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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무공교관-151화 (151/312)

151화. 저희 사파입니다

바닥에 마구 흩어져 있던 종이 몇 장을 집어 드는 하무백.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 종이가 잔뜩 있었다. 이건 그중 일부.

궁무혁이 그 종이를 힐끗 보았다.

"그건, 만천금쇄폭뢰의 설계도 중 일부로군요."

궁무혁의 설명에 하무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 수 없는 도해, 그림과 글자의 난잡한 조합으로 보였으니까.

"제가 암어(暗語)로 작성해서 다섯 조각으로 나눠둔 겁니다. 다섯 조각 모두 모아야 암어를 풀 수 있게 해둔 것인데··· 도혁이 녀석이 두 조각으로 암어를 풀어보려 한 모양입니다. 이건 제가 남긴 암어를 그냥 그대로 필사한 것이로군요. 반복해서 베껴 쓰다 보면 무언가 단서를 얻을까 싶어서 시도한 듯합니다."

궁무혁의 긴 설명.

하무백은 그 설명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같은 것을 반복해서 쓴 것이 필사본이라는 생각에 놀랐던 차다.

궁무혁이 확인까지 해주었으니.

하무백의 눈이 다시금 필사한 종이에 머물러 있었다.

보고 있는다 해서 하무백이 그 내용을 알 리 없었다.

다만.

'필사라······.'

잠깐 한쪽으로 밀어뒀던 일이 떠올랐다.

그 때문에 필사본을 처음 보았을 때 놀란 것이다.

'놈들도 분명 필사를 했을 테지.'

그러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들의 눈앞에 그토록 바라마지 않던 비급이 나타났다.

그 비급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최대한 많이 필사를 해두는 게 보통 사람의 대응이니.

하무백이야 몇 번 읽으면 모조리 외울 수가 있어서 딱히 필사라는 것을 한 적이 없었지만.

'하오문.'

대번에 떠오르는 이들.

팽군호를 가둬놓고 그의 수련을 지켜보면서 혼돈혈하멸공을 연구할 때, 틀림없이 필사본을 만들었을 터.

하무백은 비급을 회수하고, 자신의 분노를 보여줌으로써 하오문에 분명한 경고를 했다.

그리고 필사본은 모른 척 넘어갔다.

그들의 대응에 따라 어찌할지 정하기 위함이었다.

필사본을 만들 때는 하무백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몰랐기에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자신이 멸공의 비급에 대해 그토록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손에 들어온 필사본을 폐기하지 않고 계속 연구한다?

그러면.

'끝장을 내야지.'

폐기했다면 하오문과의 은원은 그걸로 끝낼 생각이다.

하무백 자신은 하오문에게 기회를 주었다.

과연 마지막으로 베푼 아량을 그들이 받아들였을지.

사실 하무백답지 않은 자비였다. 어쩌면 하오문주의 딸을 단번에 죽여버린 것에 대한 보상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과연 어찌 되었을까?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한번 확인해 본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절맥의 치료에, 만천금쇄폭뢰로 죽을 뻔하기도 하고, 이어진 동투제까지.

바빴다.

하지만 만물련의 일을 끝냄으로써 이제 바쁜 일은 모두 마쳤다.

교룡관도 휴관기이니.

하오문을 찾아가기 딱 좋은 시기다.

마침 궁도혁의 필사본을 보면서 하오문의 일도 떠올렸겠다.

그렇게 하무백의 다음 행선지가 결정되었다.

'이번 휴관기는 제법 바쁘네. 지난번과 다르게.'

청란도로 돌아가 사부와 설란과 함께 나름 여유롭고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던 지난 휴관기였다.

대부분의 시간을 대장간에서 보내긴 했지만.

헌데 이번 휴관기는 달랐다.

시작부터 이러더니, 해야 할 다른 일이 또 떠올랐다.

"려, 련주님!!"

그때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한쪽 팔을 잃은 성 장로가 급히 처치만 하고 어디론가 다급히 움직였었는데, 그와 관련된 일인 것 같았다.

궁도혁의 집무실로 밀려 들어오는 이들.

"원로원주님."

궁무혁이 가장 선두로 들어온 이를 반가이 맞았다.

궁도혁이 어딘가에 홀딱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했던 이들인가 보다.

"자, 작업장의 출입구가 모두 폐쇄되어 갇혀 있었습니다. 여기 성 장로가 출입구를 개방해주어 겨우 왔습니다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오면서 대강 듣기는 했습니다만."

원로원주 등군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무백이 궁무혁을 보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바쁘실 듯합니다. 이제 제 도움은 필요 없으실 것 같으니, 이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담백한 말.

그 말에 궁무혁이 깜짝 놀라 하무백에게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교관님. 여기까지 오셔서 수고만 하셨는데. 좀 쉬시면서, 제게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셔야지요."

다급한 그의 말에 하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여기까지 함께 온 덕에 제가 할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전 련주님께 큰 도움을 받은 셈입니다. 빚도 갚았으니, 저도 홀가분하게 떠나겠습니다."

궁무혁은 하무백을 말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랬기에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은인의 깊은 은혜는 제 평생에 걸쳐서 갚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만물련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궁무혁은 진심을 담아 정중하게 말했다.

그렇게 한참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등군현을 비롯한 원로원의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잠자코 지켜보았다.

련주가 하는 행동에 연유가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끼어들 때가 아니었다.

"제가 빚을 갚기 위해 행한 일입니다. 그리 생각해 주시니,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짧은 인사를 끝으로 하무백이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신형.

등군현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기척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려, 련주님. 저분은 누구십니까? 이게 대체······."

등군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야기하자면 참으로 깁니다. 그래도 알려드려야겠지요. 일단 수습이 먼저입니다."

궁무혁이 담담히 말했다.

***

"응?"

사해련주 공야장천.

사해대전의 가장 높은 곳, 태사의에 앉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그의 시선이 대전의 입구로 향했다.

수하 하나가 다급히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련, 련주님."

태사의가 자리한 높은 단상 아래에 도착한 수하가 납작 엎드렸다.

단상의 높이만 3장(약 9m).

대전 안의 단상이 라기에는 까마득한 높이였다.

그럼에도 높은 자리에 올라 아래를 굽어 바라보는 것이 공야장천의 낙이었기에 이리 만들었다.

사해련의 총본산을 만들 때, 그가 관여한 유일한 부분이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급해?"

"하오문에서 전서응을 통해 급전이 왔습니다."

"하오문?"

공야장천이 인상을 살짝 썼다.

얼마 전 그놈들이 부린 수작질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도 급전을 보냈헜지.

그 괴물 놈에게 문주의 딸이 죽었다고.

"이번에는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사파 연합인 사해련에서 내치고 싶은 문파다.

하류 쓰레기들이 모여서 만든 문파.

그럼에도 쓸모가 있는 것은 그들의 방대한 지부를 통한 정보력 때문이다.

정파에는 개방, 사파에는 하오문.

강호의 대표적인 두 문파.

사해련에서 하오문을 내치면 정보에서 정파에게 밀린다.

그랬기에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안고 갈 수밖에 없었다.

"쯧. 아무리 우리가 사파라도 적당히 지킬 선이 있건만. 그놈들은 선을 너무 자주 넘어."

공야장천이 중얼거렸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수하의 생각은 달랐다.

'그 선이라는 게 거추장스러워서 사파가 된 것 아닙니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생각.

허나 그런 수하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공야장천의 중얼거림은 계속되었다.

"이미, 사파 놈들한테 선을 지키라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선을 넘었다가 그놈하고 엮이면 그놈이 미쳐 날뛸 텐데. 내가 막아줄 수가 없거든."

귀를 후비며 중얼거리는 공야장천.

'그놈이 누구길래.'

가끔씩 련주의 중얼거림에 등장하는 그놈.

이곳까지 헐레벌떡 달려온 수하는 대체 그놈이 누구인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놈 이야기가 나온 다음에는 항상 따라 나오는 말이 있었다.

'이제 나가봐야겠군.'

"전서는 두고 가봐라. 후."

귀를 후비던 손가락에 묻어 나온 귓밥 가루를 가볍게 불어 날린 공야장천이 그 손을 앞으로 뻗었다.

허공섭물로 전서를 가져오는 그.

수하는 조심히 뒷걸음질 쳐서 밖으로 물러났다.

"군사."

공야장천의 나직한 부름.

그러자 대전의 단상 옆에 있는 문이 열리며 중년인이 나타났다.

사해수사(邪海秀士) 문인백송.

사해련의 모든 대소사를 관장하는 이였다.

그랬기에 련주인 공야장천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이곳, 대전 옆에 별실을 만들어 업무를 보고 있었다.

대전에서 깎아지른 듯한 산세를 보는 것을 즐기는 공야장천 탓이었다.

형산(衡山).

중원 오악 중 남악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험준한 산이다.

지난 두 번의 전쟁 끝에 사해련은 형산 이남을 손에 넣었다.

호남성의 형산 이남 지역과 광서성, 광동성, 귀주성은 사해련의 영역이었다.

그렇다고 이곳에 정파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리한 정파들 역시 자신들이 사해련의 세력권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사해련의 총본산이 형산에 자리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곳이 사해련 세력권의 최전방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련주가 험준한 산을 좋아한다는 점.

"이놈들이 전서를 왜 보냈을까?"

문인백송에게 대뜸 질문을 던지는 공야장천.

"읽어 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난 우리 군사의 통찰력이 궁금해서."

"그런 것에 제 통찰력을 사용하기에는 제가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에잉. 재미없기는. 쯧."

문인백송의 반응에 공야장천은 혀를 차며 전서를 펼쳤다.

아직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듯 봉인은 훼손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오문주가 사해련주에게 보내는 급전이었기에 중간에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것이다.

전서에 수작질을 했을 수 있기에 그 부분에 대한 검수는 마친 후에 공야장천에게 전해졌다.

"피독주는 지니고 계시지요?"

"그 잡것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전서에 독을 발랐을까?"

"저희 사파입니다."

공야장천의 물음에 문인백송이 담담히 답했다.

"쯧. 항상 지니고 있으니 걱정 말게나. 내가 그 사파의 대장이니."

만독을 물리친다는 천고의 보물, 피독주.

혹시 모를 독살의 시도를 대비하여 공야장천은 그것을 항시 지니고 있었다.

찬찬히 전서의 내용을 살피는 공야장천.

이윽고 얼굴을 찡그렸다.

"하아. 이것 봐라? 이것들이?"

"왜 그러십니까?"

"이놈들 사고 친 거 같은데?"

공야장천이 전서를 팔랑팔랑 흔들며 말했다.

"무슨 사고요?"

"필사본을 만들었다네."

전후사정을 모두 자른 말.

그 말에 문인백송이 얼굴을 찡그리더니 이윽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런 방법도 있었군요. 멸공의 필사본이라. 제가 미처 범인(凡人)들의 한계를 계산하지 못했습니다. 제 실책입니다. 제 기준으로 범인을 바라보면 안 되는데 가끔 이런 실수를 저지르는군요. 반성하고 정진토록 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한번 보면 다 외워지는 걸 필사본을 귀찮게 왜 만듭니까? 그 시간에 다른 걸 보지."

문인백송의 대답에 공야장천이 인상을 썼다.

"군사. 자네 지금 상당히 재수 없었어."

"헌데, 그 괴물도 범인은 아닌 모양이군요. 하오문과 그 난리를 칠 때, 비급만 회수해서 돌아갔으니··· 아마 저와 비슷한 실책을 저질렀겠습니다. 헌데 하오문 놈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멸공의 분석은 제대로 안 되고 있고. 언제 그 괴물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문주가 불안해진 모양이군요."

문인백송은 전서를 한 자도 보지 않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것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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