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치밀하구만. 자네
“오지 않는군.”
악양루 삼 층.
가장 전망이 좋은 창가에 앉아 동정호의 풍광을 즐기며 홀로 술잔을 기울이던 노인이 작게 중얼거렸다.
삼령주가 말했던 결행일이 사흘 전이었다.
그 사이 무창에서 들려온 풍문도 확인했다.
깊은 밤 화룡 두 마리가 어둠을 뚫고 승천했다던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
노인의 입가에 쓴웃음이 맺혔다.
조금 있으면 약속했던 사흘의 시간이 끝난다.
그때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으면 실패한 것이리라.
노인은 아무도 앉지 않은 맞은편 자리에 빈 술잔을 두었다.
쪼르르.
술을 따라 잔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그래. 역시 실패로군. 삼령주, 좋은 곳으로 가시게나.”
노인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미련 없이 악양루를 떠나 자취를 감췄다.
전서응은 만물련의 후원에 내려앉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깊은 숲.
매일 같은 시간에 이곳에 오는 궁도혁이 전서응을 발견했다.
“일이 끝난 건가?”
삼령주에게도 알리지 않고 심어둔 사람이다.
무창은 교룡관 덕에 무림인이 많은 도시.
자신의 밀정 하나쯤 숨기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에게 은밀한 명령을 내려둔 상태였다.
궁무혁이 머무르는 객잔을 멀리서 감시하다가 변고가 생기면 연락하라고.
궁도혁이 팔을 들어 올리며 휘파람을 불자 전서응이 힐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날개를 크게 펼쳐 훌쩍 날아오르더니 궁도혁이 들어 올린 팔에 앉았다.
날카로운 발톱이 옷자락을 찢고 살을 파고들려 했으나, 호신강기로 보호하고 있는 팔은 멀쩡했다.
다리의 작은 통에서 서신을 꺼냈다.
<실패. 련주를 습격했던 이들은 전멸했으며 련주는 무사. 련에 피바람이 불듯. 몸 보중하시길.>
짤막한 내용이지만 궁도혁이 눈살을 찌푸리기에는 충분한 소식을 담고 있었다.
마지막 ‘보중하시길’이라는 부분에 시선을 멈춘 궁도혁.
“훗. 살길 찾아 련을 떠나겠다는 거냐?”
그 의도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실 자신과 운명을 같이할 생각이었으면 전서응을 날릴 게 아니라 직접 달려왔으리라.
궁도혁은 전멸이라는 두 글자를 다시 보았다.
‘과연 삼령주가 그렇게 두려움에 떨 만한 상대였단 건가…….’
그런 그가 하무백에 대해 말할 때는 극심한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게 준비해간 만천혈뢰 열 기와 만천금쇄폭뢰 한 기.
“그걸로도 부족했던 건가.”
불신 가득한 중얼거림을 작게 읊조렸다.
만천금쇄폭뢰의 위력은 천하에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제품의 시험 발사를 직접 보았으니까.
본 순간 공포와 전율을 동시에 느꼈다.
이것은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될 병기라는 생각과 만물련을 천하제일문으로 만들어줄 병기라는 생각.
형은 전자만을 느꼈는지 그 후 만천금쇄폭뢰를 봉인했지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그것을 사용하고도 이기지 못할 상대라니.
“준비해야겠군.”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짙은 피 냄새 역시.
***
11월도 며칠이 지난 날.
일전의 비가 곧 겨울이 도착함을 알리는 것이었던가.
이제는 겨울이 오고 있다고 해도 좋을 날씨다.
“어휴. 춥다.”
낙우진이 양팔을 붙잡고 연무장으로 오며 중얼거렸다.
“어이. 무창은 그래도 따뜻한 곳이야. 이 정도로 춥다고 하면 안 되지.”
당진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무어라 반박하려던 낙우진은 그의 집이 사천성 성도인 것을 떠올리고는 입을 닫았다.
여름에는 미칠 듯이 덥고, 겨울에는 죽을 듯이 추운 땅이었으니.
이제 동투제가 한 달 조금 넘게 남았다.
연무장에 나오는 생도들의 눈빛이 점점 진지해지고 있었다.
“교관님은?”
낙우진의 물음에 당진산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저기.”
하무백은 여전히 본인의 지정석인 바위 위에 비스듬히 기대서 누워있었다.
차디찬 바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누워있는 하무백.
‘차갑지도 않으신가?’
그 모습을 보고 낙우진이 떠올린 생각이다.
낙우진은 무창보다 더 따뜻한 지역에서 살다가 왔기에, 무창에서 맞는 첫 추위가 제법 힘겨웠던 탓이다.
하무백은 생도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하무백은 그날 새로운 객잔에서 궁무혁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곱씹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 동생이 일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동생이 일을 저지르다니.
“호위단주가 죽기 전 제게 전음으로 남긴 말이, 운열을 호위단에 추천한 게 제 동생이라고.”
“운열이라면 그 배신자 말씀입니까?”
하무백이 그 이름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가 호위단에 들어온 것은 이 년도 더 전의 일입니다. 동생은 그때부터 만일을 준비하고 있었네요.”
깊은 한숨을 내쉬는 궁무혁의 얼굴은 어두웠다.
“련주, 그것만으로 그리 단정하는 것은… 부련주도 속았을 수 있지 않은가?”
공손무외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나 궁무혁은 고개를 저었다.
“만천금쇄폭뢰. 그것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이 녀석입니다. 제가 두 기, 그리고 도혁이 녀석이 한 기.”
아무도 말이 없었다.
“마교 놈들이 제 동생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애초에 죽을 위기에 사용하라고 준 것이니, 그것이 남아 있을 리도 없지요.”
자조적인 목소리다.
그로서도 이것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를 일인 듯.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하무백이 물었다.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흉수는 특정되었으나, 그 흉수를 어찌할지 정하지를 못한 상황.
‘내가 당한 것만 생각하면 당장 찢어 죽여야 하지만…….’
뿌득.
하무백이 이를 갈았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생도들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지만, 하무백은 여전히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어찌한다.’
쉬이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만물련 내부의 일이었고, 자신은 지난 전쟁에서 만물련에게 진 빚이 있다 여기고 있으니까.
이번 일도 그 빚을 갚는 과정에서 부딪힌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지. 최소한 양쪽 팔 정도는.’
정말로 죽을 뻔했다.
그놈이 삼령주에게 주었던 화기 아니 병기 때문에.
설란이만 혼자 남겨두고 떠날 뻔했다.
이것이 하무백이 조용히 분노하는 까닭이었다.
지난 두 번의 전쟁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동생 하설란 아니던가.
궁무혁이 련의 내분을 정리하기 위해 동생을 처단한다는 결정을 내린다면야, 한손 거들 생각이다.
자신의 복수도 겸해서.
하지만 혈육의 정으로 그냥 덮겠다 한다면.
그때는 혼자서 만물련을 찾을 생각이었다.
최소한 받은 것은 돌려줘야 한다.
그것이 하무백이 출도를 한 후 살아온 방식이다.
그리 마음먹는 순간 은은한 살기가 주변으로 파장을 이루며 퍼져나갔다.
갑작스러운 섬뜩한 기분에 생도들은 일제히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느꼈다.
‘이런.’
하무백은 서둘러 살기를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모르쇠를 시전.
생도들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수련에 매진했다.
동투제라는 훌륭한 동기가 있었기에 알아서들 열심히 하는 중이다.
‘후우. 아직 적응을 더 해야겠군.’
갑자기 몇 배 이상 강해졌다.
하여 감각이 아직 강해진 현재의 상태에 적응을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전처럼 예기치 못하게 살기를 흘리기도 하는 것이다.
예전이라면 조금도 새어나가지 않았을 것을 미처 제어를 못 한 것이다.
“흐음.”
작게 흘리는 침음.
“당분간은 일단 이걸 먼저 해결해야겠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작게 중얼거린 하무백.
일단 만물련의 일은 한쪽으로 미뤄두었다.
***
“결정은 내렸는가?”
이른 아침 별채 앞 마당에서 찬 공기를 쐬고 있는 궁무혁을 발견한 공손무외가 물었다.
“네. 장인어른.”
의외로 담담하게 대답하는 궁무혁.
“어찌하려고?”
“혈육이라 하나, 문파의 법도는 엄정합니다. 하극상을 저질렀으니 그에 맞는 대가를 치러야지요.”
“증거는?”
공손무외의 말에 궁무혁은 품에서 작은 원통 두 개를 꺼내 들었다.
“그건?”
“만천금쇄폭뢰의 신관이 있는 발사통입니다.”
“아.”
그제야 공손무외는 폐허를 다시 찾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객잔 주인에게 공손무외가 충분한 배상을 해주었다.
같은 별채를 네 개는 지을 수 있는 돈이었으니.
객잔주로서도 손해는 아니었다.
물론 주변을 정리하고 다시 별채를 짓는 데 그만한 시간과 품이 들겠지만, 공손무외는 그것을 고려하여 네 배의 셈을 치렀다.
그때 함께 갔던 궁무혁이 객잔주에게 무언가를 물으며 찾는 듯하더니.
“그걸 찾으러 함께 갔던 거였나?”
“네. 장인어른. 그날 저녁 흥분을 가라앉히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다가 떠올랐습니다. 도혁이 녀석에게 죄를 물으려면 증거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발사통이라면 그 폭발에도 남아 있을 거라는 생각에, 폐허를 정리하기 전에 뒤져볼 생각에 간 겁니다.”
“부지런한 객잔주였지.”
두 사람이 객잔주를 다시 찾은 것은 그곳을 빠져나온 바로 다음 날이었다.
만 하루 만에 다시 찾았는데, 폐허는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시체는 찾을 수가 없었으니.
게다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 모든 것을 객잔주가 모아서 정리해뒀었다.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가죽신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금속 원통 하나도.
다른 하나는 하무백이 발사한 것으로 그날 그로부터 돌려받았었다.
“헌데 그 발사통으로 어찌하려고 그러는가? 그게 증거가 되겠는가?”
“이걸 소유한 사람은 두 사람, 저와 도혁입니다. 개수는 모두 세 기. 물론 비고에서 도둑맞은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만, 가장 깊숙한 비고 안의 밀실에 보관한 것인지라.”
“그것은 불가능하군.”
공손무외가 답했다.
궁무혁의 부탁으로 선유곡에서 만물련의 비고에 모종의 조치를 취한 탓이다.
“거기에 더해, 이곳에.”
궁무혁이 한 곳을 가리켰다.
발사 단추를 누르기 위해서는 완벽히 손바닥에 가려지는 부분이었다.
“내공을 조금만 주입해 주십시오.”
공손무외는 부탁대로 아주 작은 내공을 흘렸다.
그러자 그 부분에서 옅은 빛이 나며 글자가 떠올랐다.
도혁.
궁도혁의 이름이었다.
다른 발사통은.
소유.
궁소유의 이름이 떠올랐다.
“애초에 줄 사람을 염두에 두고 표식을 숨기고 만든 겁니다.”
“허, 허허. 치밀하구먼. 자네.”
공손무외가 헛웃음을 흘렸다.
궁무혁은 그저 담담한 신색을 유지할 뿐이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건강해져야 합니다. 지금 이 꼴로는 아무것도 못 할 듯합니다.”
그 말을 할 때야 궁무혁의 얼굴에 감정이 떠올랐다.
울분이었다.
자신의 몸이 약해서, 거기에 더해 딸까지 몸이 약했기에 동생이 역심을 품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 우선 치료에 집중하세나. 시간은 많으니. 게다가 하 교관의 기색을 보아하니,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으니.”
공손무외의 말에 궁무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무백의 치료로 몸이 완전히 회복되는 날, 만물련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동생은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