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내 사문의 절기지
중앙의 넓은 비무대.
어제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비무대다.
하지만 오늘은 여덟 명의 8강 진출자들이 비무대 주변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 있다.
8강부터는 온전히 이곳에서만 치러진다.
이미 잠룡대, 와룡대, 맹룡대의 생도들이 주변에 가득 모여들었다.
작년 같았으면 잠룡대와 와룡대의 생도들만 모였을 터.
올해는 달랐다.
맹룡대 생도가 무려 넷이나 8강에 올랐다.
8강의 절반이 맹룡대.
잠룡대와 와룡대는 겨우 두 명씩 올랐을 뿐이다.
자신들이 이룬 일은 아니지만, 자신과 같은 곳에 소속된 이들의 성취에 맹룡대 생도들은 은연중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서 오늘 당당히 동투제를 보러 모여든 것이다.
"오늘은 어떨 것 같은가?"
팽도율이 묻자 아무도 답을 하지 않았다.
맹룡대를 무시하기에는 어제 16강에서 보여준 실력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주우명 한 사람뿐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어제 16강에서 패했던 두 명의 생도도 그 실력이 결코 녹록지 않았으니.
맹룡대주 모용진호는 여전히 조용히 있었다.
이 모든 성과가 하무백의 손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알기에, 그저 잠자코 있을 뿐이다.
그런 대주들의 반응에 팽도율은 그저 은근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오늘도 여기에 있는 겐가?"
어제와 같은 자리.
하무백이 벌써 지붕에 걸터앉아 비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손무외는 오늘도 찾아왔다.
"이곳이 가장 잘 보이더군요."
"내 생각도 그렇다네."
"오늘은 또 어쩐 일이십니까?"
"생각보다 재미있더구만."
공손무외의 대답에 하무백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이길 것 같은가?"
"방패를 들었다면 백리평이 이길 겁니다만. 아무래도 방패 없이 싸울 모양이군요."
오늘의 첫 시합은 백리평과 남궁지후의 비무였다.
헌데 전날 16강 전과 달리, 백리평은 검 한 자루만을 가지고 나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남궁지후.
"방패를 드는 게 좋을 텐데?"
남궁지후의 말에 백리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검만으로 널 꺾어야 스스로에게 당당할 것 같아서."
"이기는 것이 곧 정의 아니었나?"
"전쟁과 전투라면. 그런데 이건 비무잖아."
백리평이 그리 답하며 빙긋 웃었다.
남궁지후도 빙긋 웃었다.
이미 대련을 통해 몇 번이나 검을 맞댄 사이 아니던가.
"시작!"
판정관의 외침과 함께 두 사람은 검을 뽑아 들고 서로를 마주했다.
먼저 공세를 취한 것은 남궁지후였다.
그의 손에서 끊임없이 이어져 나오는 창궁무애검법.
백리평은 삼재검법을 사용해 상대의 공격을 모두 막아냈다.
남궁지후는 온 정신을 상대에게 집중했다.
내공은 이미 최대치로 끌어올린 상태다.
여러 번 대련을 해보았기에 백리평이라는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을 이겼지만, 그때마다 석연치 않은 느낌이 있었으니까.
오늘이라면 그 느낌의 정체를 알 수 있으리라.
남궁지후의 검에 더욱 힘이 실리는 순간.
백리평의 검의 움직임이 변했다.
삼재검법의 단순한 검로가 아니었다.
"으윽."
갑작스러운 변화에 순간 두 걸음 물러선 남궁지후.
이어서 날아드는 정신 없는 상대의 공세.
별이 밤하늘을 수놓듯 무수히 날아오는 검의 그림자에 남궁지후는 정신없이 검을 움직였다.
"이건······."
한바탕의 공세를 겨우 막아낸 남궁지후는 얼떨떨한 얼굴로 백리평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검법이었다.
맹룡대 연무장에서의 수련 때도, 그간 동투제에서 보인 그의 비무에서도.
백리평은 남궁지후가 있는 곳에서는 오직 삼재검법만 사용했으니.
"천성검법. 내 사문의 절기지."
백리평이 담담하게 남궁지후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종남의 검법.
천성검법.
종남 최고의 절기라 하는 천성은하검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 역시 제왕검형이 아닌 창궁무애검을 사용하고 있지 않던가.
저런 검공을 여태 숨기고 있었다니.
"그렇군. 동투제는 이미 그 전부터 시작됐던 것인가."
절기를 꽁꽁 감추고 자신과 대련을 했던 백리평.
남궁지후가 대련에서 이기고도 찜찜했던 느낌의 정체가 이것이었다.
"아니. 그저 천성검법의 수련일 뿐이었어."
돌아온 백리평의 대답에 남궁지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구장창 삼재검법만을 사용했는데, 어찌 천성검법의 수련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지금 이 수련의 결과를 확인하는 때지."
잠시간의 대화는 거기까지.
이번에는 백리평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검을 떨쳤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이 떨어져 내리듯.
백리평의 검이 남궁지후의 요혈 곳곳을 찔러 갔다.
상대가 밤하늘의 별이라면, 남궁지후는 푸르른 하늘 그 자체였다.
창궁무애검이 별 하나하나를 지웠다.
챙! 채챙! 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웠다.
전날, 남궁지유과 하설란이 어우러졌던 비무와는 다른 의미의 아름다움이었다.
천성검법과 창궁무애검법이 어우러진 일진일퇴의 공방.
그 누구도 쉬이 우세를 점하지 못하는 막상막하의 대결이었다.
두 사람의 얼굴이 땀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얼굴에는 짙은 미소가 어렸다.
좋았다.
정말로 좋았다.
이렇게 전력을 다해, 자신이 익힌 무공 전부를 펼쳐내며 부딪혀 본 적이 있었던가.
백리평도. 남궁지후도.
그렇게 서서히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대단하구만."
공손무외가 감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으니.
"그렇군요. 이건 제 예상 밖입니다."
비무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이끌어 더욱 상승의 경지로 오르려 하다니.
전장에서 구르면서 강해진 하무백으로서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영역이었다.
얼마 전 사부님이 자신과의 비무로 벽을 넘으셨지만, 그건 사부님이기에 가능한 일이라 여겼음이 니.
"방패를 사용했으면 섭섭할 뻔했어."
공손무외가 말했다.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한 승리를 손에 넣었겠지만, 이런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겠지요. 삼재검법과 방패술의 조합 만사용했을 테니."
하무백이 순순히 인정했다.
'전쟁도 전투도 아닌 비무라.'
하무백은 내공을 귀에 집중해 들었던 두 사람의 대화 중 백리평의 말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자신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성장하며 실행하고 있었다.
상대와의 겨룸이라면 오로지 전장만을 떠올리는 자신과는 달랐다.
'나는 아직도 그 지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군.'
백리평의 그 말이 하무백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것을 일깨워주었다.
'뭐, 서서히 벗어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랬다.
교룡관 맹룡대의 교관을 하면서.
하무백은 전장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조금씩이나마 찾아가고 있었다.
오늘만 하더라도 어떤가.
상대와의 겨룸이 전투만이 아닌 비무도 있음을 깨닫지 않았던가.
그 사이 두 사람의 공방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마치 서로 사전에 짠 듯한 공방.
두 사람은 여전히 무아지경이었다.
채채채챙!
더욱 격렬히 부딪히는 검.
파국은 의외의 곳에서 찾아왔다.
챙!
남궁지후의 검이 백리평의 일검을 감당하지 못하고 부러졌다.
그것은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은 정신을 차렸다.
"어······."
"아······."
아쉬움이 가득한 한탄이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 나왔다.
남궁지후는 부러진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백리평을 보았다.
"졌습니다."
순순히 인정하는 패배.
너무나 어이없고 허탈한 결과에, 이 대결에 흠뻑 빠져 있던 관중들의 입에서도 한탄이 흘러나왔다.
"이런······."
"하."
"아아."
남궁지후는 그런 관중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러진 검편을 주워 들고 비무대를 내려갔다.
두 사람의 검이 부딪혀 부러진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지난 하투제에서는 백리평의 검이 부러졌었다. 아니 박살이 나다시피 했다. 백리평은 그 검편에 부상을 입기도 했었고.
남궁지후는 여전히 그때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자신의 검이 부러져 패배한 것에 한 점의 불만도 없이 순순히 인정하고 내려가는 것이다.
"아······."
오히려 아쉬운 것은 백리평이었다.
방금의 비무에서 무엇인가를 살짝 엿본 듯했으니까.
"쯧. 아쉽구만. 병기의 우열로 결판이 나버리다니."
"그 또한 승부의 한 부분입니다."
하무백의 말에 공손무외는 수긍하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게지. 남궁가의 자제라면 범상치 않은 검을 사용할 텐데. 어찌 병기의 우열에서 밀렸을꼬."
공손무외가 아쉬운 마음에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무백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다.
저 검이 자신이 직접 두드려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는 가슴 속에 삼킨 채로.
백리평과 남궁지후가 가뜩 달군 열기가 비무대 주변에 가득했다.
그들의 비무가 허탈하게 끝났음에도 그 열기는 식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다음 비무도 기대가 되었으니까.
아마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관중들이 가장 기대하는 시합이 이번 비무이리라.
남궁지유.
그리고 연하민.
교룡관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여인의 비무.
그것만으로도 기대가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
혹자는 이화대전(三花大戰)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어느새 남궁지유와 연하민, 하설란을 묶어 교룡삼화라 부르는 이들도 있을 정도였으니.
면사에 가려 제대로 얼굴을 보지 못했음에도.
언뜻언뜻 드러났던 그 얼굴만으로 이미 그리 칭하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
남궁지유와 연하민이 비무대에 오르자 사방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연하민도 검 한 자루만 들고 비무대에 올랐다.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방패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8강에서 방패술을 사용하자고 제안한 연하민.
이제까지의 비무에서 실제로 방패술을 사용한 백리평이 그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방패술을 사용한 것은 상대도 방패술을 사용했기에, 그에 가장 적합한 대응을 찾은 것뿐이야. 우리가 치르는 건 비무야. 상대가 방패를 사용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순수하게 나의 검법으로 승부를 보고 싶어."
"왜?"
연하민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자신은 가장 승리할 확률이 높은 쪽을 제안했건만.
"비무잖아. 져도 되는."
백리평은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 말에 연하민을 제외한 다른 세 사람은 설득되었다.
단목운뢰도 방패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검만으로 자신의 역량을 시험해 보고 싶다고.
밤사이 고민하던 연하민도 결국 그렇게 마음먹으며 오늘 아침 연룡숙을 나섰다.
'그런데 우승하라고?'
문득 오늘 아침 당진산의 너스레가 떠올랐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면사 아래에서 짓는 미소임에도,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가 화사하게 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중들은 그저 입을 벌리고 멍하니 감탄할 뿐.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맞은편의 상대, 남궁지유를 응시했다.
남궁지유 역시 연하민을 응시했다.
그녀는 조금 전 비무의 결과를 다시금 떠올렸다.
자신의 동생이 일대일 비무에서 패했다.
지난 하투제와는 달리 정정당당한 대결에서 패한 것이다.
고작 일 년도 안 된 시간에, 맹룡대의 생도가 이렇게 변하다니.
놀라웠다.
아마도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연하민 역시 그럴 터.
어제 만난 당진산도 얼마나 강해졌던가.
다시 한번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쏟아내야 했다.
한편으로는 기대도 되었다.
조금 전 백리평과 자신의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연하민도 자신과 어울려 줄 수 있을지.
남궁지후와 백리평의 비무를 보며 부럽다는 감정을 느꼈었으니.
부디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천천히 검을 뽑았다.
물론 승리하는 것은 남궁지유 자신이겠지만.
"시작!"
판정관의 외침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