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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무공교관-147화 (147/312)

147화. 다음은 팔이다

결정을 내린 백리평은 붓을 들었다.

새하얀 종이에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는 내용.

퇴관 신청서였다.

그렇게 모든 내용을 작성하고 곱게 접어 봉투에 넣었다.

본파에서 보내온 전표 역시 다른 봉투에 잘 챙겨 넣었다.

이것들만 제출하면 끝이다.

서탁 위에 나란히 놓인 봉투 둘.

착잡한 시선으로 그걸 바라보는 백리평.

선뜻 봉투를 들어 품에 넣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리해야 함에도.

"후우."

그렇게 일 각 정도 서탁을 바라보던 백리평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손을 뻗어 봉투 두 개를 품에 넣었다.

"가자."

작게 중얼거린 백리평이 방을 나섰다.

우뚝.

문 앞에서 멈춰선 백리평.

뒤를 돌아 잠깐 동안 자신의 방을 눈에 담고는.

문을 닫고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관주각.

그곳에 퇴관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맹룡숙에서 관주각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관주각의 건물을 일별하고는 입구로 들어섰다.

"응? 동투제의 신성 백리평 생도 아니신가? 관주각에는 어쩐 일인가?"

서글서글하면서도 꼼꼼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가 웃으며 백리평을 반겼다.

그의 뒤에 놓인 작은 손수레에는 서류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분명 바삐 어딘가를 가는 것 같았는데, 백리평을 발견하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다가왔다.

"이것을 제출하러 왔습니다."

백리평이 품에서 봉투를 꺼냈다.

관주각으로 걸어오는 동안 모든 미련과 망설임을 떨쳐 냈는지, 그의 움직임에 멈칫거림 따위는 없었다.

봉투를 받아 든 사내는 겉면에 쓰인 글자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퇴관 신청서.

"흐음. 이건 내 선에서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로구만. 따라오게나."

그는 손수레를 내팽개치고는 백리평을 데리고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도착한 최상층인 5층.

관주실 앞이다.

백리평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맹룡대 퇴관이 무슨 큰일이라고 관주실까지 찾아온단 말인가.

"자네가 잘 몰랐던 모양이네만. 퇴관 신청서는 반드시 관주님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네."

백리평에게 그리 설명한 사내는 잠깐 헛기침을 한 후 큰 소리로 외쳤다.

"관주님. 기유찬 위사입니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오게나."

허락은 금세 떨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팽도율은 창가를 바라보며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응? 백리평 생도로구만. 무슨 일인가?"

"이걸."

기유찬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내밀었다.

겉면에 쓰인 다섯 글자를 힐끗 본 팽도율은 담담한 모습으로 안의 종이를 꺼내 그 내용을 읽었다.

"종남에서의 귀환 명령이라······."

나직이 중얼거리는 팽도율.

"이것도 드리겠습니다."

백리평이 품에서 전표가 든 봉투를 꺼내서 공손히 건넸다.

"흠. 종남의 주거래 전장의 전표로구만."

전표까지 확인한 팽도율.

그가 기유찬을 향해 눈짓했다.

그 뜻을 알아차린 그는 조용히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장문인이 왜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 알고 있는가?"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백리평은 멈칫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를 맹룡대에 보낸 것과 같은 이유라 생각합니다."

이번에는 팽도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리평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주 장문인은 야심이 많은 인물이지. 가진 능력에 비해서 말이야."

"···관주님. 말씀이 지나치신 듯합니다."

종남의 제자 앞에서 종남의 장문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백리평으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건 내 사과함세. 미안하네. 내가 분명 잘못했구만."

순순히 인정하는 팽도율. 그 모습에 백리평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가 종남에서 겪은 어른 중, 저렇게 자신의 잘못을 금세 인정하는 이를 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자네, 관칙은 살피지 않았지?"

이어진 팽도율의 질문.

그러면서 서가로 걸어가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냈다.

백리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팽도율의 말이 맞았기 때문.

그저 퇴관 신청서를 관주각에 제출하면 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팽도율은 능숙하게 책의 한쪽을 펼쳐 내밀었다.

"퇴관에 대한 관칙일세. 보게나."

이 두꺼운 책의 내용이 전부 관칙이라니.

심지어 어디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 펼치는 저 익숙한 손놀림.

책을 얼마나 많이 본 건지 종이가 반질반질했다.

백리평은 팽도율이 펼쳐준 쪽을 찬찬히 살피다가 흠칫했다.

명확하게 쓰여있는 한 줄 때문이다.

"그래. 퇴관 신청서를 관주에게 제출하려면, 먼저 담당 교관의 승인이 필요하다네. 하 교관의 승인은 받았는가? 이 신청서에는 아무런 수결이 없네만."

"승인받지 못했습니다."

짧은 대답.

"그럼 그게 먼저일세. 하 교관의 수결을 받아 오면 나도 재가를 해주겠네. 그러니 일단은 가지고 돌아가게나."

팽도율의 말이 이치에 합당했기에 백리평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관주의 집무실을 나왔다.

팽도율은 창가로 관주각을 빠져나가는 백리평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주 장문인. 그대의 욕심이 멀쩡한 종남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겠소이다······."

팽도율이 작게 중얼거렸다.

***

하무백이 정문 너머에 발을 디디는 순간.

"쳐라!"

커다란 외침과 함께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소낙비처럼 내리는 수많은 화살.

하무백은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기습을 하면서 그리 시끄럽게 외치면 쓰나."

그러면서 가볍게 휘두르는 오른팔.

마치 무형의 벽이라도 생긴 것처럼, 날아오던 화살들은 힘없이 허공에 떨어졌다.

하무백 근처까지 온 화살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다음은 무사들이 직접 검과 창을 들고 달려들었다.

나름 합격술을 익힌 것인지 진형을 잘 짠 공격이었다.

그들의 면면을 확인한 궁무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호위단······."

그랬다.

자신의 호위단이, 지금 련에 돌아온 자신을 가장 먼저 공격하고 있었다.

짧지 않은 시간 자리를 비웠다지만, 그렇다고 긴 시간도 아니었다.

고작 그 기간 만에 자신에게 등을 돌리다니.

적어도 호위단주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을 지키다가 목숨까지 잃었건만.

궁무혁의 두 눈이 거세게 떨렸다.

"쉽지 않을 거라 했습니다. 벌써 마음이 꺾이면 안 됩니다."

하무백이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았다.

가볍게 휘두르는 일 검.

그러나 결과는 엄청났다.

진형을 짜 공격해 오던 호위단 무사들의 검과 창이 모두 베어져 두 동강이 났다.

깜짝 놀라는 호위단의 무사들.

자신들의 병기가 두 동강이 났지만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가히 신기였다.

하무백은 담담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은 팔이다."

귀에 그대로 박히는 그의 말.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호위단 무사들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일부 몇몇은 벌써 전열에서 이탈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무백은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리그었다.

"으아아악!"

"우와아아!"

그 모습에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지는 이들이 절반.

이를 악물고 오히려 하무백에게 달려드는 이들이 절반.

결과는 처참했다.

"아악!"

"크악!"

비명이 난무했다.

하무백을 향해 달려들던 이들이 왼쪽 팔꿈치를 잡고 주저앉았다.

그곳에서는 피가 폭포수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팔꿈치 아래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팔이 떨어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팔이 잘린 이들은 울부짖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 정도 고통에 전투 불능이라니."

하무백이 같잖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지 절단의 고통.

이루 말할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이다.

그럼에도 전장에서는 그 통증을 느낄 수가 없다. 아니, 느끼더라도 참고 움직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다음에는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니.

하무백이 보기에 이들은 그저 애송이였다.

궁무혁은 두 눈을 부릅뜨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만천금쇄폭뢰 속에서 살아나오는 모습을 보며 하무백이 상상을 초월한 고수임은 충분히 절감했다.

하지만 그것과 이것은 달랐다.

아무것도 아닌 간단한 움직임만으로 이 많은 이들을 무너뜨리는 신위라니.

현재 이곳에 모인 호위단의 숫자는 대략 백 명으로 보였다.

그들을 무력화하는 데 한 번의 손짓과 두 번의 칼질을 했을 뿐이다.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하무백은 가만히 둘러보았다.

팔을 붙잡고 고통스러워하거나 그대로 쓰러진 이들만 남았다.

도망친 이들은 이미 담장을 넘어 산 아래나 산속으로 달아났다.

"오합지졸이로군요."

간단한 평가.

그러나 궁무혁은 그 평가를 순순히 인정할 수 없었다.

'하 교관님이 너무 강하신 겁니다. 이런 무위 앞에서 어떤 이들이 오합지졸이 되지 않을까······.'

궁무혁은 그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뱉지는 못했다.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앞을 막아서는 사람 중 하무백의 일 검을 막아내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왼팔을 잃은 이가 차곡차곡 늘어났다.

궁무혁은 만물련의 식구들이 팔을 잃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하무백에게 손속에 사정을 둬 달라는 요청을 하지 못했다.

이미 사정을 봐주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목이 아닌 팔을 베어내고 있었으니까.

그래, 죽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그런 생각으로 이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며 뒤를 따를 뿐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대전.

련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만물련의 중심에 있는 전각이다.

하무백은 물끄러미 대전을 바라보았다.

"이 안에 있습니다."

하무백의 말에 궁무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 련의 중심입니다."

"기다리고 있는 듯하군요."

하무백이 걸음을 뗐고, 궁무혁이 뒤를 따랐다.

처음 하무백이 장담한 대로 궁무혁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옷에 먼지조차 묻지 않은 상태였다.

뚜벅뚜벅.

전각 안으로 들어와 복도를 걷는데, 발자국 소리만 울렸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튀어나왔던 무수한 무사들이 무색하게, 아무도 없었다.

"일곱 사람이 기다리고 있군요. 이 전각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고요."

하무백이 기감으로 느낀 것들을 알려 주었다.

궁무혁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결판을 낼 때였다.

그렇게 도착한 대전.

가장 상석에 놓인 태사의.

련주의 자리에 궁도혁이 앉아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셨소이까? 형님."

태사의 주변에 시립해 있는 이들.

한 사람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다른 다섯은 익히 아는 얼굴.

"오 장로."

궁무혁이 담담히 중얼거렸다.

련주와 함께 련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이들.

다섯 명의 장로.

그들이 모두 동생에게 붙은 것이다.

그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면목 없어 하는 이도 있었고, 당당한 이도 있었다.

야망이 가득한 얼굴을 한 이도 있었다.

"오 장로 모두 도혁의 반역에 찬동한 겁니까?"

궁무혁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하무백은 그 곁에서 담담히 있었다.

지금부터는 만물련 내부의 일이다.

지켜본 후 자신의 빚을 어떻게 받을지 그것만 결정하면 된다.

궁도혁은 그런 하무백의 모습을 힐끔 바라보았다.

"반역이라니요, 형님. 련을 내팽개친 무책임한 련주를 대신해 그간 련을 돌보아 온 부련주가 련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뿐이오. 바로 이 내가."

궁도혁은 당당한 얼굴로 그렇게 외쳤다.

"원로원이 인정할 것 같으냐?"

궁무혁의 물음.

"흥. 과거 속에서만 사는 그 늙은이들은 지금 만년묵금철에 홀딱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소이다. 해서 원로원이 자리에 없으니 장로들만의 합의로 처리하면 될 일이오."

련주가 되기 위해서는 오 장로와 원로원의 인정을 동시에 받아야 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는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지만, 궁도혁은 절차대로 자신이 련주가 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련주를 죽이려 한 부련주가?"

"하?"

궁무혁의 말에 궁도혁이 어이없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품속으로 손을 넣는 궁무혁.

꺼낸 것은 만천금쇄폭뢰의 발사통이었다.

"그, 그것은?"

오 장로 중 누군가가 그것을 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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