 궁도혁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뿌린 작은 씨앗은 거목이 되어, 궁도혁이 그런 생각을 가지게끔 만들었다.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마침내 궁도혁은 결정을 내렸다.

그의 두 눈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단순히 충혈된 것이 아니었다.

음산하고 잔인한 욕망이 자리한 붉은 빛이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주었던 깃발을 지정된 장소에 걸었다.

마치 그 자리에 원래 있었던 듯,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수많은 깃발들 사이에 자리한 깃발.

그것을 잠시 지켜본 궁도혁은 후원의 깊은 숲으로 향했다.

“사흘이라 했던가?”

깃발이 걸리고 늦어도 사흘 안에 이곳으로 자신을 찾을 것이라 했었다.

궁도혁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두 눈을 감은 채 명상에 들었다.

이미 사흘간 폐관할테니 자신을 찾지 말고, 후원도 금지로 정해둔 터.

이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면 된다.

약속한 사흘이 흘렀다.

깊은 밤.

사흘도 끝나갈 무렵.

갑작스러운 바람이 궁도혁의 얼굴에 불었다.

“후아. 결정을 내리신 모양이군요?”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궁도혁이 두 눈을 떴다.

여기저기 흙먼지가 잔뜩 묻은 야행복.

어딘가를 급히 다녀온 모양새다.

“바빠 보이는군.”

담담한 궁도혁의 목소리.

복면인은 그런 궁도혁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새빨갛게 변한 흰자위.

“호오. 결심을 하신 모양이군요.”

복면인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궁도혁.

“그렇지 않아도 확인할 게 있어서 무창에 갔던 참입니다. 무창 근처에 갈만한 사람이 저밖에 없는지라… 그러던 차에 저희를 찾으셔서 정말 정신없이 돌아왔습니다.”

만물련이 위치한 곳은 하남성 여남현 동쪽의 천중산이다.

좋은 광물이 많이 매장된 곳인지라 만물련이 자리를 잡았다.

대장장이들에게 좋은 광물이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귀물이었으니.

무창에서는 대강 구백 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흘 만에 오기에는 가깝지 않은 거리였으니 저런 몰골로 나타난 것이리라.

소식을 받는 데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거의 이틀 만에 돌아온 것이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복면인이 장난스러운 기색을 지우고 진중한 태도로 물었다.

“내가 련주가 되어야겠다. 형님과 조카는… 배제한다.”

“정확히 어떻게…….”

“이 세상에 없어야 하겠지.”

한 줌 온기도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궁도혁의 입에서 그 대답이 나오자 복면인은 만족한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군요. 좋아요.”

지난 사흘간의 명상에서 무언가 변화가 있었던 것인가.

궁도혁은 무심히 그런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호. 무언가 달라지셨습니다. 진전이 있으셨던가요?”

그 모습에 복면인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불과 얼마 전에 잔뜩 흥분해서 분노를 터트리던 궁도혁이었으니까.

“수라가 되기로 마음 먹었으면 달라져야지.”

복면인은 복면 아래로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저희와 한결 더 가까워지셨군요. 앞으로는 삼령주(三領主)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복면인 아니 삼령주는 포권을 하며 말했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개입을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이어진 질문.

“선택할 수 있나?”

“그럼요. 직접 손을 쓰시겠습니까? 저희가 손을 쓰는 데 도움을 주시겠습니까?”

“일단 도움을 주고, 그래도 실패하면 직접 손을 쓰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면 이제 뭘 하면 되지?”

궁도혁이 삼령주를 바라보았다.

“만천금쇄폭뢰를 주시죠.”

담담한 대답.

하지만 그 내용은 그런 평이한 것이 아니었다.

이번만은 궁도혁이 무심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어떤 물건인지는 너희들이 더 잘 알테고.”

“물론입니다. 그거 때문에 지금 이 고생을 하고 있으니까요.”

“분해해서 연구하려는 거면 포기해. 분해하려는 순간 자폭하는 암기다.”

“설마요. 사용하려고 그러는 거죠. 정말로 필요해서요.”

다시 한번 인상을 쓰는 궁도혁.

만천금쇄폭뢰가 지닌 위력을 잘 알고 있기에 쉬이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 만천금쇄폭뢰 하나로는 안 됩니다. 어차피 구하실 수 있는 수량이 하나 뿐일테니… 만천혈뢰도 열 개 정도 구해주셔야 합니다.”

궁도혁이 이번만큼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문파 하나를 지우려고 그러는 건가?”

과장된 표현이지만, 만천혈뢰 열 개에 만천금쇄폭뢰 한 개까지 더해지면, 가히 그 정도로 경천동지할 위력이 나온다.

만천금쇄폭뢰는 삼령주의 말대로 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

부련주였기에 형이 챙겨준 호신용 한 개.

그것을 줘야 한다.

그 외의 만천금쇄폭뢰는 오직 련주만이 꺼낼 수 있었다.

“내가 구할 수 있는 수량이 하나라는 것까지 아는 걸 보면, 그게 어떤 것인지도 알 터. 이건 도움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직접 손을 쓰라고 하는 정도인데?”

궁도혁의 물음에 삼령주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는 뛰어난 신투들이 제법 있지요. 그리고 어차피 그 물건은 다른 곳에 쓸 겁니다. 련주나 영애에게 사용할 물건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삼령주다.

“좀 답답해지려고 하는군. 알아듣기 쉽게 자세히 말해줬으면 좋겠어. 이렇게 수수께끼 풀 듯 말하지 말고.”

목소리에 짜증이 살짝 섞여 있었다.

“하무백이라는 인간을 아십니까?”

삼령주의 물음.

알고 있다.

부련주로서 련주의 일을 대행하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된 인물이다.

“정천맹의 인물 대부분은 하무백이라는 인간을 알고 있지만, 그가 얼마나 대단한 괴물인지는 모르고 있더군요. 그의 실체를 알고 있다 생각하는 이들조차 그의 실체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지만 저희는 아주 잘 알고 있죠. 그렇기에 그를 상대하려면 최소한의 전력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지?”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만천혈뢰 열 개, 만천금쇄폭뢰 한 개.”

삼령주의 태연한 대답에 궁도혁은 이번만큼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지금 그 미친 소리를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한 개인에게 그걸 모두 쏟아붓는다고!!!”

그런 반응을 예상했기에 삼령주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렇게 해도 잡을 수 있을지 미지수니까요.”

삼령주의 반응에 궁도혁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삼령주. 자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그 인간은 괴물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수준인데… 그런 놈과 적이 되어야 한다는 건가?”

“지금 무창에 그가 있습니다. 그것도 련주와 영애와 가까이 지내고 있는 걸로 파악이 되었죠. 련주와 영애를 배제하려면 그와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호위단의 보고에 교룡관의 하무백이라는 교관이 찾아와서 이 각 정도 함께 머물렀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하무백이 그 하무백일 줄이야.

“흐음…….”

수라가 되기로 굳게 마음먹었으나, 시작부터 엄청난 난관이 닥쳤다.

설마 그런 괴물이 형과 조카 편에 있을 줄이야.

고민해봐야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만천혈뢰 열 개도 쉬이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준비되면 그때 함께 주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삼령주가 사라지고, 궁도혁은 천천히 자신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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