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아직 부족해
주우명은 자신을 뒤덮으려는 매화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주우명의 검 역시 움직이며 매화 한 송이, 한 송이를 부쉈다.
그럼에도 스물네 송이의 매화가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주우명의 태청검법은 영호준의 이십사수매화검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영호준은 이를 악물고 검에 내공을 더욱 불어넣었다.
검은 더욱 어지러이 움직였다.
변화에, 변화에 변화를 더하며 주우명을 압박했다.
주우명이 조금씩 밀렸다.
변화의 극에 이른 이십사수매화검법과 주우명의 태청검법이 상성이 맞지 않았다.
'어서 태극혜검을 펼쳐라!'
영호준은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이미 16강에서 관하경에게 다른 검법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
무당 출신의 교관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것이 태극혜검인 줄 알았다.
무당 최고의 검법.
주우명이 그것을 익히고 있고, 와룡대의 평범한 사 년차 생도인 관하경에게 펼쳤으면, 당연히 영호준 자신에게도 펼쳐야 한다 생각했다.
비록 자신은 일 년차 생도이고, 그녀는 사 년차 생도였다 하더라도 자신이 그녀보다 훨씬 더 강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도림 출신이라 하나 익힌 도법도 평범한 단천도뿐이었고.
그런 상대에게도 태극혜검을 꺼냈으니, 만개의 경지에 이른 자신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감당하려면 당연히 태극혜검을 펼쳐야 할 터.
진짜 승부는 그때부터였다.
그랬기에, 영호준은 더욱더 주우명을 몰아붙였다.
그가 태극혜검을 펼칠 순간만을 기다리며.
주우명은 묵묵히 태청검법을 펼치면서 상대의 공격에 대응했다.
'확실히 상성이 안 좋아.'
시간이 흐를수록, 태청검법이 이십사수매화검법과 상성이 좋지 않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검법을 바꾸면 된다.
주우명이 익힌 검법이 태청검법과 태극혜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내린 재능.
전대 무당제일검 무연진인이 주우명을 평가한 말이다.
자신의 유일한 제자로 주우명을 들였던 이유.
그런 재능을 지닌 제자에게 무연진인은 최대한 많은 무당의 검을 가르쳤다.
가르치는 족족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전부 흡수했으니.
대강 반의반 각의 시간(약 3분 45초 내외).
주우명이 영호준의 검법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었다.
'만개라고는 하지만. 아직 허점이 많다.'
주우명은 사부가 평한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떠올렸다.
'만개부터가 진정한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시작이라 하셨다.'
그렇다면 상대가 스물네 송이의 매화를 전부 피웠다고 해서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주우명의 눈에는 허점도 보이고 있었으니까.
다만 태청검법이 상성이 안 좋았을 뿐.
주우명은 자신이 익힌 무당의 검법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중 상대하기 적당한 것을 선택했다.
관하경의 경우는 태극혜검이 아니면 답이 없었기에, 그것을 꺼내 들었을 뿐이다.
그녀의 단천도는 그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으니.
어떤 면에서는 남궁지후보다도 뛰어났다. 적어도 주우명은 남궁지후와의 대련에서 태극혜검을 꺼낸 적은 없었으니까.
물론 서로 간에 적당히 감춘 대련이긴 했지만.
'유운검법(流雲劍法).'
주우명은 검법을 정했다.
그와 동시에 검의 움직임이 변했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매화를 부숴버리던 태청검법과는 다른 변화.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과도 같이 부드러우면서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검의 변화였다.
굳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변화에 저항하지 않고, 그 변화의 흐름에 주우명의 검이 올라탔다.
바람을 타고 흘러가는 구름처럼.
갑작스레 변화하는 검의 움직임에 영호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태극혜검을 펼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하지만 곧 진실을 깨달았다.
적어도 관하경에게 펼쳤던 것과는 다른 움직임이었으니까.
'태극혜검이 아니야? 이놈이 나를 그렇게 우습게 본다고?'
영호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를 악물었다.
내공을 더욱 끌어올렸다.
검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영호준의 검이 폭풍처럼 주우명을 향해 몰아쳤다.
그러나 주우명의 검은 평온했다.
폭풍이 몰아친다 한들, 구름은 그저 폭풍에 따라 하늘을 노닐 뿐.
더욱이 이십사수매화검법은 그렇게 거칠게 펼치는 검법이 아니었다.
허점이 더욱 커졌다는 의미.
챙! 챙! 챙!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간간이 울려 퍼졌다.
대부분의 공격을 주우명이 전부 흘려냈기에, 커다란 소리가 울리지는 않았다.
대신 어딘가 힘 빠진 듯, 빗맞아 부딪힌 듯한 소리만 울릴 뿐.
"이익."
형호준은 약이 바짝 올랐다.
자신의 전력을 다한 검이 저런 식으로 흘러나가 버리니.
자신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와 버리니.
영호준이 흥분할수록 허점은 커졌고, 주우명이 공략할 부분이 많아졌다.
유운검법은 철저히 부드럽게 움직이면서 이십사수매화검법을 흩트렸다.
검의 움직임이 점점 커졌다.
스물네 송이 매화는 여전했지만, 흐드러지게 핀 꽃이라기보다는 그저 제각각 흩날리고 있는 꽃이었다.
이제 곧 져서 스러질 것만 같은.
그 순간 주우명의 검법이 다시 바뀌었다.
태청검법.
커다래진 허점을 강맹한 기운으로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챙! 채챙! 챙!
갑작스레 변한 상대의 기세에 영호준은 당황했으나, 곧 상대의 공격에 정면으로 맞섰다.
강 대 강의 부딪힘.
주우명이 의도한 바였고, 영호준은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장점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철저히 자신의 의도대로 비무 상황을 이끄는 주우명.
결과는 명약관화였다.
영호준의 손발이 서서히 어지러워지고.
채앵! 푹.
요란한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영호준의 검이 그의 손을 벗어나 빙글빙글 돌다가 비무대 바닥에 박혔다.
주우명의 검이 영호준의 눈앞에 멈췄다.
"이익. 져, 졌다."
인정할 수 없었지만, 인정해야 했기에.
영호준은 이를 악물며 패배를 말했다.
그리고는 짧은 인사 후 몸을 획 돌려 비무대를 내려갔다.
"후우."
주우명은 긴 한숨을 내쉬며 검을 검집에 꽂았다.
그리고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몇 번을 반복했다.
'아직 부족해.'
훌륭한 상대였지만, 달아오른 주우명의 몸을 식히기에는 부족했다.
"흠. 아쉽구만."
공손무외가 말했다.
"경험과 수양 면에서 밀렸습니다. 호승심에 잡아 먹혔어요."
하무백의 평가.
공손무외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에 비해, 성정이 급하구만.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만개에 이를 정도로 익히고서는 그 장점을 오히려 죽여버리다니. 참 안타까우이."
"호승심이 강한그 성정 덕에 짧은 시간 안에 만개의 경지에 오른 것이니.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지요. 이번의 패배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면, 다음 경지로 오르는 것이고, 배우는 것이 없다면 거기까지가 저 친구의 한계인 겁니다."
하무백이 담담히 답했다.
"냉정할 때는 냉정하구만. 자네."
공손무외의 말에 하무백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주우명, 저 아이는 볼수록 참으로 대단해. 무연진인께서 하늘이 내린 재능이라 평할 만하구만."
"무연진인께 직접 들으신 겁니까?"
"지난 전쟁의 인연으로 가끔 서신을 주고받는 정도네. 하늘이 재능을 내려준 아이를 제자로 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네만. 보면 볼수록 적절한 평가다 싶구려."
"훌륭한 친구죠. 여러모로."
하무백이 머리를 작게 끄덕이며 말했다.
***
"후우. 후우. 후우."
단목운뢰는 깊은숨을 연이어 들이쉬고, 내쉬었다.
8강이라니.
자신이 동투제 8강이라니.
차례가 다가왔음에도 아직 믿기지 않았다.
막상 비무대에 올라가려 하니 다시금 심장이 세차게 뛰며, 긴장이 몰려왔다.
툭.
그런 단목운뢰의 어깨를 자신의 어깨로 살짝 치며 범일소가 먼저 비무대로 올랐다.
"응?"
단목운뢰가 그런 범일소의 뒷모습을 보았다.
일부러 그런 것인가? 아닌가?
의도야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범일소가 부딪히고 간 이후 세차게 뛰던 심장이 좀 진정됐다는 것이다.
그 작은 부딪힘이 단목운뢰를 현실로 데리고 왔다.
피식.
단목운뢰는 작게 웃었다.
무엇을 향한 웃음일까? 단목운뢰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웃음이 흘러나왔다.
단목운뢰는 천천히 비무대 위로 올랐다.
범일소와 마주 섰다.
"설마 너와 8강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범일소가 퉁명스레 말했다.
"나 역시."
단목운뢰가 대답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범일소 역시 검을 뽑았다.
"난 대사형과는 다를 거다."
여전히 퉁명스러운 범일소.
단목운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16강에서 그가 청우자를 어떻게 꺾는지 얼핏 보았다.
정신없이 목청산의 공세를 감당하는 와중이었음에도, 옆 비무대의 상황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비록 검영의 숫자는 예순넷으로 목청산의 그것보다 적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청산의 검보다 더 수준이 높음은 알아볼 수 있었다.
검영의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단목운뢰의 눈에 비친 검의 움직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천검파 출신의 생도만 연이어 두 번을 상대하게 된 단목운뢰.
어떤 면에서는 다행인지도 몰랐다.
이미 한번 겪어본 검법을 다시 상대하는 것이니까.
물론 수준은 다르겠지만.
단목운뢰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중단에 위치한 단목운뢰의 검.
삼재검법을 펼치기에, 스스로에게 가장 편한 위치였다.
범일소는 천환천로검법의 기수식을 취한 채, 단목운뢰를 바라보았다.
백스물여덟의 검영을 펼쳤던 대사형의 천환천로검법을 파훼했던 상대.
물론 범일소 자신의 눈에도 보였던 허점이다.
하지만 천검파 최고의 자질을 지녔다는 평판답게, 그 정도 허점이 있다 하더라도 천환천로검법을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무척 뛰어난 수준의 변화였다.
자신도 천환천로검법을 익혔기에 어설프다고 평할 수 있었던 것일 뿐.
이미 알고 있는 검법이니까.
그런데 저 녀석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그곳을 찔렀다.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맹룡대 따위는 기억에서 지웠다.
상대는 16강에서 자신의 실력을 분명히 보여 주었으니.
그랬기에 범일소가 먼저 움직였다.
전력을 다해.
검을 떨쳤다.
청우자의 무릎을 꿇렸던 검영의 숫자.
예순넷.
시작부터 예순넷의 검영이 단목운뢰를 덮쳤다.
단목운뢰는 침착하게 검을 내려긋고, 옆으로 긋고, 발을 바삐 놀려 피하기도 하면서 범일소의 공세에 대응했다.
과연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예순넷의 검영을 모두 감당해냈다.
확실히 청우자보다 강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범일소도 교룡관의 소문은 대부분 듣고 있었다.
그 중, 전반기에 맹룡대 칠 조 전체가 당추에게 박살이 났다는 것도 들었다.
당추 하나조차 감당 못 했던 녀석이 지금은 이렇게 강해져 있다니.
'맹룡대 칠 조.'
거기에는 대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범일소가 다시 검을 떨쳤다.
예순넷의 검영으로 이미 확인을 한 바.
질질 끌 것 없었다.
단번에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수를 내보이기로 했다.
아직 4강과 결승이 남았다.
속전속결로 체력과 내공을 온존해야 했다.
그러자면, 빠르게 전력을 다해서 상대를 쓰러뜨린다.
범일소는 그렇게 전략을 짜고, 실행했다.
순식간에 이백쉰여섯의 검영이 단목운뢰를 향해 날아들었다.
"뭐, 뭐야! 저건!"
상상도 못한 검의 움직임에 목청산이 놀라서 소리쳤다.
패배의 분함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우명과 남궁지후를 보기 위해 관중으로 이곳을 찾았다.
남궁지후의 패배는 의외였다.
상대가 맹룡대 칠 조의 백리평이라는 것에 더욱 놀랐고.
아무리 종남파 출신의 생도라지만.
저 남궁지후가 꺾이다니.
그러다가 곧 수긍했다. 자신도 패했으니, 남궁지후도 그럴 수 있다고 여기며.
주우명은 과연 주우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비무대 위에서 자신의 사제인 범일소가 보여 주는 모습만큼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천검파 최고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자신조차 아직 백스물여덟의 검영을 겨우겨우 펼칠 뿐이다.
그런데, 저 불성실한 사제 녀석이 단번에 이백쉰여섯의 검영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정도 경지라면 이미 천환천로검법의 구 초식을 완성했다는 것 아닌가.
그럴 리 없었다.
천검파 최고는 자신인데······.
목청산의 꽉 쥔 손이 부르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