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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무공교관-119화 (119/312)

119화. 전부 쓸겐가?

위지군을 감싼 빛무리는 하무백의 그것과는 달랐다.

새하얀 순백의 서기가 가득했던 하무백과 달리 은은한 청색의 빛무리였다.

부드럽게 위지군을 감쌌던 빛무리가 서서히 그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하무백과 같이 피부가 떨어져 나오지는 않았다.

대신 얼굴의 주름이 펴지면서 옅어졌다. 본래도 주름이 적었던 얼굴이었기에, 이제는 중년이라 해도 믿을 외모였다.

새하얀 머리칼과 수염만 아니라면 말이다.

서서히 뜨이는 눈.

“축하드립니다. 사부님.”

“축하드려요! 사부님!”

하무백과 하설란의 인사에 위지군은 부드러운 미소를 주었다.

“네 수련을 도와주려다가 내가 벽을 넘었구나. 완전히 넘지는 못 했다만. 허허.”

“어르신.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한 교관.”

한설빙의 인사에 위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는 어떠냐? 끝을 보았느냐?”

“네. 사부님께서 배려해주신 덕분입니다.”

하무백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한설빙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를 완전히 박살을 냈는데, 단주님이 전력을 다하면 이 정도라는 거지요?”

“아니. 전력을 다한 건 아니고. 그래도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았지.”

담담하게 대답하는 하무백.

어이가 없다는 눈빛의 한설빙.

“어떠냐? 한 번 더 해볼 터이냐?”

위지군이 은근한 웃음을 담아 물었다.

“아닙니다. 이제 충분합니다. 어느새 감각의 오차도 모두 보정이 되었군요.”

“그래. 사실 나도 늙은 몸으로 더 이상 무리하기는 싫었다.”

젊어진 외모로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하는 위지군.

그의 말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보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그런 느낌이 들었다는 건 뭐고?”

하무백의 질문이 한설빙과 하설란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란이가 가자고 했어요. 익숙한 느낌이라고.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어디 한번 손을 이리 내보거라.”

위지군의 말에 하설란은 왼쪽 손목을 내밀었다.

가만히 맥문을 쥐고 눈을 감은 위지군.

그렇게 하설란의 내부를 살피기를 잠시.

눈을 뜬 그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하설란을 바라보았다.

“너희 남매는 정말이지…….”

“뭐, 뭐가 잘못된 것인가요?”

살짝 겁을 먹은 얼굴로 하설란이 물었다.

“아니다. 아니야. 기감을 타고났구나. 칠음절맥에 가려져서 지금껏 모르다가 이제야 씨앗이 껍질을 까고 싹을 틔웠어. 아마도 지난번 무백이가 벽을 넘는 광경을 본 게 계기가 아닐까 싶구나.”

하설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으니.

“기감을 타고 났다고요?”

“네 눈과 비슷하면서 또 다른 자질이야.”

하무백의 물음에 위지군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기감을 다루는 법을 익히면 아마 지금의 너보다 훨씬 넓은 범위까지 읽을 수 있을 게야.”

그 말에 하무백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현재 하무백이 기감을 넓혀 감지할 수 있는 범위는 엄청나게 넓었다.

교룡관에서라면, 이제는 동정호 근처까지 감각을 넓힐 수 있었다.

벽을 넘은 이후의 일이지만, 그리고 그 정도까지 기감을 확장하려면 제법 무리해야 하지만.

헌데 무공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설란이 그 범위 이상으로 기감을 펼칠 수 있다고?

하무백은 쉬이 믿을 수가 없었다.

기감을 펼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믿지 못하는 게로구나. 교룡관에서 이곳의 기운을 읽고 왔다지 않느냐. 그리고 네 눈 같은 경우도 있는데, 란이와 같은 경우가 없겠느냐.”

사부의 말에 그제야 하무백은 새삼스럽다는 듯 동생을 바라보았다.

“저, 그러니까. 기감만 따지면 란이가 단주님보다 위라는?”

한설빙이 조심스레 물었다.

하무백과 위지군이 동시에 머리를 끄덕이자, 한설빙은 이제 놀라기도 지친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지진을 일으키는 사부와 제자에,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거리를 뛰어넘어 기운을 느끼는 감각을 지닌 생도.

이 세 사제들은 대체 어떤 존재일까.

역시 중원은 넓고 기인이사는 많았다.

아니, 애초에 이 어르신은 본궁의 정보망에 전혀 없던 이였다.

하무백도 물론이거니와.

이런 것이 중원의 저력일까.

빙천궁이 새외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일까.

그런 복잡한 생각이 한설빙의 머리에 떠올랐다.

춥고 척박하고 메마르고 얼어붙은 땅, 북해.

기름진 중원에 와보고 생각했다.

빙천궁이 언제까지나 북해에만 있을 수는 없다고.

언젠가는 중원의 끝자락 어느 곳까지라도 진출해야 한다고.

정파라고, 정천맹의 한 자락에 이름을 올리고 두 번의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백도회는 빙천궁이 새외문파라는 이유만으로 견제했다.

그것이 빙천궁이 신진팔문의 한 축으로 합류한 이유였다.

“갑자기 왜 그렇게 심각해져?”

하무백이 한설빙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아, 아니에요.”

한설빙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제, 이만 돌아가자꾸나.”

위지군의 말에, 하무백이 하설란을 업었다.

***

“이제 끝인가 보군.”

범일소가 찡그렸던 인상을 풀며 중얼거렸다.

대체 뭐였을까?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그의 표정이 곱지 않았다.

무창성의 외곽 끝자락에 버려진 장원.

범일소가 이곳을 찾은 것은 우연이었다.

어이없는 패배에 넋을 잃고 무창성을 배회하면서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도착한 곳이다.

폐가나 다름없기에 으스스한 기운마저 서려 있는 곳이건만, 범일소는 끌리듯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곳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이다.

추운 겨울 아무것도 없는 길바닥보다는 이런 폐가가 훨씬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폐가든 뭐든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

다른 이들은 으스스하고 기분 나쁜 폐장원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범일소는 왠지 모르게 이곳에서 따뜻함을 느꼈다.

검을 뽑아 한바탕 검무를 추고 나니 어느 정도 제정신이 돌아왔다.

늦은 밤, 홀로 이곳에서 수련하는 것은 천검파에 다녀온 뒤 생긴 일과였다.

외출증 없이 몰래 교룡관을 나오는 것이었기에 주로 평상복을 입었고, 교룡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다양한 경로를 찾았다.

그중 하반기 시작 즈음 알게 된 길이 싸구려 유흥가를 지나는 길이었다.

그곳은 온갖 사람들이 뒤섞인 곳이라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쉬웠기에, 그 뒤로는 주로 그 길을 이용했다.

오늘같이 외출증을 제대로 받고, 관복을 입은 날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수련 삼매경에 빠져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땅의 진동에 쓰러질 듯한 장원의 건물 곳곳에서 흙먼지가 날렸다.

제대로 방위를 밟을 수 없었기에 잠시 수련을 멈췄다.

자정이 멀지 않은 듯했다.

아쉽지만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좀 전의 지진 비슷한 진동에 괜히 짜증이 났다.

소중한 수련 시간을 까먹다니.

외출증을 받으면 이것이 번거로웠다.

자정까지 복귀하지 않은 생도를 기록하게 되니까.

교관과 함께 움직여 외출증 없이 밖으로 나왔다면 몰라도.

외출증을 받은 이상 기록이 남아 있다.

“상관없나? 이미 불성실하다고 대사형에게 찍힌 거, 아예 미복귀까지 질러볼까?”

강렬한 유혹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앞에서는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며 숨어서 이렇게 전력을 다해 수련하는 모습.

이것이 범일소였다.

그가 이리된 것은 오래지 않은 일이다.

하투제 이후.

맹룡대에게 패하고, 단목운뢰에게 패한 후, 사문에 돌아갔을 때 그 모멸감은 이후 말할 수 없었다.

모두가 경멸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때 알았다.

아무리 성실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단 한 번의 실패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음을.

기대를 저버렸다는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애초에 기대하지 않게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살기 시작한 것이다.

“단목운뢰. 이번에는 다를 거다. 백리평, 너도.”

범일소의 두 눈이 빛났다.

오늘 그들을 만났기 때문인가? 그는 더욱 투지에 불탔다.

그리고 그날 밤.

범일소는 복귀하지 않았다.

***

키키키킹! 쿠아아앙!

복잡한 기계장치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쉬지 않고 돌아갔기에 비고의 검은 철문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쯤 되자 기계장치의 움직임이 멈췄다.

궁도혁이 그쪽으로 다가가 문의 상태를 살폈다.

“빌어먹게 단단하군.”

궁도혁은 결국 구멍을 뚫을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장비들을 이곳으로 가지고 와서 작업을 시작했다.

비고였기에, 아무나 들어올 수 없었다.

결국 홀로 장비를 옮기고 조립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거대한 기관을 설치할 때나 사용하는 장비로, 비고의 문에 구멍을 내려 하는 것이다.

무척 정교한 작업이었다.

조금만 방향이 틀어져도 비고의 기관을 작동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그냥 이 자리에서 죽는 것이다.

비고 전체가 무너질 테니.

다시 복잡한 계산을 하고, 방향을 확인한 후 장치를 작동했다.

쿠아아앙.

또 한번 요란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요즘 만물련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련주가 부재중이고, 련주의 직무를 대행하는 부련주가 저 모양이라서였다.

갑자기 비고에서 저러고 있으니 련의 사람들이 불안할 수밖에.

결국 원로원에서 나섰다.

원로원주 등군현이 궁도혁을 찾았다.

“부련주! 잠깐 나와보게나!”

장비가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가 잠깐 멈춘 때를 맞춰 내공을 담은 사자후를 터뜨렸다.

이렇게 해야 궁도혁이 반응을 보일 것 같아서.

“무슨 일이십니까?”

피곤에 절은 모습으로 궁도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게야! 련의 사람들이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 아는가!”

질책하는 듯한 등군현의 말.

“어쩔 수가 없습니다. 형님이 중요한 재료를 비고 안에 두셨으니…….”

“무얼 말인가?”

“정천맹의 의뢰로 제작에 들어간 검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금속이 비고의 밀실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은 형님의 피가 있어야 열리더군요.”

“대체 무슨 의뢰이길래?”

“내년 소휘웅 맹주의 환갑에 맞춰 도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가 있었습니다.”

사실이다.

보름쯤 전에 들어온 의뢰다.

정천맹주의 환갑이다.

대대적인 축하연이 있을 예정.

그때 그에게 선물하기 위해 특별한 도를 만들어 달라는 의뢰가 얼마 전에 들어왔었다.

아직 시일이 있었기에 먼저 도의 형태부터 그려 나가던 참이었다.

재료는 만년한철로 정했었다.

그러나 밀실의 문에 구멍을 뚫겠다 결심하는 순간 재료를 바꿨다.

밀실 안에서 꺼내야 하는 것으로.

“아니 그걸 왜 원로원에 알리지도 않은 겐가!”

등군현이 분노를 토했다.

“그것을 다루려면 시일이 오래 걸립니다. 헌데 원로원에 보고하고 승인이 나기를 기다리다가는 납기일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련주까지 부재중이니, 먼저 조치를 취하고 원로원에 승인을 신청할 생각이었습니다.”

“흐음.”

일리가 있는 말이다.

정천맹주의 환갑 선물로 진상하기 위한 특별한 도에 필요한 재료.

그 말을 듣는 순간 등군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재료가 있었으니.

“전부 쓸 겐가?”

“그랬다가는 납기일을 못 맞춥니다. 삼 할 정도만 섞을 겁니다.”

지극히 타당한 선택이다.

지금부터 제련에 들어간다면, 도 한 자루를 만드는데 필요한 그놈을 녹이는 데만 반년이다.

담금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그런데 꼭 그걸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도 한 자루의 삼 할에 해당하는 양만 사용한다고 했지만, 아까웠다.

천운이 닿아야 구할 수 있는 금속이었으니.

“소휘웅 맹주의 환갑입니다. 당연히 그 정도는 되어야지요.”

“흐음… 그래도 만년묵금철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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