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드, 들려요
“그렇지요. 빚이 있지요.”
“하 교관님. 아니, 하 단주님은 절대 빚을 잊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호천단주 시절의 호칭이 궁무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련의 일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했지만, 그래도 아주 귀를 닫고 산 것은 아니었으니.
하무백은 순순히 인정했다.
“사실 소유나 련주님의 치료도 빚을 갚기 위한 일입니다.”
하무백의 말에 궁무혁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짐작했었다.
“선유곡의 도움으로 수하들이 목숨을 건졌고, 만물련의 암기 덕에 수하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었지요.”
“미천한 재주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정말 소중한 수하들이었습니다. 큰 빚이죠.”
큰 빚.
다른 사람도 아닌 하무백이 한 말이다.
궁무혁은 하무백의 신위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저런 이가 말하는 큰 빚이라.
그런 빚이니 소유와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이리라.
“제가 죽을 뻔한 것도 큰 빚입니다. 빚진 것만큼은 꼭 갚아주어야지요.”
하무백의 두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 모습에 궁무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수하들의 희생을 줄인 큰 빚을 졌다면서, 자신과 딸을 치료해 주고 있다. 빚을 갚는 것이라며.
그러면 대체 생명의 위기를 겪게 한 빚에 대한 대가는 무엇일까.
“그러니 만물련으로 귀환하실 때 함께 가도록 하지요. 언제쯤 가실 생각이십니까?”
하무백의 눈빛은 어느새 부드럽게 돌아와 있었다.
“언제쯤 제가 완치될까요?”
완치되는 대로 돌아가겠다는 의지였다.
“정월 정도면 완치되실 듯합니다.”
하무백이 계산을 마친 후 답했다.
“그럼 그때가 돌아갈 때입니다.”
궁무혁의 두 눈이 빛났다.
***
“응? 오늘은 안 오는 거 아니었어?”
연무장에 나타난 주우명의 모습에 당진산이 물었다.
“그랬지. 그랬는데, 연무장에 아무도 없네.”
“이십 조 연무장에?”
당진산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응.”
주우명이 짧게 답했다.
“설마? 그럴 리가.”
지나치던 낙우진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당연한 일.
한설빙과 하설란은 어디의 누군가와는 다르게 아주 성실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없어.”
주우명이 한 번 더 말했다.
“그리고 여기는 오늘도 없어.”
당진산이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련 시간이 다 되었는데 하무백은 나타나지 않았다.
“혼자 하는 거보다는 나으니까.”
주우명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후는?”
주우명이 백리평을 향해 물었다.
“오늘은 잠룡대 단체 수련이라 빠질 수가 없다고 하네.”
그간 남궁지후는 잠룡대 일 조의 수련을 무단으로 빠지고 이곳에 오고는 했다.
잠룡대 일 조 교관은 그런 그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다.
교관과 생도라 하나, 교관인 그는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중 한 곳의 제자일 뿐이다.
그러나 남궁지후는 현 남궁세가주의 장자.
곧 소가주가 될 몸이 아니던가.
그러니 교관이 그를 적극적으로 제지하기 어려웠다.
이런 일은 잠룡대와 와룡대에서 종종 발생했다.
지금까지는 남궁지후가 교관의 지시를 잘 따랐고, 튀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뿐이다.
다만 오늘 단체 수련의 지도 교관이 제갈명이었다.
그는 그런 일탈을 봐주지 않았기에 단체훈련을 빠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내일이던가?”
단목운뢰의 물음.
“맞아.”
백리평이 답하며 연무장 한쪽에 놓인 방패를 바라보았다.
후반기에도 방패술 단체 수련은 빠진 적이 없었다.
하무백에게 이끌려 산월마림에 다녀왔을 때를 빼고는.
그리고 그곳에 다녀온 후로는 방패술 수련에 더욱 열과 성을 다했다.
방패가 그곳에서 얼마나 유용한 병기인지 직접 겪고 왔으니.
“이제 수련 시간이야.”
연하민의 나직한 한 마디.
그녀의 말에 다들 잡담을 멈추고 진지한 얼굴로 검을 잡았다.
바위 위는 여전히 비어있었으나, 생도들은 진지하게 수련을 시작했다.
그 시각.
하설란과 한설빙은 위지군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어르신 이렇게 계셔도 되나요?”
한설빙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현재 위지군은 교룡관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는 상태.
일꾼들이 위지군의 진실한 정체는 모를 테니, 이렇게 무단으로 일을 빠지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가 된 것이다.
“이미 전갈해두었으니 괜찮네.”
그러나 이미 일꾼들을 전부 휘어잡은 위지군이었기에, 이 정도 융통성은 발휘할 수 있었다.
“대신 오늘은 내가 늦게까지 있어야 하겠구만.”
일을 빠진 시간을 벌충해야 했으니.
“란아.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 아니라 집중해야지.”
위지군이 가부좌를 틀고 앉은 하설란을 향해 말했다.
그 지적에 하설란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위지군이 한설빙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보다는 한 교관이야말로 괜찮은가? 생도들 수련 시간인데.”
“제 생도 여기 있잖아요. 그리고 우명이야 뭐. 칠 조에 가서 잘하고 있겠지요. 교관이 매일같이 자리 비우는 곳이요.”
그녀의 대답에 위지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자 하무백이 교관 생활을 어찌하는지 그에게 직접 듣기도 들었고, 이곳에서 보기도 했으니.
“한 교관은 괜찮겠구만.”
위지군이 납득했다.
사부님과 교관님의 대화는 재미가 있었다.
마치 자신의 집중을 방해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듯이.
그럴수록 하설란은 더욱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자신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낸 사부님과 교관님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제대로 해야 했으니.
그렇게 집중에 집중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던 어느 순간.
내면 깊은 곳에 풍덩 빠져드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감싸더니.
자신을 중심으로 주변의 것들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범위는 동심원을 그리며 점차 넓어졌다.
가장 먼저 사람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사부님. 교관님.’
범위를 좀 더 넓히니.
‘하민. 운뢰. 진산. 평. 우진. 우명.’
같이 수련하는 생도들.
그리고.
‘오라버니.’
그것을 넘어 일면식도 없는, 알 수 없는 수많은 사람의 존재.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범위는 점점 넓어져 무창성을 벗어나서도 좀 더 확장되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그 모든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오라버니는 뭘 하고 계신 걸까?’
생도들의 수련은 봐주지 않고 교룡관을 벗어나 어디에 있는 걸까.
순수한 호기심에, 오라버니에게 집중했더니.
오라버니의 얼굴까지 보였다. 그리고 함께 있는 이도.
기척으로 이미 누구인지 알았다.
만물련주.
심지어 그의 얼굴까지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혈색이 좋아지셨어.’
두 사람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으나, 그것까지 들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오라버니를 지켜보던 어느 순간.
‘헙!’
문득 올려다보는 오라버니와 시선이 마주친 듯한 느낌이 들어 서둘러 기감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오, 오라버니가 알아차렸을까?’
심장이 두근두근 콩닥거리며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란아. 왜 그러느냐?”
걱정스럽게 들리는 사부님의 목소리에 하설란은 두 눈을 떴다.
“란아. 무슨 일이야?”
그녀의 변화를 눈치챈 한설빙이 걱정스레 물었다.
“저, 그, 그게…….”
하설란은 방금 있었던 일을 우물쭈물 조심스레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모두 들은 위지군과 한설빙은 멍한 얼굴로 입을 살짝 벌렸다.
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믿어야 했으니.
역시 지난번 야산을 찾아올 때 보여주었던 하설란의 능력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기감을 느끼는 법을 가르쳐 주고, 수련을 시작한 지 이제 고작 한 시진이다.
그 한 시진 만에 기감을 무창성 너머로 퍼뜨렸다고,
그리고 사람들의 기척을 모두 느꼈다 했다.
더욱이 사람의 얼굴까지 정확히 인식했다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들은 적도 없고,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설란의 기감에 대한 재능은 과연 어느 정도란 말인가.
“마, 말소리는 안 들렸다고?”
“네.”
위지군의 물음에 하설란이 순진무구한 얼굴로 답했다.
“들을 수는 있을 것 같더냐?”
“…잘 모르겠어요.”
이어진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하설란이 내린 결론은 잘 모른다였다.
“한번 시도해 볼 수는 있을 것 같고?”
위지군의 물음에 다시 한번 고민하던 하설란.
“…해볼게요.”
그리고 다시 가부좌를 틀고는 두 눈을 감았다.
너무 먼 곳부터 하면 힘들 것 같았기에, 가까운 곳을 찾았다.
그렇게 보게 된 곳이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
생도들이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방… 어… 필요…….
띄엄띄엄 끊기는 아주 조그만 소리긴 했지만.
…들렸다!
이럴 수가.
깜짝 놀란 하설란이 화들짝 두 눈을 떴다.
위지군과 한설빙이 하설란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이지만 드, 들려요.”
경악에 물든 한설빙의 두 눈.
“대, 대체 이 남매는…….”
지난번에 했던 것 같은 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하설란의 능력은 그야말로 천안(天眼)에 천이(天耳)였다.
무공으로 천안통을 사용한다느니, 천이통을 펼친다느니 지껄이는 어설픈 사이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진정 불가에서 말하는 육신통 중의 천안통과 천이통이었다.
정녕 기함할 재능이자 무서운 능력이었다.
“그게… 한 단어도 제대로 안 들리고, 아주 짧게만 들리는 정도예요.”
하설란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너라면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또 위험한 것인지 잘 알게다.”
위지군의 말에 하설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진은 하되, 함부로 그 능력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네.”
위지군의 당부에 하설란이 짧게 말했다.
“그래. 우리 란이라면 잘 해낼 거라고 믿는다. 무백이보다 네 재능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하마. 오늘은 이만 푹 쉬도록 해라.”
위지군은 깜짝 놀랄 말만을 남기고 그곳을 떠났다. 뒷일은 한설빙에게 맡긴 채.
“란아. 너, 괜찮니?”
한설빙이 물었다.
“네?”
영문을 알 수 없어 되묻는 하설란.
“몸이 괜찮냐고. 방금 네가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는 알고 있지? 그런 엄청난 일을 했는데 몸에 부담이 없는지 걱정이 돼서 묻는 거야.”
“어?”
한설빙의 질문에 하설란은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일시에 온몸의 기력이 쭉 빠지는 듯한 느낌.
정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너, 너무 피곤해요.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요…….”
그리 말하며 하설란은 앉은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그렇지. 그런 엄청난 일을 했는데 몸에 아무 이상이 없을 수가 없지.”
한설빙이 혀를 차며 하설란을 업었다.
“오늘은 어르신 말씀대로 푹 쉬도록 하자.”
“네.”
하설란은 짧게 대답하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에 빠져든 것이다.
위지군은 이미 이 모든 것을 예상했기에 한설빙에게 그녀를 맡긴 것이다.
애초에 오늘 기감 수련에 한설빙도 함께 오기를 부탁한 것도 어쩌면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예측해서였다.
이미 한번 경험이 있었으니까.
하무백이 무극명륜안의 기반이 되는 눈을 처음 뜬 날.
온몸의 기력을 모두 소진하고 쓰러졌었으니.
자신의 일터로 걸음을 옮기며 기감을 펼쳐 하설란의 상태를 파악한 위지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였으니.
한설빙은 하설란을 연룡숙의 그녀의 방에 데려다 눕혔다.
그러고 보니 하설란과 한방을 쓰고 있는 연하민에게도 언질을 주어야 할 것 같았다.
한설빙은 곧장 칠 조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코오…….”
홀로 침상에 남은 하설란은 작은 소리로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설마 방금 란이인가?”
하무백이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왜 그러시는지요?”
궁무혁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 답했지만, 하무백의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익숙한 느낌의 기운이 이곳을 훑고 지나간 후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었으니.
그것이 꼭 동생의 기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