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오랜만이야
송호신이 데려간 주점은 상당히 괜찮았다.
오늘 장안 거리의 분위기 때문인지 텅 비어 있었음에도, 주인은 영업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하무백은 만족스러운 야식을 먹을 수 있었다.
송호신도 야심한 밤의 허기를 채웠다. 계산은 각자가 했지만.
어두운 거리로 나왔을 때.
하무백이 한 곳을 바라보았다.
"슬슬 포기한 모양이네."
송호신은 정말로 궁금했다. 대체 누구를 쫓고 있는 것인지, 어떻게 그저 한 번 바라보는 걸로 목표의 움직임을 알 수가 있는 건지.
"경공은 좀 어때?"
하무백이 송호신을 보며 물었다.
"네? 그··· 조금 하는 정도입니다."
사실은 특기였다. 그러나 눈앞의 이 남자는 그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이 절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달려 나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최대한 겸손하게 답했다.
"뭐, 잘 따라와라."
고개를 끄덕인 하무백이 가볍게 땅을 박찼다.
빠르게 달리는 그 뒤를 쫓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쳐야 겨우 거리가 벌어지지 않았다.
그냥 이 핑계로 다른 곳으로 가버릴까 하는 유혹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련의 명령도 명령이었거니와, 이제는 미칠 듯한 호기심을 해결하고 싶기도 했다.
모처럼 따라오라고 해줬는데, 편하게 곁에서 볼 수 있는 것을.
그래서 송호신은 사력을 다해 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곳.
눈앞의 현판을 보며 송호신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풍화객잔.
네 글자의 현판.
오늘 자신과 하무백이 출발했던 곳 아니던가.
결국 이곳에 오려고 장안 곳곳을 그렇게 누비고 다녔단 말인가.
"재미있어. 이곳이라니."
하무백이 빙그레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들을 바라보는 객잔주 황찬.
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어려 있었다.
'어째 아무 일 없이 떠난다고 했다······.'
사실 문의 높으신 분으로 보이는 이가 은밀히 이곳을 찾아왔을 때, 절반쯤은 포기한 심정이었다.
분명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징조였으니.
그래도 혹시나 했다.
별일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런데 지금 낮에 떠났던 특급 경계 대상이 돌아왔다.
오랜 세월의 경력을 가진 그의 직감이 말했다.
이제 감당할 수 없는 큰 사달이 날 것임을.
하무백이 그런 황찬을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막 때려 부수고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쇼."
그러고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황찬은 순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그가 향한 곳은 계단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일 층 식당 공간의 한 가운데.
그곳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송호신은 한 발짝 떨어져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두리번거렸을까.
하무백이 체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못 찾겠군. 어쩔 수 없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하무백은 주먹을 들어 바로 바닥을 내리쳤다.
콰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닥에 사람 두 명은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이 뻥 뚫렸다.
황찬이 떨리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때려 부수지 않겠다고 한 게 조금 전이건만, 시작부터 바닥을 박살 내다니.
'역시 무림인 놈들 말은 믿을 게 못 돼.'
아끼는 객잔이 망가져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았다.
황찬의 시선은 계단 옆의 문에 걸려 있었다.
저렇게 빤히 보이는 곳에 문이 있는데, 못 찾겠다고 바닥을 부숴버리다니.
그래서 황찬은 한 가지 사실을 놓쳤다.
이곳의 바닥이 어떤 바닥인지를 잠시 잊은 것이다.
송호신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간단한 주먹질로 바닥에 저런 구멍을 뚫는 무위도 놀라웠지만, 조금 전 하무백이 한 말을 똑똑히 들었기 때문이다.
"바닥은 왜······?"
"아, 이 밑에 있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찾아도 출입구가 안 보이니 별수 있나. 뚫어야지."
송호신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일까? 하무백이 친절하게 이유를 답해줬다.
그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송호신이 허겁지겁 그 뒤를 따랐다. 어디로 튈지 모를 저 인물의 뒤를.
"오랜만이야. 예초아. 몇 년 만이지?"
하무백이 진심으로 반갑다는 듯 한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에 송호신은 흠칫했다.
그럴 수밖에.
장안에 배치된 정보원이니만큼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으니.
'젠장. 하오문주? 이 인간 대체 뭐야? 아무리 특급 경계 대상이라지만.'
사해련주와 사해련의 군사를 옆집 친구 부르듯이 부르는 데서 보통 인간은 아니구나 싶었다.
헌데 하루 종일 쫓아다닌 이가 하오문주였다니.
정보에 있어서는 사파 제일의 문파인 하오문이다. 게다가 여기는 그들의 총타가 있는 장안.
장안에서만큼은 예초아의 움직임이 극히 은밀해, 그녀의 위치를 아는 이는 정말로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였다.
하무백이 바라본 곳.
중년미부 한 명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하무백을 노려보고 있었다.
곁에는 노인 한 명만 있을 뿐이다.
하오문주라기에는 너무도 단출한 모습.
"대체 어떻게 여길 찾아온 거지?"
예초아의 물음에 하무백이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봤잖아. 뚫고 들어왔지."
덤덤한 하무백의 대답.
손가락을 따라 위를 쳐다보던 송호신은 두 눈을 부릅떴다.
나무 바닥을 부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단단한 돌로 만든 천장이 보였다.
적어도 한 자(약 30cm)는 되어 보이는 두께다.
'미친. 이걸 간단한 주먹질 하나로 이렇게 뚫었다고?'
하무백이 너무 간단히 부수고 들어와, 그저 나무 바닥이라 여긴 자신의 짧은 생각을 잠시 반성한 송호신이다.
"멀쩡한 입구 놔두고 왜!"
분에 겨운 예초아의 모습.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곳은 단순히 풍화객잔의 지하가 아니었다.
온갖 기관 장치들을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다.
그랬기에 예초아가 최후의 장소로 정한 곳.
헌데 천장을 부수고 내려오면서 그 안배가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이었으니.
"입구를 꼭꼭 숨겨놨던데?"
그럴 리가.
눈에 아주 잘 띄는 곳에 문이 떡하니 있건만.
기관 장치로 유인해야 했는데, 계획대로 될 리 없었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문으로 덜컥 따라 들어올 정도의 바보로 보였나? 내가? 크."
하무백의 웃음에 예초아가 부들부들 떨었다.
"네, 네 놈이······."
"아니면 고작 저런 기관 따위로 날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야? 하오문주쯤 되는 인물이?"
싸늘한 하무백의 목소리.
물론 막을 수 있다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발은 늦출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터.
그 사이 비도를 통해 장안을 벗어날 계획이었는데.
하무백이 그런 예초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극명륜안이 운용되고 있는 상태.
"기회를 줬건만. 익혔군."
짧은 말.
"아."
그 말에 탄성을 흘린 것은 이호법이었다.
그 짧은 말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린 것이다.
"자네. 역시 필사본은 알면서도 놔둔 것이었군."
그러지 않을까 했다.
"그 기회는 영소혜의 목숨값이었다."
이어진 말.
그 말에 예초아의 두 눈이 다시금 표독스럽게 변했다.
"이, 빌어먹을 놈이 감히 내 딸을!!!"
악에 바친 외침.
그 목소리에는 하무백을 저주하겠다는 일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딸을 죽을 자리에 보낸 건 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 안 죽일 수 있었잖아! 그런데 죽였잖아! 힘이 있다고! 강하다고! 네 멋대로 하잖아! 그래서 우리도 강해지겠다는 건데!! 그게 뭐가 잘못이라고! 이렇게 지독하게 괴롭히는 거야!!!"
분노와 울분, 서러움, 자포자기.
온갖 복잡한 심경이 다 담겨 있는 고함이었다.
하무백은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너희도 너희보다 약한 이들에게는 제멋대로 하지 않았던가? 너도 잘 알잖아. 이게 강호라는 걸. 사파는 더 적나라할 텐데?"
하무백의 물음에 예초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사실이니까.
약육강식.
사파 강호의 절대적인 진리 중 하나였다.
"적어도 난 기회를 세 번이나 줬다. 딸에게 나라는 인간에 대해 제대로 알리지 않은 네 덕에, 영소혜는 그 기회를 모두 버렸고. 그렇지 않나?"
하무백의 시선이 이호법에게로 향했다.
그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다.
이호법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당시 가장 먼저 하무백에게 당해서 나가떨어졌었으니. 물론 그럼에도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지만.
"응? 말을 해 봐."
하무백의 재촉.
이호법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기회를 주었소."
"내가 준 기회가 끝나면 그 이상은 없어. 그것도 알려줬어야지. 그냥 미친놈이라고만 하면 그런 걸 모르잖아. 하오문주의 딸인데 설마 자신을 죽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내가 준 기회를 모두 차버렸는데. 어떻게 하나. 말한 대로 해야지."
하무백의 말에 예초아는 몸을 덜덜 떨었다.
저것이다.
강자만이 가진 여유. 그리고 폭거.
하오문에는 저것이 없었다.
많이 알고 있을 뿐, 강자가 아니었기에.
약육강식의 사파 무림에 있기에는 한없이 불리한 것이다.
약하기에 강해지고자 뭉친 이들이 하오문이건만, 여전히 그들의 힘은 부족했다.
이호법의 시선이 송호신에게로 향했다.
"자네, 사해련의 정보원이지? 송호신이던가?"
그 말에 송호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하오문의 총타가 있는 장안인 만큼 사해련의 정보원에 대해서는 그들이 다 파악하고 있으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서로 알고서 눈 가리고 아웅 하고 있는 셈이었다.
"련의 대답은?"
"나에게는 그저 이 자를 감시하라는 명만 내려왔을 뿐이오."
"어떻게?"
"무슨 일을 저지르든 절대 개입하지 말고 멀리서 지켜봐라."
송호신이 담담히 자신이 받은 명령을 이야기해주었다.
이호법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버렸군. 우리 하오문을 버렸어."
모든 것을 포기한 음성이었다.
"애초에 멸공에 욕심을 안 냈으면 될 일이었다."
하무백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으으으."
그때 예초아의 악문 잇새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하무백은 그런 예초아의 모습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경고한다. 하지 마라. 그냥 익힌 게 아니라, 이미 선을 넘었네. 그러게, 그건 너희가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아니라니까. 쯧."
하무백의 경고에도 예초아는 전신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지난 며칠.
불안에 시달리던 예초아는 해서는 안 될 결정을 내렸다.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 분석하고 개량하는 작업을 진행하던 멸공을 버리고, 멸공 그 자체를 그냥 익힌 것이다.
그것도 속성으로.
이유는 간단했다.
하무백이 온다는 공포와, 강해져야 한다는 절박함.
그 두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내가 이래서 멸공을 증오해."
예초아가 멸공을 본격적으로 운용하자 무극명륜안에 그 성취가 보였다.
십일 성.
대성이자 암혈강시가 되어버리는 십이 성 직전이었다.
속성의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내달리면, 재능에 따라 이렇게 순식간에 성취가 올라 익힌 자를 강시로 만들어 버리는 무서운 무공이었다.
예초아의 두 눈이 새파랗게 물들었다.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었다. 하오문에서 나름 개량한 멸공을 익혔던 흔적으로 두 눈이 새파랗게 물든 것이다.
일반적인 멸공과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그녀가 멸공을 익혔고, 지금 그것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두 번째 경고다. 하지 마라."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예초아의 신형이 사라졌다.
유유미종보!
하오문주의 독문무공이 펼쳐진 것이다.
혼돈혈하멸공을 운용한 유유환영공은 그 위력을 극대화했고, 유유미종보는 그야말로 환상의 미로를 만들어냈다.
예초아는 그렇게 하무백에게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턱.
그러나 너무도 허망하게 하무백에게 잡혔다.
"어, 어떻게······."
예초아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멸공을 십일 성까지 익히고 운용을 했건만, 첫 일 검에서 막혀버리다니.
극성을 넘어선 유유미종보를 펼쳤건만.
그럴 수밖에.
"성과가 아주 없지는 않았나 보네. 십일 성에서 의도적으로 성취 속도를 늦췄어. 마지막 이성 한 가닥을 남기는 데는 성공했나 보군. 저주를 제거해서 암혈강시가 되는 것을 멈추는 데는 실패를 한 것 같지만."
하무백이 그런 예초아의 혼돈혈하멸공을 살피며 말했다.
작은 성과가 있었기에 다른 이들과 달리 그녀의 두 눈이 파랗게 물든 것이었다.
하무백이 팔을 휙 휘둘러 예초아를 던졌다.
쾅!
그대로 석벽에 부딪힌 예초아.
"크윽."
그녀의 입으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경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