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좀 과했나보군
기관진식에 있어서 중원 최고라고 자부하는 곳이 만물련이다.
그런 만물련의 비고에 설치된 기관진식에 술법이 가미되어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건 분명 궁무혁의 짓이리라.
그의 처가는 의술과 술법에 있어 천하제일인 선유곡.
분명 자신 모르게 처가의 도움으로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다.
확인해야 했다.
궁도혁은 거칠게 비고를 걸어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련주의 집무실.
부련주이지만 현재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곳이다.
깊숙한 벽 한 곳에 서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는 서가가 잔뜩 있었다.
순서에 따라 은밀한 곳의 장치를 몇 가지 조작하자.
드르륵.
서가 한 곳이 밀려나며 비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련주의 집무실에 별도로 만들어둔 밀실.
오직 련주와 궁도혁만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안에는 잘 정리된 서류가 가득했다.
궁도혁이 들어가 장치를 조작하자 다시 서가가 움직이며 감쪽같이 공간이 가려졌다.
궁도혁은 내부의 서류를 찬찬히 살폈다.
목록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둔 이가 궁무혁과 궁도혁이었기에, 목표하는 것은 금세 찾았다.
만물비고 설계도.
역시 여기에 술법에 대한 내용은 빠져 있었다.
궁무혁이 추후에 은밀히 적용한 것이 확실했다.
“궁무혁. 이 빌어먹을 새끼.”
궁도혁은 이제 궁무혁을 형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술법을 제외하면, 비고의 기관장치에 대한 모든 것이 설계도에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찾아야 한다. 열 수 없으면 뚫어야지. 어딜 뚫어야 할지 찾아야 해.”
문을 부수려 하면 무조건 무너지게 설계된 비고다.
하지만 사람이 드나들 구멍을 뚫는 정도는 다를 수도 있기에.
궁도혁은 비고의 자폭장치를 피해 비고의 문에 구멍을 내서 진입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설계도를 보면서 복잡한 계산을 하는 그의 눈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정말로 필사적이었다.
비고에 보관된 나머지 만천금쇄폭뢰.
그것만이 자신의 생명줄이었다.
무창에서는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면 이대로 도주하면 될 일.
그러나 궁도혁은 도무지 만물련주라는 자리에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권력의 맛은 이토록 치명적인 것이었다.
***
두 강기가 충돌한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검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충격파가 두 사람을 덮쳤다.
전신을 두드리는 거력.
그러나 두 사람은 더욱 앞으로 나아갔다.
상대의 검을 박살내겠다는 기세로 밀어붙이는 검강.
충격파는 호신강기를 최대한 끌어올려 흘려보냈다.
팽팽하게 부푼 옷은 펄럭이다 못해 여기저기 찢어졌다.
그럼에도 서로를 향해 전력을 다하는 사부와 제자.
맑은 청색의 검강이 조금씩 묵빛 검강을 밀어붙인다 싶은 순간.
파핫!!!!
하무백의 전신에서 백색 강기가 터져 나왔다.
무형의 호신강기에 백색 강기를 덧씌운 것.
그와 동시에 두 검강의 격돌에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던 충격파가 오롯이 위지군에게로 집중되었다.
“이익.”
악다문 입술에서 피가 흐른다 싶은 순간.
콰아아아앙!
다시 한번 굉음이 울리고 위지군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리고 강기는 모두 사라졌다.
언제 그런 폭풍이 휘몰아쳤냐는 듯 순식간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쿨럭.”
갑작스러운 적막을 뚫고 위지군이 피를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님!”
하무백이 황급히 사부에게로 달려갔다.
“별것 아니다. 놀라기는.”
위지군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어찌 놀라지 않을까.
자신과의 대련에서 사부가 피를 토했는데.
“네가 당한 꼴에 비하면 이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단전은 멀쩡하고 혈맥이 좀 놀란 정도니. 요상단 하나 먹고 잠시 운공하면 괜찮을 거다.”
그러면서 품에서 주섬주섬 단환 하나를 꺼내 먹고는 바로 가부좌를 틀고 운공요상에 들어가는 위지군.
실제로 하무백은 요상단 같은 것을 쓸 여유도 없을 정도로 급박한 상태였었다.
하무백은 사부의 곁에 섰다.
아무도 없는 곳이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기에.
하무백의 기감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
콰아아아앙!
떨림이 잦아든다 싶더니 다시 한번 터지는 굉음!
숙소 건물이 거칠게 떨렸다.
“흐익!”
한설빙이 놀라서 비명을 터트리려는 찰나.
고요가 찾아왔다.
조금 전까지 은은하게 느껴지던 진동과 떨림이 씻은 듯 사라진 것.
“끄, 끝난 건가?”
한설빙이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것 같아요.”
하설란의 대답.
“후아. 살았다. 난 정말이지. 지진만큼은 너무 무서워.”
“후훗. 너무 의외시라 깜짝 놀랐어요.”
하설란의 웃음에 한설빙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란이 네가 지진을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 그래. 자연에게 자비란 없지. 어렸을 때 정말로 죽을 뻔했었으니까… 그러고 보니 중원에 와서 지진을 겪는 건 처음이네.”
한설빙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그. 어쩌면 지진이 아닐지도 몰라요.”
“뭐? 이게? 지진이 아니라고?”
한설빙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뭔가 느낌이 그래요. 한번 가보실래요?”
하설란의 말에 한설빙이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지진이 일어난 곳을 가보자고?”
“음. 아닌 거 같아서요. 무언가 익숙한 느낌이 있어서. 그런데 제법 거리가 있어서 지금 제 실력으로 가는 건 무리 같아요.”
하설란의 말에 한설빙은 잠시 고민했다.
느낌이라고 했지만, 하설란은 지진이 아니라고 확신하는 듯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호기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이게 지진이 아니면 대체 뭘까?
애초에 이 호기심 때문에 빙천궁이 위치한 북해를 벗어나 중원에 들어왔다가, 코가 꿰어 두 번의 전쟁까지 치른 것이 아니던가.
신진팔문의 하나인 빙천궁이었기에 혈교와 마교와의 전쟁에 힘을 보태긴 하였으나, 그녀까지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놈의 호기심이 문제였다.
“…가볼까? 어딘지 알겠어?”
슬그머니 묻는 한설빙. 하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깊은 밤, 교룡관을 나와 북쪽으로 달렸다.
빙천월영비(氷天月影飛).
하설란을 업은 한설빙이 빙천궁의 독문신법을 극성으로 펼치며 땅을 박차고 날듯이 달렸다.
주변의 풍광이 휙휙 지나갔다.
세찬 바람이 하설란의 얼굴을 두드렸다.
“이쪽이야?”
“네!”
한설빙의 물음에 하설란이 방향을 잡아 주었다.
느낌이 오는 곳으로 곧장 직진.
그렇게 한참을 땅을 박차 어느 이름 없는 야산에 도착했다.
하무백의 눈썹이 꿈틀했다.
무창성에서부터 자신들을 향해 접근해 오는 기척이 두 개 있었기에.
그 기척이 너무나 익숙했다.
‘여기는 대체 왜?’
그런 의문이 떠올랐으나, 기다리면 알 일이다.
그 방향이 너무도 명확히 자신을 향하고 있었으니.
사부님의 운공요상이 끝나는 것이 먼저일까, 저들이 도착하는 것이 먼저일까.
한 시진이 흘렀다.
사부는 여전히 운공 삼매경에 빠져 있으셨다.
별것 아니라고 하셨지만,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
정말 별 게 아니라면 벌써 운공요상을 끝내셔야 했을 테니까.
그 사이 두 기척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 이게 다 뭐예요, 단주님!”
경악에 찬 한설빙의 목소리.
“역시 오라버니였네요.”
그리고 자신이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하는 하설란의 목소리.
“응? 그게 무슨 말이냐? 역시라니?”
하무백이 하설란을 보며 물었다.
“그냥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요.”
하설란의 대답에 하무백은 심유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설빙조차 느끼지 못한 것을 그녀가 느꼈다니.
그녀에게 무언가 변화가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단주! 이게 대체 뭐냐니까요?”
한설빙이 재차 물었다.
그녀가 질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지만, 또 묘하게 익숙했다.
불과 얼마 전에 이 비슷한 폐허를 보지 않았던가.
“만천금쇄폭뢰라고 했던가… 그게 더 있었던 거예요?”
한설빙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건 대체…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거죠?”
한설빙이 운공요상에 빠져 있는 위지군과 그 옆의 하무백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쩌다 보니.”
하무백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오라버니. 사부님은 왜 저러신 거예요? 괜찮으신 거예요?”
하설란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실 거다. 대련 중에 조금 무리하셔서.”
하무백의 대답에 한설빙이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저 대답에서 이 폐허가 만들어진 연유를 추측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폐허가 두 분의 대련 때문이라고요? 그 굉음이? 그 지진이?”
경악을 넘어 불신과 두려움까지 깃든 눈빛으로 한설빙이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지진? 무창에는 그 정도까지 영향이 있었던 거냐?”
하무백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물었다.
“지진까지는 아니고, 진동이 좀 있었어요.”
하설란의 대답.
“좀 과했나 보군.”
한설빙은 더 놀랄 기운도 없다는 듯 지친 얼굴로 하무백을 보았다.
그때.
위지군에게서 변화가 일었다.
은은한 빛무리가 그를 감싼 것이다.
“오라버니! 저, 저건…….”
비슷한 것을 바로 얼마 전에 보지 않았던가.
“쉿.”
하무백의 제지에 하설란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한설빙 역시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운공요상이 좀 오래 걸린다 싶더니.’
사부도 오랜 세월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벽 너머를 바라보고 계시는 중이었다.
***
하루를 꼬박 밀실에 있었다.
어느 정도 분석과 계산이 끝났다.
어쩌면, 구멍을 뚫을 자리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그래도 이제는 나가야 할 때다.
만나야 할 이가 있으니.
무창의 움직임을 알아야 했다.
궁도혁은 기관을 움직여 밀실 밖으로 나왔다.
시뻘겋게 충혈된 눈.
피로가 가득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꼭 가야 했다.
적당한 면구를 얼굴에 쓰고 위장을 한 후, 만물련을 벗어났다.
조금 내려와 천중산 초입에 다다르자 제법 커다란 마을이 나타났다.
오로지 만물련 때문에 만들어진 마을이다.
만물련에 거래하러 오는 수많은 상인과 문파들이 머무르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곳.
궁도혁은 그중 한 객잔으로 들어갔다.
아무 자리에나 앉아 죽엽청을 한 병 주문했다.
술이 무척이나 고팠다.
닭고기구이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노라니, 한 노인이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낮술은 몸을 망치는 지름길이오만. 더군다나 자작이라… 더더욱 해롭지.”
궁도혁은 갑자기 나타난 노인을 힐끔 바라보았다.
왼쪽 팔목에 감긴 푸른 수실.
자신의 오른쪽 팔목에 감긴 것과 같은 것이었다.
약속한 이였다.
“초면에 무례하군.”
다시 잔을 채우며 궁도혁이 말했다.
“이렇게 술이나 마실 때가 아니오만?”
노인의 말에 궁도혁이 기막을 주변에 둘렀다.
“무창은 어떻지?”
“화룡승천지라나? 요상한 이름이 붙었더구만. 다만, 무창은 우리도 자세히 들여다볼 수가 없다오.”
노인의 말에 궁도혁이 인상을 썼다. 이들이 볼 수 없다면 누가 무창을 살필 수 있단 말인가.
안 그래도 이번 의뢰에 들인 돈이 얼마인데.
마지막 전서응을 끝으로 그놈이 떠나지만 않았어도 의뢰 따위 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무창에 심어놓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이들이라도 이용할 수밖에.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를 탐탁지 않아 하는 이가 있어서 말이오. 두어 번 안 좋게 엮이는 바람에 조심하는 중이라오.”
“그런데?”
“부탁한 일이 하필이면 그자와 연관이 되어 있어서 말이외다.”
궁도혁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뭐, 덕분에 그가 얼마나 대단한 괴물인지 새로이 알았기에 이렇게 나온 거요. 궁무혁. 그 사람은 무사하고, 아무래도 하무백 그 괴물과는 각별한 사이인 것 같소. 살고 싶다면 최대한 멀리 달아나시오.”
“이봐. 내가 이딴 소리나 듣자고 그 많은 돈을 사용한 줄 아는가?”
턱.
노인은 돈주머니를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옛소. 동전 하나 빼지 않았소이다. 이 돈 들고 멀리 달아나시오. 그것만이 살길이오. 하무백 그자가 원한에 있어서는 얼마나 집요한지 우리는 잘 알지. 그가 상당한 낭패를 봤을 것으로 추측하는데. 그러면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요.”
노인의 말에 궁도혁은 이를 악물었다.
저딴 말이나 듣자고 의뢰한 것이 아니거늘.
“아직은 움직임이 없는 듯하니, 기회는 지금 밖에 없을 거요. 우리도 하무백 그자 근처로는 접근을 할 수가 없기에 자세히 알 수는 없소만. 그럼 무사하길 빌겠소이다.”
노인은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홀로 남은 궁도혁.
“하오문 이 개새끼들이…….”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