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122화 (122/312)

122화. 그 정도야, 뭐

소복소복.

교룡관에 첫눈이 내리고 있다.

12월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다 싶더니,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눈이 내린다.

“어후. 춥다.”

당진산이 몸을 덜덜 떨며 연무장에 나타났다.

습관적으로 바위를 바라보았다.

눈이 소복하니 쌓여있었다.

사람은 없었다.

“쯧. 오늘도 안 오시는 건가?”

당진산이 혀를 찼다.

“그러게. 누가 오늘도 안 오는 건가?”

등 뒤에서 들리는 익숙하지만 이제는 좀 낯선 목소리.

당진산이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교, 교관님!”

“뭘 그리 놀라? 처음 보는 사람처럼.”

하무백이 무심하니 툭 한마디하고는 바위로 다가갔다.

눈이 쌓인 곳을 잠시 바라보니, 눈이 녹았다.

그리고 눈 녹은 물도 순식간에 말라서 뽀송뽀송한 바위가 드러났다.

하무백은 그곳에 적당한 요를 깔고는 바위 뒤에 커다란 우산을 펼쳤다.

무언가 가득 짊어지고 왔다 싶더니 그것이었다.

준비를 마친 하무백은 요 위에 비스듬히 누웠다.

“너 혼자냐?”

하무백이 툭 던진 물음.

“곧 다들 올 겁니다.”

당진산이 그리 말하며 연무장 한구석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 말대로 생도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하무백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다들 흠칫했지만, 익숙한 듯 몸을 풀기 시작했다.

사실, 하무백이 없는 것이 더 익숙했다.

최근 들어서는 자율학습이라는 말도 안 해주고, 그냥 안 나왔으니.

“동투제가 이제 열흘 정도 남았나?”

하무백의 물음.

“보름 남았습니다.”

백리평이 답했다.

그 대답에 머리를 긁적이는 하무백.

“아, 동지에 한다고 했었지.”

대강의 날짜만 헤아리다가 백리평의 대답에 정확히 날짜를 셈했다.

“네.”

단목운뢰의 대답.

“그럼 슬슬 점검 한번 해볼까? 다들 운공부터 시작한다.”

칠 조 생도 다섯이 몸을 어느 정도 푼 것 같자 하무백이 지시를 내렸다.

그 말에 다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에 들어갔다.

하루 일과처럼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으로 오고 있던 남궁지후와 주우명이 흠칫했다.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었고, 심지어 그 사람이 지금 수련을 봐주고 있는 듯했다.

하무백의 시선이 그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뭐냐? 그 시선은? 여기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을 본 것 같은 그 눈빛이 묘하게 기분이 나쁘네? 지금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건 너희 둘 같은데?”

하무백의 지적에 두 사람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너희 둘은 알아서 수련해라. 내 담당 아니니.”

칼 같이 자르는 하무백의 말.

“저, 그래도 대련 한번 정도는…….”

남궁지후가 은근슬쩍 말을 꺼냈다. 애초에 남궁지후가 하무백을 처음 찾았을 때도 그 이유였지 않던가. 지도 대련.

“그 정도야, 뭐.”

“저, 저도 부탁드립니다.”

하무백의 대답에 주우명이 황급히 말했다.

“한 교관이 안 봐줘?”

하무백이 귀찮다는 듯 물었다.

“그… 요즘 설란의 수련이 중요한 고비라고 그쪽에 신경을 조금 더 쓰시는지라.”

주우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끄응.”

하무백이 인상을 썼다.

한설빙이 자신의 동생에게 집중하느라 주우명을 좀 소홀히 했다고 하니.

자신이 그 뒤치다꺼리를 해야지.

“알았다. 너도 좀 봐줄게.”

하무백의 허락이 떨어지자 주우명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하무백이 없음에도 뻔질나게 칠 조의 연무장을 드나든 보람을 이제야 느낀 것이다.

남궁지후나 백리평, 그리고 단목운뢰와의 대련도 분명히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자신을 아득히 넘어서는 절대적인 강자와의 대련에 목말랐다.

교룡관으로 떠나던 날, 사부인 무연진인이 자신에게 말했었다.

-나는 지금도 네가 교룡관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여긴다. 다만 그곳에 하무백이라는 교관이 있다면, 그에게서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대단한 사람이니.

-어떤 분이신가요?

-알려지지 않은 천하제일인이라 할까?

-천하제일인은 소휘웅 맹주님 아니십니까?

마지막 물음에 사부는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알려지지 않은 천하제일인.’

사부님이 어째서 그리 칭했는지는, 팽군호가 사고를 친 날 직접 목도했었다.

사부님과 비교해도 그 끝을 알 수 없었던 어마어마했던 기세.

그리고 산월마림에 함께 가면서 다시 한번 느꼈다.

지난번에도 남궁지후가 하무백과 대련했던 기회를 노려 자신 역시 하무백과 대련해볼 수 있었다.

‘딱밤 두 대.’

그게 그날의 결과였다.

‘이번에는 기필코.’

지난번보다 나은 결과를 얻으리라.

***

검 끝이 흔들린다.

하나의 검이 둘이 되고, 둘의 검이 넷이 된다.

검 끝은 계속해서 흔들렸다.

여덟으로 열여섯으로 서른둘로.

흔들리는 검 끝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이윽고 백스물여덟이 되었다 싶은 순간.

검 끝의 흔들림이 사라지고 오롯이 한 자루의 검만이 남았다.

“후우.”

목청산은 땀에 흠뻑 젖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팔 초는 무리인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목청산.

도무지 이 한계를 넘을 수가 없었다. 아예 펼치지 못한다면 모르겠으나, 일단 팔 초의 시작은 가능한데, 그것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환천로검법(天幻千路劍法).

천검파 최고의 검법으로, 오늘의 천검파가 있게 한 독문절기이다.

천검파의 삼대제자 중에서는 각고의 노력 끝에 발굴한 열 명의 기재만이 익히고 있었다.

열한 초식으로 이루어진 검법으로 최후의 초식에 이르면 모두 일천이십사 개의 검이 하늘을 뒤덮는 엄청난 위력의 검이다.

이제 나이 스물에 불과한 목청산이 예순네 개의 검까지 무리 없이 만들어내는 것만으로 기함할 일이었다.

가히 천검파가 절치부심해서 기르고 있는 천재다운 실력이었다.

호흡을 고른 후, 비단 수건을 들고 땀을 대강 닦고는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제는 심법을 가다듬을 차례다.

심법과 검법이 조화를 이루어야 최고의 위력이 나오는 바.

어느 것 하나 소홀할 수 없었다.

그때 범일소가 와룡대 이십 조의 연무장 곁을 지나쳤다.

지금 막 점심을 먹고 오는 길이었다.

다들 밥 먹으러 간 시간에도 홀로 연무장에 남아서 수련이라니.

정말 지독한 수련 벌레다.

범일소의 시선은 그런 목청산을 지나쳐 연무장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비단 수건이 잔뜩 쌓여있었다.

땀 한 번 닦고 버린 것이다.

“쯧.”

그 모습에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한번 차는 범일소.

건들건들 걸어서는 와룡대 일 조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비단 수건을 한 번 쓰고 버린다라…….”

뭐 그럴 수 있다.

비단 수건.

좋다. 촉감도 좋고 흡수력도 좋아서 땀을 닦기에 제격이다.

다만, 세탁이 어려우니 땀 닦는 수건으로는 적당하지 않았다.

비단은 특수한 세탁법을 사용하지 않고 일반적인 방법으로 세탁하면 그 손상이 극심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두세 번 정도는 사용할 수 있을 터인데, 손상된 후의 느낌이 싫은 것인지 저렇게 한 번 쓰고 버리고 있다.

“역시 부잣집 도련님이네. 대사형은.”

범일소가 피식 웃었다.

유리걸식하며 천하를 떠돌다가 우연히 사부를 만나 천검파에 입문한 자신.

천검파가 위치한 섬서성 서안 최고 상단주의 아들인 대사형.

여기저기 아무나 끌어모아 만든 맹룡대의 생도에게 패한 자신과, 백 년에 한 번 나올 천재라며 정천맹주 소휘웅에 비견되는 대사형.

피식.

일 조의 연무장에 도착한 범일소의 입가에 자조적인 웃음이 걸렸다.

비교 자체가 되지를 않는데, 왜 자신을 대사형과 비교하고 있을까.

자신은 천검파 열 명의 기재 중에서도 하위권에 속하는 재능을 가졌다.

그래서 이곳에 보내진 것이다.

천검파의 교룡관에 대한 구색 맞추기로 말이다.

그런 차에, 맹룡대의 생도에게 패했으니.

본파에서 대우가 어떠했던가.

다만 그럼에도.

범일소는 상관없었다.

그날의 패배.

그때 머릿속에 무언가 번득이는 것이 있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최근까지도 몰랐다.

얼마 전 폐장원에서 수련하던 밤.

하늘과 땅이 떨어 울리던 날.

그날 불현듯 그 번뜩임이 정리되어 펼쳐졌다.

그 우연한 만남에 범일소는 그날 교룡관에 복귀하지 않은 것이다.

연무장 한켠의 가검을 집어 드는 범일소.

천천히 검을 움직였다.

하나의 검.

검 끝이 흔들리며 그 숫자가 점차 두 배씩 늘어난다.

예순네 개의 검이 나타난 순간.

잠깐 호흡을 가다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백스물여덟을 지나 이백쉰여섯 개의 검영이 연무장을 뒤덮은 후 사라졌다.

“후우.”

간단한 한숨.

다시 가검을 검대에 놓고 돌아설 때.

연무장 주변으로 눈보라가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아직 식사 시간은 남았기에 범일소는 적당한 쉼터를 찾아 연무장을 떠났다.

잠시 후, 연무장에 도착한 다른 와룡대 일 조의 생도들.

“이거 뭐야?”

수련을 위해 연무장 가장자리로 밀어 놓았던 눈더미가 엉망진창으로 흩어져 있었다. 그 모습에 마립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뭐, 돌풍이라도 불었나 보지.”

사평주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돌풍에 이게 이렇게 된다고?”

마립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나저나 일소 녀석은 먼저 가더니 어디로 간 거야?”

사평주가 연무장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적당한 곳에 짱박혀 있겠지. 후반기 들어서 유독 수련에 소홀하잖아. 그 녀석.”

마립의 대답에 사평주가 가만히 연무장을 바라보았다.

***

나른한 오후.

그러나 오전에 내린 눈으로 여전히 추웠다.

눈에 내렸던 연무장 바닥은 축축한 것이 발을 딛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 연무장 한가운데.

남궁지후가 검을 들고 하무백을 노려보며 서 있었다.

칠 조 생도와 주우명이 흥미로운 눈으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이번에는 몇 대?”

당진산의 물음.

“처음에는 한 대였다고 했지? 못 봤지만. 그리고 두 번째는 두 대였지.”

백리평의 말.

“그러니까 몇 대?”

당진산이 다시 물었다.

“세 대.”

연하민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

“쳇. 그래? 그럼 난 네 대로 하지.”

당진산이 아쉽다는 듯 말하며 다른 생도들을 바라보았다.

“나도 세 대.”

“나도.”

주우명과 단목운뢰 선택.

낙우진과 백리평이 남았다.

“난 두 대.”

고심하던 백리평이 선택을 마쳤다.

모두의 눈이 낙우진에게로 향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딱밤일까?”

낙우진이 궁금하다는 듯 말했다.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하무백은 적어도 남궁지후와 주우명과의 대련에서는 가볍게 딱밤으로 끝냈으니까.

낙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난 왠지 이번에는 다른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그냥 한 방으로 할게.”

어떤 수단인지는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 되었든 하무백이 단 한 방에 남궁지후를 쓰러뜨릴 것만 같았다.

생도들의 내기가 끝날 무렵.

남궁지후가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그는 인상을 조금 찡그리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생도들의 내기 내용이 모두 들렸기 때문이다.

“그 정도에 평정심이 흔들려서야. 쯧.”

혀를 차며 하무백이 한 마디 던졌다.

그 순간.

남궁지후는 하무백의 몸에서 변화를 읽었고, 그대로 검을 날렸다.

창궁무애검.

남궁세가의 성명절기이자, 남궁지후가 갈고 닦은 검법이 하무백을 향해 날아갔다.

검의 변화는 유려했으며, 웅혼했고 패도적이었다.

현재 그의 검법은 물이 올라 있었다.

‘제법?’

하무백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예상 이상의 실력이었던 탓이다.

칠 조 연무장에서 행한 주우명, 백리평, 단목운뢰를 비롯한 생도들과의 대련 덕에 그의 검은 완숙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럼에도 하무백은 남궁지후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절대강자.

그랬기에 지금 남궁지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위력의 검을 하무백에게 펼치고 있었다.

하무백을 향해 몰아치는 수많은 검영.

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을 향해 한 발 내디뎠고, 주먹을 들었다.

하무백의 주먹에 희미하게 권기가 깃들었다 싶은 순간.

쾅!

단번에 휘둘렀고, 남궁지후의 창궁무애검은 깨졌다.

그리고 드러난 허점.

하무백이 가볍게 딱밤 한 대로 마무리 지었다.

“아악!”

남궁지후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상대 못할 강자라는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너무 패도적이었어. 균형을 잃었다는 말이야.”

이어진 하무백의 조언.

이마를 감싸 쥔 채 주저앉은 남궁지후의 눈이 찰나지간 빛이 났다.

“이거 어떻게 된 거지?”

당진산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한 방에 한 대네?”

낙우진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누구도 맞히지 못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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