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줄을 잘못 섰어
백색 서기가 옅어지면서 흐릿하게 하무백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옅어진 서기가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하무백의 머리 위.
상서로운 기운을 흩뿌리는 백색 구체가 자리했다.
백색 서기가 뭉친 것이다.
구체가 더 커지고 빛깔이 선명해질수록 하무백을 감싸고 있던 백색 서기는 옅어지고, 그의 모습도 명확히 보였다.
이윽고 백색 서기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백색 구체는 기운으로 화해 하무백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모든 기운이 하무백의 콧속으로 들어간 후.
후두두둑.
껍질이 벗겨지듯 하무백의 온몸의 피부가 벗겨져 떨어졌다.
“화, 환골탈태…….”
한설빙이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번쩍!
그때 하무백이 두 눈을 떴다.
두둑. 두두둑.
목을 이리저리 꺾어보고.
휘익. 휘익.
어깨를 앞뒤로 돌려본다.
“끙차.”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환골은 아니고 탈태만.”
하무백이 한설빙을 바라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미소는 싱그럽고 맑았다.
게다가 막 탈태한 덕인지 피부가 아기 피부처럼 뽀얗게 빛났다.
“재, 재수 없어.”
한설빙이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특히 자신보다 더 매끄럽고 맑은 피부가 재수 없었다.
그녀의 말에 피식 웃은 하무백이 위지군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부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벽도 넘었고요.”
위지군이 고개를 저었다.
“사부로서 당연히 할 일이다. 그보다 한 교관 덕이 컸다. 그녀가 진법을 펼치지 않았으면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낭패를 볼 뻔했어.”
위지군의 말에 한설빙의 어깨가 한껏 솟아올랐다.
의기양양한 표정도 지었다.
“고맙다. 한 교관. 덕분에 살았다.”
하무백이 그런 한설빙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예상치 못한 하무백의 진지한 모습에 한설빙은 살짝 당황했다.
“아, 뭐. 우리 사이에. 어려울 때는 도와야죠.”
살짝 시선을 돌리며 말하는 한설빙.
“하 교관. 성취를 감축하네.”
공손무외가 하무백에게 다가오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우리를 지켜줘서 정말 감사하네.”
포권을 취하며 깊숙이 숙이는 허리.
하무백은 그런 공손무외를 얼른 일으켰다.
“아닙니다.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무백의 말에 공손무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소유와 궁 련주를 치료해준 데다, 이제는 마교 놈들로부터 생명을 지켜주기까지 하지 않았나.”
하무백의 힘을 당할 수가 없었기에 몸은 일으켰지만, 여전히 공손무외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감당하기 힘듭니다. 곡주님.”
재차 하무백이 사양하니, 그제야 몸을 바로 하는 공손무외.
“장인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 교관님. 저 마교 놈들이 노린 것은 아마도 저와 소유였을 겁니다. 아무 상관 없는 하 교관님께서 저희를 지키기 위해 죽을 고비를 겪으셨으니,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궁무혁의 말에 하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저놈들이 저 정도로 준비하고 온 것은 오로지 저 때문입니다. 저를 잘 아는 놈이 있어서요. 그놈 때문이지 두 분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무백의 시선이 궁소유를 향했다.
“게다가 그놈을 끝장낸 건 소유 덕분이었죠.”
궁소유가 하무백에게 건네준 만천금쇄폭뢰.
그것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
그놈은 황급히 달려온 사부 위지군의 손에 죽었을지 모르지만.
그 사이 여기 있는 이들 모두가 삼령주의 손에 당했을 수도 있었다.
하무백이 물끄러미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여전히 덩그러니 놓인 가죽신이 있었다.
“쯧.”
가볍게 혀를 차는 하무백.
“일단 돌아가도록 하지요. 저 때문에 이렇게 계셨는데.”
하무백이 한설빙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한설빙의 안내에 따라 일행은 빙혼문쇄진의 생로를 따라 진 밖으로 나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면서 진법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진.”
한설빙의 간단한 중얼거림에 안개가 조금씩 흩어졌다.
그 사이 허공섭물로 쇠막대를 모두 회수하는 한설빙.
쇠막대가 사라지자 안개가 흩어지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이윽고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폐허.
“헉!”
“이, 이게 대체…….”
“뭐, 뭐야!?!”
사람들은 깜짝 놀라 경악성을 내지르기도,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전날만 하더라도 멀쩡히 있던 객잔의 별채가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폐허만 덩그러니 있지 않은가.
게다가 저 시체들은 무어란 말인가.
폭발에 휘말리지 않고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마교도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아,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이게 무슨 날벼락이냐고! 망했다. 망했어…….”
객잔의 주인으로 보이는 이가 눈앞에 드러난 폐허에 그대로 주저앉아 통곡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공손무외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하무백이 그의 팔을 붙잡고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때가 좋지 않습니다. 조용해지면 그때 찾아가시지요.”
하무백의 말에 작게 머리를 끄덕이는 공손무외.
이들은 조용히 자리를 옮겼다.
향한 곳은 무창 외곽의 객잔이었다.
외곽에 있는 탓인지 제법 너른 별채가 있었다.
“이런 외곽의 장원을 빌릴 걸 그랬나 보이.”
후회 어린 얼굴로 말하는 공손무외였다.
그렇다면 간밤과 같은 일이 있더라도 사람들의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었으리라.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입니다. 소유의 치료를 위해서는 그곳이 가장 좋았고요.”
하무백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요. 아버지. 그 객잔주에게는 충분히 보상해주면 될 거예요. 다행히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으니.”
그 말대로다.
피해라고 해도, 별채와 주변이 폐허로 변한 것이 전부였다.
이번 일에 휘말려 다치거나 죽은 이가 없었다.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한설빙이 물었다.
위지군과 하설란 역시 궁금함이 가득한 얼굴이다.
하무백은 궁무혁을 향해 물었다.
“뭡니까? 그 무시무시한 물건은.”
“만천금쇄폭뢰라는 겁니다. 만천혈뢰를 개선해서 제가 만든…….”
그와 함께 그에 관해 설명하는 궁무혁.
그 말을 들을수록 사람들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 위력을 온몸으로 겪은 하무백만이 담담한 신색을 유지했다.
한설빙이 하무백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걸 맨몸으로 맞고 살았다고요? 그것도 멀쩡히? 게다가 만천혈뢰 일곱 기의 폭발까지 더해졌는데?”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그래, 만천혈뢰 두 개까지는 이해를 한다.
이미 지난 전쟁에서 두 눈으로 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들은 건 도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거기에 더해서.
“그런데, 거기서 더 강해졌다고??”
그랬다.
깨어날 때 벽을 넘었다 하지 않았는가.
이건 괴물도 아니다.
그것을 넘어선 미지의 무언가.
한설빙은 대체 무어라 칭해야 할지 적당한 말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어떤 눈이요?”
하무백의 핀잔에 되묻는 한설빙.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지극히 위험한 어떤 것을 보는 듯한 눈.”
하무백의 대답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으니까… 온몸의 내공을 몽땅 끌어 쓰고도 모자라서 혈맥에 숨어 있는 것까지 죄다 끌어 써서 겨우겨우 살아남은 거야. 화염이 조금만 더 이어졌어도 난 죽었어. 진짜로 간발의 차이였다.”
그때를 떠올린 것인지 하무백이 살짝 몸을 떨었다.
“그 상태로 남은 놈들을 다 처리하시고요?”
“잠깐잠깐 내공을 회복할 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진짜. 마지막에 만천금쇄폭뢰 쏘는 걸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쥐어짰어.”
“그 말대로 내가 도착했을 때, 무백이의 단전은 깨지려 하고 있었네. 이미 잔뜩 금이 가서는 깨진다면 한순간에 와장창 산산조각 날 것만 같은 상태였지.”
위지군이 자신이 확인한 하무백의 상태를 말했다.
갑자기 다들 말이 없었다.
죽을 뻔했다는 말보다, 저렇게 구체적인 상태를 들으니 얼마나 위급한 상황이었는지 체감이 되었기 때문이다.
“허허. 보고 듣고도 믿을 수가 없군요. 단전에 금이 갔었는데 회복했다니…….”
공손무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귀인의 말씀이시니 당연히 전부 사실이겠지만, 의원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제 짧은 지식으로는 단전에 금이 갔다 하면. 그것으로 끝인데 말입니다. 과연 귀인과 하 교관님은 남다르시군요.”
찬탄과 경이가 함께 섞여 있는 말이었다.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곡주. 제가 알고 있기로도 단전에 금이 갔다 하면… 끝인데. 저 녀석은 이렇게 되는군요.”
위지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것이… 아마 벽을 넘으면서 가능해진 것 같습니다. 사문의 내공 심법에 이런 공능이 있는 줄은 저도 처음 알았고요. 정말 저는 죽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무백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래서. 그럼 이제 얼마나 강해진 거죠?”
한설빙의 질문.
“그게. 글쎄. 생각을 안 해봐서…….”
그리고는 두 눈을 감고 자신의 내부를 관조하는 하무백. 잠시 후 눈을 떴다.
“음. 이건 대략적인 추측이긴 한데… 만천금쇄폭뢰를 동시에 세 발 정도까지는 버틸 듯한데?”
확 와닿는 표현.
그 말에 궁씨 부녀와 공손씨 부녀는 입을 쩍 벌렸다.
만천금쇄폭뢰의 위력을 두 눈으로 본 사람들이기에.
“그, 그걸 세 개를 동시에 버틸 수 있다고요?”
한설빙이 살짝 더듬거리며 물었다.
가까이에서 직접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교룡관에서 승천하는 화룡을 보지 않았던가.
하무백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그건 뭐였을까?”
이른 아침 당진산이 연무장에서 몸을 풀며 말했다.
“글쎄.”
백리평이 고개를 저었다.
깊은 밤.
갑자기 무창을 요란하게 떨어 울렸던 폭음.
그 소리에 잠에서 깼고 다들 폭음이 들린 곳을 찾았다.
연이어 솟구치는 화염의 불길에 이러진 화룡의 승천.
압도적인 모습이었기에 감히 그곳에 가보겠다고 생각조차 못 했다.
“교관님은 아시려나…….”
단목운뢰가 중얼거릴 때, 주우명이 걸어왔다.
“응?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당진산이 그를 발견하고 물었다.
“우리 조 연무장에 아무도 없어.”
주우명이 짧게 답했다.
“응? 한 교관님이랑 설란이? 그럴 리가?”
당진산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지금도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불성실한 자신들의 교관과는 달리 이십 조의 교관과 생도들은 성실했으니.
당연히 벌써 연무장에 나와서 수련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나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혹시나 해서 여기에 와봤는데. 안 계시네. 너희도 모르지?”
주우명의 물음에 다들 어깨를 으쓱했다.
“하 교관님은?”
주우명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이게 일상이라.”
연하민의 짧은 대답.
“혹시 간밤의 그 일이랑 연관이 있는 건가…….”
낙우진이 혼자 중얼거리자, 다른 생도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으응? 뭐? 왜?”
갑작스러운 주목에 깜짝 놀란 낙우진.
“아니. 그럴듯하게 들려서.”
당진산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생도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면 확인해 봐야겠지?”
“뭘?”
단목운뢰의 물음에 당진산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사건이 벌어진 곳이지!”
“수련은?”
“어차피 자율 학습일 텐데. 이렇게 빼먹는 재미도 있어야지.”
그 말을 하며 한쪽 담장을 향해 달려가는 당진산이다.
“그쪽은 담장이야!”
단목운뢰의 외침에.
“외출증 없잖아. 요령껏 나가야지!”
돌아온 당진산의 대답.
남은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그 뒤를 따랐다.
착잡한 눈으로 서리 안개가 낀 광경을 바라보던 사내.
그는 조용히 인파를 헤치고 무창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조용히 전서응을 날려 보냈다.
“피바람이 불겠군. 줄을 잘못 섰어. 젠장!”
멀어지는 전서응을 바라보던 그는 등을 돌려 땅을 박찼다.
그가 향하는 방향은 천중산과 정반대 방향으로 무창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쪽이었다.
다시는 이쪽으로는 오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