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이, 이게 대체 뭐야?
잠깐의 숨 고르기 시간.
연하민과 백리평은 천천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조금 전 상황은 그 정도로 아찔했으니.
하지만 연하민은 쉽사리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몇 호흡의 시간이 흐르고.
"간다."
백리평은 간단한 예고 후.
검을 떨쳤다.
다시금 사방을 에워싸며 날아오는 수많은 검의 별무리.
태을보까지 더해지니 별의 폭풍은 그야말로 변화무쌍했다.
연하민은 다시금 전력을 다해 백리평의 공세에 맞섰다.
집중에 집중.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집중력이 최고조에 이르고.
그때 그녀의 눈에 보인 모습은 옆에서 치고 들어오는 백리평의 검이었다.
연하민은 빠르게 몸을 돌리며 검을 떨쳤다.
그러나 그녀의 검은 허공을 갈랐고,
연하민이 몸을 돌렸던 자리로.
휘
백리평의 검이 지나갔다.
몸을 돌리지 않고, 검만 떨쳤으면 다시 한번 위험할 뻔했다.
'또!'
연하민의 눈이 잘게 떨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혼란에 빠진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무백이 두 눈을 부릅떴다.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었다.
하지만 벌써 두 번째.
우연이 아닌 듯했다.
조금 더 지켜보자 마음먹은 순간.
비슷한 장면이 다시 한번 펼쳐졌다.
이걸로 세 번째.
우연일 리 없었다.
하무백이 다시 한번 인상을 썼다.
'지금 수준에서 저런 각성은 오히려 독인데······.'
연하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이 가능했기에, 하무백은 걱정이 먼저 들었다.
자신도 지난 전쟁에서의 경험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능력.
'혈교의 삼장로였던가?'
지난 두 번의 전쟁에서 하무백을 상당히 곤혹스럽게 했던 몇 안 되는 적 중 하나였다.
스스로의 능력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었는지, 떠벌떠벌 말도 많은 녀석이었다.
혈교를 골치 아프게 했던 호천단주 하무백을 자신이 몰아세우고 있다 생각하자, 말이 많아졌다.
스스로 자신의 능력에 대해 떠벌릴 정도로 멍청하기도 했고.
'뭐, 약했으니까. 울분이 쌓였던 거겠지.'
그는 가진 직위에 비해 무공 수위는 낮았다. 절정 이상의 고수였지만, 혈교의 장로 그것도 삼 장로라면 초절정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경지에 올라 있어야 정상이었다.
당장, 사장로가 그랬으니까.
헌데 그는 자신의 특이한 능력으로 그 경지의 차이를 뛰어넘어 삼 장로가 된 것이다.
그걸로 인해 혈교 내부에서 온갖 설움을 겪은 듯했다.
그런 그가 하무백을 순간이나마 몰아붙였으니, 어떤 심정이었을까.
하무백에게 떠벌리는 내내 그 설움과 울분을 터뜨렸다. 그것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랑으로 이어지고.
'뭐, 제 무덤 판 거지.'
그를 상대하면서 긴가민가했던 하무백은 그가 떠벌려 준 그의 능력 때문에 그를 처단할 수 있었다.
'미래시(未來視). 놈이 스스로 그렇게 이름 붙였다 했었지, 아마?'
전투 중에 대략 한 호흡에서 두 호흡 정도의 미래의 일이 그냥 보인다고 했다.
익숙해지고 집중력이 극한에 이르면 세 호흡 뒤까지도 보인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게 뭐? 제까짓게 보면 뭘 어쩔 건데? 하무백은 능력의 정체를 알게 된 후 보든 말든 그대로 박살을 내버렸다.
보았다 한들 본 것에 대응할 능력이 없으면 그냥 부수면 될 일이었으니.
지금 연하민이 혼란에 빠진 움직임을 보면 백리평의 공격보다 한 호흡이 빨랐다.
그러니 당장의 공격이 아닌 다음 호흡의 공격을 먼저 보고 그에 대한 움직임을 취하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각성이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그나마 비무인 것이 다행이랄까.
실전에서 도와줄 이 없는 상태에서 저렇게 각성을 했다면, 아마도 감각의 혼란으로 오히려 크게 낭패를 겪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 죽을 수도 있지.'
실전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리 생각하면 지금 각성을 한 것이 다행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이 녀석들은 대체 뭐야?'
하무백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아래에 모인 다섯 생도.
처음부터 평범한 녀석은 없었지만, 그래도 성장하면서 보여주는 능력들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허어. 갑자기 연하민 저 아이의 움직임이 이상해지는군. 집중력이 떨어진 겐가? 쯧."
안쓰러워하는 탄성을 흘리며, 혀를 차기까지 하는 공손무외.
그는 현재 연하민의 상황이 몹시 안쓰러운 듯했다.
"집중력은 아마 최고조일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미래시가 발현되지는 않았을 테니까.
"헌데 저런 모습이라고?"
하무백의 말에 공손무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현재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고 적응한다면 달라질 겁니다. 그러지 못한다면 저대로 패할 것이고요."
하무백이 담담히 말했다.
"교, 교관님이 알려주시면 안 돼요?"
단목운혜가 간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지금 저렇게 힘겨워하는 연하민이 안타까운 듯했다.
"실전이라면 그렇게 했을 텐데. 지금은 비무 대회다. 내가 그러는 건 반칙이야."
하무백이 단호하게 말했다.
단목운혜는 시무룩한 얼굴로 시선을 다시 연하민에게로 돌렸다.
꽉 쥔 손에 힘이 들어가서였을까?
손가락이 주먹밥을 파고 들어갔다.
***
'이, 이게 대체 뭐야?'
연하민은 정말로 당황했다. 자신의 감각이 계속 틀리고 있었다.
이래서는 무엇을 믿고 움직여야 할까?
눈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으니.
그렇다고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자신은 눈을 감고 상대의 기척만으로 적을 쓰러뜨린다는 전설 속의 고수가 아니었으니까.
그런 연하민을 몰아붙이는 백리평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었다.
벌써 네 번이나 비슷한 장면이 나왔기에 백리평도 눈치를 챈 것이다.
'방금 전까지 네 번째. 모두 그 다음 수에 대한 대응이었다.'
처음의 위험했던 장면도 그랬다. 자신이 정면을 찌른 후 막히면 바로 뒤를 치려 했으니까.
'어떻게?'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백리평이 천성검법을 사용한 횟수는 극히 적었고, 거기에 더해 태을보까지 사용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다.
미리 보고, 예상해서 대응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짧은 비무 동안 검로를 모두 외웠다?
연하민이 천재라 검로를 외울 수는 있다. 하지만 자신 역시 검법을 펼치는 속도를 극한으로 끌어 올려, 검로의 변화 속도가 달라졌다.
그것을 조금 전처럼 딱 맞춰 미리 대응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저 괴물 같은 교관이라면 몰라도.
'하민에게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백리평은 그렇게 단정 지었다.
그리고.
연하민이 그것에 적응하기 전에 끝내야겠다 마음먹었다.
시간이 갈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어쩌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타핫!
백리평이 비무대 바닥을 힘차게 박찼다.
그의 신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태을보에 이어 태을신법까지 펼친 것이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달리며 비무대 전체를 사용했다.
눈으로 겨우 쫓을 수 있는 속도로 움직이며 떨쳐내는 무수한 검의 별.
'아, 아아.'
연하민은 점점 더 혼란에 빠졌다.
그러던 차.
다시 눈앞으로 다가오는 검.
그리고 그 뒤에 있는 검.
이번에는 검이 두 개가 보였다.
두 개의 검을 어떻게 피해야 할까.
정석대로면 더 가까운 것을 먼저 피해야 한다. 하지만 지난 네 번의 경험 때문일까?
연하민은 멀리 있는 검을 먼저 피하고, 그다음 가까이에 있는 검을 쳐냈다.
챙!
정답이었다.
검과 검이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백리평의 신형이 다시 사라졌다.
'치잇.'
연하민에게 변화가 다시 한번 생겼다. 그것도 백리평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백리평은 내공을 잔뜩 끌어올렸다.
빠른 검.
변화하는 검.
거기에 이번에는 힘을 더했다.
더 강한 검.
백리평이 연하민을 폭풍같이 몰아세웠다.
별의 폭풍이 비무대를 가득 채웠다.
그 와중에 연하민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다.
'어, 어쩌면 이건······.'
눈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때쯤.
연하민의 두 눈의 초점이 점점 흐려졌다. 무아지경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백리평도 그것을 보았다.
'무슨.'
그 자신도 남궁지후와의 비무에서 일찍이 경험했던 것.
지금 연하민이 그것을 겪고 있었다.
백리평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동고동락한 동료였지만, 비무에서는 이기고 싶었기에.
백리평의 내공 운용이 바뀌었다.
지금까지 습관적으로 삼재심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어느 무공에도 잘 어울렸으니.
맹룡대에서 합격진을 수련하며, 동료들과 함께 실전을 치르며 그냥 몸에 박힌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지금.
승리를 향한 집념과 간절함이 그 습관을 넘어섰다.
단전의 내공이 격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을심법.
종남의 천성검법과 사상검법에 짝을 이루는 내공심법이 웅혼한 흐름을 만들었고, 검에 실린 위력이 달라졌다.
챙!
채채챙!
챙!챙!
검에 검기마저 서리고 있었다.
백리평 역시 다시 한번 강해진 것이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찬란한 별의 폭풍.
연하민은 무아지경의 상태에서 그것을 모두 막아내고 있었다.
어디서 어떻게 날아올지 보였기에 전력을 다해서 막았다.
그렇게 얼마나 버텼을까.
어느 순간.
챙!
다시 한번 떨어져 내리는 별을 막았고.
텅.
비무대에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연하민이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빈손을 바라보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손아귀의 힘이 다 빠져서, 더 이상 검병을 쥘 수 없는 상태.
그것이 현재 연하민의 상태였다.
그러나 백리평은 멈추지 않았다. 단 한 치의 방심도 허용하지 않는 자세.
그대로 다음 별이 날아와 연하민의 심장 앞에 멈췄다.
"져, 졌습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입을 떼는 연하민.
그리고는 풀썩.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즉시 몸을 훌쩍 날려 비무대에 올라선 하무백.
"어? 교, 교관님?"
힘없는 눈빛으로 하무백을 바라보는 연하민.
"일단 좀 자라."
하무백이 빠른 손놀림으로 연하민의 수혈을 짚었다.
그대로 비무대에 쓰러지기 전에 하무백이 연하민을 안아 들었다.
그리고 마침 비무대로 달려오고 있는 한설빙에게 연하민을 넘겼다.
"데려다가 좀 재워라."
"단주님, 방금 전 그건 언젠가 말씀하셨던······."
"일단 재워라. 완전히 탈진했을 테니까."
하무백에게서 혈교 삼 장로와의 전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던 한설빙이다.
그랬기에 연하민을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비무대로 달려온 것이고.
"네."
하무백의 진중한 말에 한설빙은 짧게 대답하고 그녀를 연룡숙으로 옮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
다들 어안이 벙벙해 하다가.
"우와아아아아아!!"
"멋지다!!!"
" 대단하다!!!!"
어마어마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백리평이 보여준 환상적인 모습에 더해, 그 모든 공격을 막아내던 연하민.
그녀의 면사가 세차게 흔들리며 아름다운 용모가 쉼 없이 드러나고 있음도 느끼지 못하고 있던 관중들이었다.
방금의 비무는 그 정도로 대단했다.
하무백이 비무대에 떨어진 연하민의 검을 주워들었다.
"교관님. 방금 하민의 그건······."
백리평이 무언가 물으려 했지만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다음 비무를 생각해라. 이제 결승이니."
그리고는 몸을 훌쩍 날려 다시 지붕으로 돌아갔다.
백리평은 완전히 기운이 빠진 얼굴로 터덜터덜 비무대를 내려왔다.
승자였으나, 승자 같지 않은 모습.
"후우."
깊은 한숨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시 비무대를 바라보는 백리평.
'아슬아슬했다. 하민이 조금만 더 버텼으면 내가 졌을지도······.'
텅 비어버린 단전을 자신도 모르게 왼손으로 슬쩍 쓸어보는 그였다.
"대단하네. 그렇지, 진산?"
낙우진이 입을 쩍 벌리며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당진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16강에서 탈락했기에, 오늘은 다른 관중들과 함께 관중석에서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침에 분명 같은 조 생도들에게 우승하라고 당부했지만.
지금 이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분했다.
너무도 멋진 모습에.
자신 역시 비무대 위에서 저런 모습을 보이고 싶은 당진산이다.
비무를 치를수록 새로운 경지에 발을 디디며 강해지는 동료를 볼 때면.
자신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며 부르르 떨렸다.
'나도 다시 편을 잡아야 하나.'
맹룡대에서의 수련 후 본파의 검법 경지가 눈에 띄게 상승한 백리평.
어쩌면 자신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 당진산이었다.
그와 재능은 다를지 몰라도, 적어도 수련하는 동안 노력은 다르지 않았다.
평소 뺀질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는 당진산이었지만, 수련에서만큼은 늘 진지했다.
'오늘 편을 좀 들어봐야겠어.'
당진산이 그렇게 마음먹는 순간.
주우명과 단목운뢰가 비무대로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