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칫
만년묵금철(萬年墨金鐵).
천하에서 가장 귀한 금속이다.
금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묵철.
그 단단함이 천하에 비할 곳 없는 금속.
대신 다루는 것 또한 천하에서 가장 어려운 금속이다.
희귀하기 또한 천하제일이라 죽을 때까지 구경 한번 못 해보는 대장장이가 있을 정도였다.
만물련이기에 그런 만년묵금철을 비고에 보관하고 있는 것이다.
“내 말은 너무 많이 쓰는 게 문제라는 거야. 한 냥의 만년묵금철만 섞어도 보도를 만들 수 있는데, 그 정도의 양이라면 천하제일의 보도를 만들어 주려는 겐가?”
등군현의 말대로였다.
평범한 검에 만년묵금철 한 돈만 섞어도 그 검은 명검의 반열에 드는 물건으로 탈바꿈한다.
소휘웅이 주로 사용하는 도는 대도의 형태로, 무게가 대략 여섯 근(약 3.6kg)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궁도혁은 대도 무게의 두 근 가까이 되는 삼 할을 사용하겠다고 하였으니.
한 근이면 열여섯 냥이다.
궁도혁은 모두 서른두 냥, 돈으로는 삼백이십 돈의 만년묵금철을 사용하겠다 하고 있었다.
그 정도 양이면 현재 만물련에서 보유하고 있는 양의 절반에 이르는 막대한 양이었다.
“정천맹주가 사용할 최고의 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입니다. 만물련의 이름이 걸린 일인데 천하제일도 정도는 만들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등군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에 자신도 모르게 만년묵금철로 도신 전체를 만들 거냐고 묻기도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한 냥만 해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 한 냥을 얻기 위해 자신 역시 젊은 날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것은 돈 따위와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정천맹주의 도를 만든다는 명예는 만년묵금철이 아닌 만년한철만 사용해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가 사용하는 도가 한두 자루도 아니었고.
굳이 천하제일도를 만들어 바쳐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그 와중에 떠올린 사실.
“부련주. 자네가 련주를 대행하고 있다고 하나, 만년묵금철을 한 근 이상 반출하려면 련주의 재가가 필요하네. 사실 만년묵금철을 꺼내기 위해 비고 밀실의 문에 구멍을 내려는 행동 역시 련의 법도에 따라 처벌받을 행동이야.”
사실 그깟 정천맹주의 도에 만년묵금철을 얼마나 섞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디까지나 비고의 밀실에 구멍을 뚫을 정당한 명분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등군현과 만년묵금철의 양을 가지고 굳이 언쟁을 벌인 것은, 그럴수록 ‘만년묵금철’ 때문에 비고의 문에 구멍을 뚫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등군현이 한 말.
그 말이 궁도혁의 심사를 건드렸다.
련주의 재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역시 부련주인 한,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만물련을 위해 한 것이 얼마인데 만년묵금철의 반출량조차 마음대로 정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것이 아무리 귀한 것이라 한들, 결국은 광물이다.
부련주로서 기여한 바에 비해서는 적은 반출량 아니던가.
“알겠습니다. 그러면 한 냥만 섞도록 하지요.”
치솟는 분노를 누르고 애써 태연히 대답하는 궁도혁.
“흠흠.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게. 그럼 고생하도록 하고.”
그 말을 남기고 등군현이 자리를 떴다.
이제 자신이 비고 안에서 무얼 하든, 신경 쓰거나 불만을 표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맹주의 환갑 선물을 만들기 위함이라는데 누가 무어라 하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는 대장장이 새끼가.”
원로원주 등군현이 떠난 후 궁도혁의 입에서 흘러나온 욕설.
현재 그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었다.
이틀이 흐른 후에야 궁도혁은 기관의 작동 없이 밀실의 문에 구멍을 뚫을 수 있었다.
그것도 엉금엉금 기어서 겨우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이었다.
그렇게 밀실에 들어온 궁도혁의 눈에 기쁨이 자리했다.
다섯 기.
무려 다섯 기의 만천금쇄폭뢰가 존재했으니.
궁도혁은 그것을 모두 챙겼다.
그리고 한 냥 단위로 정제돼있는 만년묵금철 역시 하나 챙겼다. 어쨌든 이것이 명분이었으니.
그렇게 구멍 밖으로 나가려니.
또 다른 문제가 남았다.
이 구멍을 어떻게 막느냐다.
이렇게 두면 비고에 올 수 있는 이는 누구나 밀실로 드나들 수 있다.
궁도혁은 움직임을 멈추고 밀실을 돌아보았다.
딱히 중요해 보이는 것은 없었…아니, 있었다.
만천금쇄폭뢰의 설계도로 보이는 것이……!
설마 이곳에 하나를 두었으리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당연히 품에 챙겼다.
그리고는 특별할 게 없었다.
만물련 아니랄까 봐, 대부분이 광석이나 금속재료였다.
그리고 암기.
만천금쇄폭뢰가 아닌 한 관심도 없었다.
“뭐, 어찌 되든 상관없나?”
밀실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희귀한 광석과 금속, 재료 따위가 어찌 되든 알 바 아니다.
자신이 만천금쇄폭뢰를 얻었다는 것, 이것으로 형과 하무백을 처리하지 않으면 자신은 어차피 끝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궁도혁은 구멍 밖으로 나와 비고를 떠났다.
구멍은 그대로 둔 채.
필요하면 원로원에서 막을 터.
그렇게 궁도혁은 자신의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언제 올지 모를 형과 하무백을 맞을 준비를 하기 위해.
만천금쇄폭뢰를 어떻게 사용해야 가장 강력한 위력이 나올지,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상대는 이미 한 번 만천금쇄폭뢰의 공격으로부터 살아 나왔으니.
***
이른 새벽이다.
범일소가 그제야 교룡관에 돌아왔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그런 그를 발견한 목청산이 인상을 썼다.
저런 방탕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수련에 매진해도 모자랄 때인데.
“사제. 계속 이렇게 지낸다면, 본파에 알릴 수밖에 없어.”
곁을 지나치며 나지막이 경고하는 목청산.
범일소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목청산은 그런 사제의 태도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십 조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관복을 입지 않았다.
맹룡대의 생도다.
“네 녀석.”
대사형의 곁에서도 꾹 닫혀 있던 범일소의 입술이 달싹였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녀석 때문이다.
단목운뢰.
어지간해서는 맹룡대의 영역을 절대 벗어나지 않던 녀석이 어쩐 일로 와룡대까지 온 걸까 싶은 순간.
그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 들린 것은 은자 한 냥.
“어제 운혜가 빚진 것.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
단목운뢰의 말에 범일소가 피식 웃었다.
“네 동생은 내게 빚진 게 없다. 내가 사과의 의미로 대신 내준 것뿐이지.”
“그렇다고 해도 그 아이에겐 너무 과해.”
범일소의 웃음이 진해졌다.
“그건 내가 정한다. 내가 사과하는 거니까. 네가 과한지 아닌지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냉랭한 목소리.
웃음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그래도…….”
준다는 사람과 필요 없다는 사람.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었다.
“난 가서 좀 자야겠군. 어젯밤에 너무 무리하게 놀아서.”
범일소가 몸을 돌렸다.
“그 전에 좀 씻어라. 땀 냄새가 심하다.”
단목운뢰의 말에 범일소가 우뚝 멈췄다.
“뭐라고?”
“싸구려 화주 냄새 밑에 땀 냄새가 진동해. 이건 맡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지. 오래된 싸구려 화주가 삭은 냄새인지, 땀 냄새인지.”
단목운뢰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랬다.
대사형 목청산은 몰랐다.
애초에 이 술 냄새의 정체가 화주라는 것은 알았을까?
목청산은 태생이 명문가였기에 그저 싸구려 술 냄새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수련 후 흘린 땀 냄새까지도.
“내가 사는 곳에 그런 사람들 많아. 땀에 절도록 일하고 화주로 피로를 달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몸에서 딱 지금 네 몸에서 나는 것과 같은 냄새가 나지. 수련도 좋지만, 몸 관리도 적당히 해. 그리고 다시 한번 고맙다.”
그 말을 끝으로 단목운뢰가 몸을 돌렸다.
도움을 준 이가 받기를 거부하는데 억지로 돌려주는 것도 예의가 아닌바.
범일소의 호의는 고맙게 받기로 했다.
“칫.”
짧게 혀를 찬 범일소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모를 거로 생각했는데, 싸구려 화주 냄새 속에 숨은 땀 냄새를 맡을 줄 아는 녀석이라니.
하긴 저 녀석도 나름 밑바닥 삶을 살았다 했으니.
“다음부터는 대강 씻고 와야겠어.”
얼굴이 살짝 붉어진 채 범일소가 중얼거렸다.
씻는 시간이 아까워 술만 뿌린 것이 실수였다.
***
하무백이 교룡관을 나섰다.
아직 수련 시작까지는 시간이 좀 있는 터.
궁소유과 궁무혁이 머무는 객잔으로 향했다.
최근 자신의 감각을 가다듬느라 찾아오지를 못하고 있었다.
감각의 오차가 있는 상태에서 매우 정교히 내공을 움직여야 하는 절맥의 치료를 진행하다가는, 자칫 실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치료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는데 그런 참사가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대신 사부님이 두 사람의 상세를 돌봐주셨다. 애초에 절맥의 치료는 자신 역시 사부님에게 배우던 것이었으니.
오랜만의 방문이었기에 이른 아침부터 나섰다.
감각이 예전처럼 돌아온 이상 조금이라도 빨리 치료하기 위해서였다.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인가?”
하무백의 방문에 공손무외가 반겼다.
“치료를 이어서 해야지요.”
“오. 드디어 성취를 모두 갈무리한 모양이군. 축하하네.”
공손무외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말했다.
“축하드려요.”
곁에서 공손무외의 수발을 들던 공손비연이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치료는 순조로웠다.
궁소유의 상태는 정말 좋았다.
이제 거의 팔 할은 치료가 된 상태.
위지군이 꾸준히 돌봐준 덕이었다.
단목운혜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치료가 되었다.
“좋군.”
하무백의 말에 궁소유가 빙긋 웃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무백은 궁무혁에게로 갔다. 이제 그의 차례였다.
그 역시 오 할 정도 치료가 된 상태.
중독은 절맥과 비슷하다고 하나, 그 둘은 분명 다른 문제였기에 치료 속도가 궁소유에 비해서는 더뎠다.
사부 역시 처음 접하는 병세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하무백이 벽을 넘은 것이 치료에도 적용이 된 것이다.
치료의 진척이 많이 이루어진 궁소유에게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으나, 궁무혁은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순식간에 남아 있던 독의 이 할이 사라진 것이다.
“고맙습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궁무혁의 말에 하무백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독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있어서 시험한 것이 잘 맞아떨어진 덕입니다.”
련주의 동생이 마교와 결탁해서 형을 제거하려 했다.
그렇다면 련주가 독에 중독된 것은, 그들의 수작일 터.
련주의 동생이 이런 독을 구할 수는 없을 테니, 혹시 마교의 독이라면.
그리고 마기와 상극인 기운을 운용한다면?
예전이라면 극히 섬세하고 정교한 기를 운용하면서, 내공의 성질까지 변화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절맥의 치료가 가능한, 섬세하고 정교한 기의 운용도 하무백이나 위지군 정도 되니 가능한 것이었다.
괜히 선유곡에서 구음절맥을 치료하지 못해 하무백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치료법도 문제였지만, 기의 운용 또한 문제였던 것.
거기에 더해, 벽을 넘은 이후엔 내공의 성질 변화까지 가능했다.
사부가 쓴 최후의 절초를 막고 되치기 위해 두 가지 성질의 강기를 동시에 사용하지 않았던가.
그것도 검강와 호신강기라는 다른 성질의 무공에.
과연 그 효과가 놀라웠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의 혈색 좋은 궁무혁이었다.
“아닙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은인 덕에 련에 돌아갈 날이 빨라질 것 같습니다. 빨리 가서 꼬인 매듭을 풀어야지요.”
궁무혁의 두 눈이 결연히 빛났다.
그 눈빛에는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결정하셨습니까?”
“고민할 게 있겠습니까? 련의 율법이 있는데.”
단호한 말에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부탁을 말이십니까?”
“함께 가 주십시오. 그놈이 어떤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저는 외부인인데 괜찮겠습니까?”
“마교도 외부인이지요.”
맞는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 교관님께서도 제 동생 놈에게 갚아줘야 할 빚이 있지 않습니까?”
궁무혁의 말에 하무백이 싱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