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129화 (129/312)

129화. 끝났네

자박. 자박.

무거운 발걸음이다.

그저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를 걸었을까.

문득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여긴?"

관하경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곳이다.

너무나 익숙한 곳.

바로 와룡대 오 조의 연무장.

사 년 동안 정말 지겹도록 있었던 곳. 눈을 감고 움직여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모두 다 아는 곳.

정처 없이 걸음이 이끄는 대로 왔건만, 결국 도착한 곳은 또 이곳이다.

교룡관에서의 마지막 날.

결국 패했다.

하늘이 내린 재능을 넘지 못하고 패하고 말았다.

"이익."

어둠이 내린, 아무도 없는 연무장.

관하경은 이를 악물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를 악물지 않으면 울음마저 터뜨릴 것 같았기에, 더욱 이를 악물었다.

"흑··· 흑흑······."

그러나 잇새로 흘러나오는 작은 울음만큼은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관하경에게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명.

관하경 자신만큼은 스스로에게 거는 기대가 컸지만.

오늘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지난 사 년의 피나는 노력.

그 결과가 동투제 16강이라는 사실에, 그동안 억눌러 왔던 서러움이 몰려왔다.

그렇게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까.

저벅.

갑작스레 들려온 발자국 소리에 관하경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가 보였다.

관하경이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손은 이미 도병을 잡고 있었다.

"여기 교룡관 안이다. 수상한 사람은 아니야."

담담한 목소리.

들은 적 있는 목소리다. 오늘 처음 들었지만,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오전 소동의 주인공 아니던가.

잠룡대 생도의 암수를 밝혀냈던 교관.

"교관님인가요?"

하지만 어느 교관인지는 모른다.

"그래. 맹룡대 칠조 교관 하무백이다."

하무백의 소개에 관하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맹룡대의 교관이 여기는 왜?

이곳은 와룡대의 연무장이고, 그가 올 일이 없는 곳이었으니까.

"맹룡대 교관님이 이곳에는 무슨 일이시죠?"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 때문일까? 관하경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수고했다."

하무백이 짧게 말했다.

"네?"

갑작스러운 말에 관하경은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 연유를 알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단천도를 거기까지 수련한다는 것은 보통 노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오늘 비무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그래서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려고 찾아왔다."

"그, 그게 무슨······."

관하경은 얼떨떨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말을, 자신의 담당 교관이나 사문의 어른이 아닌 오늘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도림 안에서도 단천도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단지 참마수라도를 익히기 전 단계의 도법으로만 생각하지. 하지만 단천도는 단천참마도의 기본이 되는 도법. 단천도를 소홀히 하면 단천참마도를 제대로 익힐 수가 없지."

"······."

관하경은 이어진 하무백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이 인간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도림의 누구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다니.

심지어 도림의 사람도 아닌데.

'아.'

그때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기억.

전반기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

와룡대 사 년차 담당 교관 한평이 맹룡대 교관에게 박살이 났었다고 했다.

당시에도 관하경은 연무장에서 도를 휘두르는 데 여념이 없었기에 그 현장을 보지는 못했고, 다른 생도에게 전해 듣기만 했다.

한평은 도림 출신으로 단천참마도를 익힌 강자였다. 출신이 같았기에 잘 알았다.

그런 한평을 삼재권법만으로 박살을 냈다니, 그것도 맹룡대의 교관이.

당시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교관의 이름이 분명.

'하무백이었어.'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의 이름이었다.

"하무백 교관님이면, 예전에 한평 교관님을······."

떠오른 기억이 관하경의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응? 한평?"

오히려 기억에 없다는 듯 되묻는 하무백.

그러더니 이내 떠올린 듯했다.

"아! 여생도를 희롱하던 그 쓰레기?"

하무백의 물음에 관하경은 아무런 답도 못했다.

그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자신 또한 여인이었고.

사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한평이 그런 인간인 줄은 몰랐다.

도림과 와룡대에서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이후의 조사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맹룡대 여생도만 노려 그런 쓰레기 짓을 하는 잠룡대와 와룡대 교관이 있었다 했으니.

물론 그때 일로 그런 교관들은 모두 색출되어 퇴출당했다.

하무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단천도를 우습게 여기면 그 쓰레기처럼 껍질뿐인 단천참마도를 익히게 되는 거다. 지금 당장 네가 단천참마도를 펼쳐도 그 쓰레기보다는 나을 거다."

"그, 그게 무슨······."

"너 자신에게 좀 더 자신감을 가져라. 네가 한 수련에 믿음을 가지고. 적어도 내가 본 도림의 무인 중, 단천도를 그 수준까지 갈고 닦은 이는 소휘웅 맹주 이후 네가 처음이니까."

거기까지 말한 하무백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멀어져 갔다.

너무도 충격적인 말이었기에 관하경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소휘웅과 자신을 비견하다니.

이게 말이나 될 일인가.

'괜한 오지랖을 부린 건가?'

하무백은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자신이 이런 참견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교룡관에 올 당시의 모습만 생각하더라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하지만 관하경이라는 저 생도는 자신이 참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기본적인 재능을 가진 이가 무서운 집념으로 무공을 갈고 닦았으니.

재능을 떠나, 단천도를 저 수준까지 익힌 이는 정말로 소휘웅 이후로 처음 보았다.

더군다나 소휘웅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저 정도 성취를 이루다니.

물론 저 아이는 도림에서 전수받은 도법이 단천도 하나라 거기에 모든 것을 걸었기에 그럴 것이다.

하무백이 단천도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언젠가, 치열한 전투를 마치고 쉬고 있을 때 소휘웅이 지나가듯 말해줬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 단천참마도가 벽에 막혀 방황에 이르렀을 때, 도림의 모든 도법을 다시 살폈고 단천도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 벽을 넘었노라고.

그 이후로 도림의 도법들을 유심히 살폈고, 소휘웅이 그리 말한 이유도 알게 되었다.

단지 도림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이유가 의문일 뿐.

아마도 중간에 유실된 것이리라.

다만 그 사실을 새로이 깨달은 소휘웅이 아직도 도림에 알리지 않은 이유는 의문이었다.

도림은 소휘웅의 사문이자 근본이거늘.

'아무튼,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이야.'

천하제일의 대협에, 공명정대함으로 인정받는 소휘웅이지만 하무백은 이렇게 가끔씩 그의 음흉한 면을 보았다.

***

"끝났네······."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 구석.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당진산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그의 곁에는 낙우진이 있었다.

동투제 16강에서 떨어진 둘.

각각 남궁지유와 남궁지후, 남궁남매에게 패배했다.

"강하더라. 남궁."

"그러게."

당진산의 말에 낙우진이 대꾸했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무거웠기에, 백리평과 단목운뢰, 연하민은 차마 이곳으로 오지 못했다.

다같이 8강에 진출했다면 함께 웃으며 내일을 준비했겠지만, 저 둘은 오늘로 교룡관에서의 일 년이 끝난 것이다.

"쯧쯧."

혀 차는 소리가 들리고.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하무백이다.

당진산과 낙우진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아, 교관님."

"오셨습니까?"

두 사람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줄 알았다."

하무백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그 말에 두 사람은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피웠다.

패하고 비무대에서 내려올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던 두 사람이다.

그저 패배한 것이 아쉬웠을 뿐.

가진바 모든 것을 쏟아냈기에, 이걸로 되었다 생각했는데.

막상 시간이 흐르니 분하고 억울했다.

"그리고 이러고 있어서 다행이다."

이어진 하무백의 말에 두 사람의 고개가 획 돌아가 하무백에게로 향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진산이 물었다.

"패배에 분해하지 않는다면, 거기까지인 녀석이라는 소리니까."

하무백의 대답에 두 사람의 눈빛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낙우진."

"네."

"남궁지후와는 평소 대련으로 그 실력을 어느 정도 짐작했을텐데, 왜 방패를 들지 않았지?"

"제가 제 실력을 과대평가했습니다."

"그럼에도 너는 강했다. 네가 제대로 무공에 입문한 지는 일 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궁지후를 거기까지 압박했어. 훌륭했다. 내년에는 아마 더 강해질 거다."

질책이 날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칭찬이 날아왔다.

낙우진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며 슬며시 호선을 그리고 올라갔다.

"당진산."

"네. 제가 자만해서 방패를 들지 않았습니다."

당진산이 먼저 대답했다. 어느새 회복해 넉살을 부리고 있었다.

하무백은 피식 웃었다.

"그래. 너는 정말 아까웠다. 방패를 들었으면 이겼을지도 몰라. 당가의 망나니는 이제 사라지고 없는 것 같군."

하무백의 말에 당진산의 볼이 푸들거렸다.

"다들 오늘 수고했다."

멀찍이 서 있는 나머지 세 사람을 향한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하무백은 연무장을 떠났다.

하무백이 사라진 후.

다섯 사람이 한곳에 모였다.

이제야 기운을 차린 당진산과 낙우진 덕이었다.

그렇게 모인 다섯 사람은 내일 8강을 대비해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

밤하늘에 별이 하나둘 빛나기 시작한다.

일찌감치 땀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하설란은 연룡숙 자신의 방 창가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은 하늘을 향해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오늘 비무의 복기.

지금에야 생각하면 아쉬운 장면이 너무 많았다.

자신의 패배 이후 16강에서 당진산이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더더욱.

'나는 왜 그러지 않았을까······.'

온갖 후회와 아쉬움이 몰려왔다.

자신이 패한 후 비무가 계속 진행되는 동안은 몰랐다.

하지만 16강을 마지막으로 오늘의 동투제가 모두 끝나고, 연룡숙으로 돌아오니 달랐다.

자신의 비무가 떠오르고, 16강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맹룡대 칠 조 생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부끄럽고 후회스러웠다.

비무가 뭐라고 그렇게 얼어붙어서는.

"뭘 그러고 있어?"

갑작스레 귀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

마치 바로 곁에서 이야기하는 듯한 음성에 하설란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래다."

다시 한번 생생히 들리는 목소리. 오라버니다.

하설란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연룡숙 앞뜰에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그림자가 있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오라버니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신기한 일이다.

하설란은 당장에 창틀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산월마림에서 익혔던 경공이 지금 발휘되었다.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반가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연룡숙은 여생도들만의 숙소.

남자들의 접근이 엄금된 곳으로, 하무백이 서 있는 곳은 남자가 있어서는 안 되는 장소다.

"내가 못갈 곳이 있을까. 좀 걷자."

하무백은 그렇게 하설란과 연룡숙의 영역을 나와 교룡관 외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실망했느냐?"

하무백의 물음에 하설란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란아. 넌 무공에 입문한 지 고작 석 달이 좀 지난 정도다. 게다가 절맥증까지 앓았었지."

"네."

"하지만 남궁지유. 그 아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무인으로 길러졌다. 너는 오늘 그 간극을 단숨에 뛰어넘은 거다."

"하지만, 제가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도······."

"처음이란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법이다. 너에게는 첫 실전 비무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하설란은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하무백의 말이 더 빨랐다.

"나 또한 그랬다."

"네?"

생각지 못한 말에 하설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첫 실전에서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서 손발이 덜덜 떨렸어. 정신을 차리니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

믿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신위를 보여주었던 오라버니다.

그런 오라버니조차 그런 적이 있었다니.

"너는 오늘 네 실력 이상으로 충분히 잘했다. 그러니 이제 다음을 생각하면 된다."

"네!"

하설란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아왔다.

하무백이 빙그레 웃으며 하설란을 연룡숙으로 다시 데려다주었다.

***

차가운 공기가 천지를 가득 채웠다.

시린 대기만큼이나 청명하고 높은 하늘.

정말로 좋은 날씨였다.

"거, 우승하기 좋은 날씨로구만."

당진산의 말에 맹룡대 칠 조 생도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제 탈락했으니까.

"나말고, 너희 셋 중 하나. 해줄 거지?"

동료들의 시선에 당진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백리평, 단목운뢰, 연하민.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동투제.

8강전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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