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자, 잔인한
"언제 온다고 하는가?"
종남의 장문인 주재승.
그가 자신을 수행하는 이대제자에게 물었다.
"아직 출발했다는 연락이 없었습니다. 장문인."
이대제자는 공손히 대답했다.
그 말에 주재승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직? 돌아오라는 명을 내린 지가 언제인데. 쯧. 어찌 된 일인지 알아보거라."
"네."
주재승의 짜증 어린 명령에 이대제자는 허리를 숙이고 물러나 헐레벌떡 달려갔다.
멀리 교룡관에서 일어난 일을 이곳에서 알아본다고 알 수 있을까만은.
교룡관에 교관으로 파견된 이들과는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으니 그쪽 소식을 살펴봐야 했다.
그런데 때마침 어제 백리평이 직접 종남에 전한 소식이 도착해 있었다.
내용을 파악한 이대제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뭐라더냐?"
주재승이 여전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이, 교룡관에서 퇴관 절차가 이루어지지 않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뭐야? 그게 무슨 개소리야?"
명문정파, 그것도 정파무림을 대표하는 구파일방 중 한 곳인 종남파의 장문인답지 않은 언사였다.
"관칙 상 담당 교관의 승인이 있어야 중도 퇴관이 가능한데, 그··· 백리평의 담당 교관이 부재중이라 승인이 안 되고 있다 합니다."
"허. 한낱 교관 따위의 승인이 없다고 종남의 장문인인 내 명을 따르지 않아? 미쳤군."
"그, 그것이 교룡관주가 담당 교관의 승인이 있어야 보내준다 했다고······. 그게 관칙이라 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 이대제자가 장문인의 노화(怒火)에 우물쭈물 주눅이 들어 말했다.
"교룡관의 관주 따위가 뭐라고!"
"패, 팽가의 팽도율 대협이 관주입니다."
순진하고 착한 이대제자는 또 바로 대답을 했다.
그 말에 주재승이 고개를 획 돌리고는 이대제자를 노려보았다.
"너."
"······예."
"이름이 뭐냐?"
"곡풍입니다."
"그래. 당장 꺼져라. 네 사부에게 말해서 다른 아이 보내라 이르고."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서슬 퍼런 장문인의 모습에 이대제자 곡풍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빌어먹을 놈. 팽가 따위가 뭐라고. 멸공에나 의지하려는 멍청한 가문이거늘. 겨우 그딴 곳의 사람이 관주인 주제에. 교룡관의 관칙 따위나 핑계로 대다니."
백리평을 향한 말일까. 방금 물러난 곡풍을 향한 말일까.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주재승이 분노를 토했다.
"안 되겠다. 안 되겠어. 제 발로 오지 않겠다면 끌고 와야지. 여봐라. 누구 없느냐!"
주재승이 큰 소리로 외쳤다.
허나 곡풍이 떠나고 아직 그를 대신할 제자가 오지 않은 상황.
"빌어먹을."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은 주재승이 직접 움직였다.
그렇게 향한 곳은 종남파의 집법원이었다.
"중산! 어디 있느냐!"
집법원 누각의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큰 소리로 외치는 주재승.
장문인으로서의 체통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도 없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장문사형."
최상층인 오 층에서 자신의 업무를 보던 집법원주 소중산이 다급히 내려왔다.
"당장 죄인을 잡아 와라. 장문인의 명이다."
붉으락푸르락한 주재승의 얼굴을 확인한 소중산이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곳에는 듣는 귀가 많았으니.
자신의 집무실로 주재승을 데려간 소중산이 차를 내오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장문사형."
"평이. 그놈이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 것이오?"
"난 분명 돌아오라 명을 내렸다. 놈은 장문인의 명을 어겼어. 명백한 죄다. 당장 잡아들여라."
주재승의 두 눈이 노화를 쏟아내고 있었다.
"후우."
그 모습에 소중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이사형은 대체 왜 이럴까.
대사형은 그러지 않았었건만······.
"그 문제는 나도 이미 보고를 받았소. 어제 평이의 서신이 도착했으니. 교룡관의 관칙으로 퇴관 절차를 밟지 못해 돌아오는 것이 늦어진다 하더이다."
"난 분명 당장 돌아오라 했다. 그깟 교룡관의 관칙이 무어라고!"
주재승의 짜증에 소중산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막무가내의 모습.
과연 대종남의 장문인에 어울리는가 하는 후회.
하지만 당시에는 방법이 없었다.
장문인인 대사형이 전장에서 전사했으니, 종남의 안정을 위해서는 빨리 새로운 장문인을 뽑아야 했고, 가장 순위가 높은 이가 지금 눈앞에 있는 이사형 주재승이었으니.
게다가 그는 자신의 세력을 결집해서 주변을 압박하기까지 했었다.
상황과 명분, 힘까지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장문사형. 진심이십니까?"
소중산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진심이 아니면?"
"교룡관은 정천맹의 무관입니다. 즉, 교룡관의 관칙은 정천맹의 맹칙에 속한 규칙이고요. 정천맹의 구성원인 우리 종남이 교룡관의 관칙을 무시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 말은 곧 정천맹의 맹칙을 무시한다는 의미입니다. 알고 계시는 겁니까?"
길게 이어진 소중산의 말.
그 말에 주재승이 찔끔했다. 저렇게까지 확대해석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교룡관이라면 우습게 보였지만, 정천맹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그, 그래도 장문인의 명을 어긴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당장 데려와라."
잡아들이라는 말이 데려오라는 말로 바뀌었다.
주재승도 한발 물러선 것이다.
"후우. 알겠소이다. 재촉은 해보겠소."
그렇게 소중산의 대답을 들은 주재승이 집법원을 떠났다.
창문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소중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종남이 어디로 가려나······."
답답한 노릇이었다.
***
"하지 마라."
다시 한번 흘러나온 하무백의 서늘한 말소리.
그러나 예초아는 그런 하무백의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달려들려 했다.
"설마 장안성 밖으로 딸을 내보냈다고 이렇게 막 나오는 건가?"
우뚝.
하무백의 이어진 말에 예초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영소혜가 이공녀라 했었지? 그렇다면 대공녀도 있을 터. 오늘 열심히 숨바꼭질할 때 장안 밖으로 내보낸 딸을 믿고 있는 거냐?"
예초아가 하무백을 노려보았다.
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혼자서 움직인 놈이.
지난번 팽가 때와는 달리 하무백은 홀로 움직였다.
달고 온 거지새끼들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장안을 이렇게 속속들이 알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그녀는 하무백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감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기에, 감히 상상도 못 한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생각보다 빈곤했다.
생각의 확장이라는 것도,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지난번 같은 자비는 없어. 네가 딸을 빼돌린 이상 나는 그 딸도 확인해야 한다. 멸공을 지녔는지, 또 익히지는 않았는지."
하무백이 차가운 눈으로 예초아를 바라보았다.
그 말에 이호법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무백이 이번에는 정말 끝장을 볼 생각으로 하오문을 찾은 것이다.
"어, 어떻게 하라는 거냐?"
예초아의 말소리가 잘게 떨렸다.
하나 남은 딸이다.
그 아이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멸공의 구결을 본 이를 모두 죽여야지. 너도 물론이고. 그래야 멸공의 존재를 지울 수 있겠지. 필사본을 회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무백의 차가운 목소리.
"자, 잔인한······."
치가 떨렸다.
예초아는 분노와 허탈이 뒤섞인 복잡한 눈으로 하무백을 쳐다보았다.
"물론, 그건 네가 마지막 경고를 무시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 말에 이호법이 감았던 눈을 떴다.
여지가 있는 말이었다.
이호법은 좀 전의 상황을 복기했다.
하무백이 마지막 경고라고 했고,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리고 문주는.
멈췄다.
하지 않았다.
하무백의 경고를 어기지 않았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호법의 시선이 하무백에게로 향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그냥 물러가는 건 아니야. 여기까지 놀러 온 것도 아니고. 필사본은 회수한다. 그리고 하오문 전체를 뒤질 거야. 혹시 숨겨놓은 것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초아가 이를 악물었다.
치욕스러웠다. 하오문이 일개 개인에게 항복한다는 것이.
하지만 저 괴물은 어찌할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홀로 장안에 와서는 제 손바닥 들여다보듯 모든 걸 보고 있었다.
이런 놈은 암살도 불가능하다.
하오문에서 보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살수라 하더라도 하무백에게는 금세 발각되리라.
"그리고. 이미 익혔으니 방법이 없군."
하무백이 물끄러미 예초아를 바라보았다.
"뭐, 뭘?"
"내가 할까? 네가 할래?"
하무백이 물었다.
예초아는 질문의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럼에도 다시 말했다.
"뭘 말하는 거야?"
"단전."
짤막한 대답.
"그걸 왜!"
그 순간 하무백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인다 싶더니, 오른손이 예초아의 복부를 파고들었다.
"커억. 아악."
비명을 지르는 예초아.
하무백은 다시 물러났다.
"네가 하기 싫다고 하니 내가 대신 해줬다."
"이, 이··· 빌어먹을 새끼······."
원독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지금까지의 그 어떤 때보다 원망과 독기가 넘쳐흐르는 목소리.
단전이 파괴되고 내공이 사라지면서.
예초아의 얼굴에 주름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중년미부의 모습이었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름의 미모를 유지해주던 주안공이, 내공이 사라지면서 깨진 것이다.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던 예초아는 없었다.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보통의 중년 여인만 있을 뿐.
허망하고 허탈했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애를 쓴 결과가 이것이라니.
강호에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멸공을 모아서 연구하고, 예초아 자신의 몸으로 조금씩 시험했었다.
그러나 멸공의 저주를 없애지 못했다.
그래서 온전한 멸공을 구하려 하였다.
그 과정에서 작은 딸을 잃었다.
그렇게 얻은 멸공으로 연구를 거듭하여 겨우겨우 작은 성취를 이루었다.
여전히 저주를 없애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길이 보이는가 싶었다.
그 순간 저 괴물의 위협이 다가왔다.
살아남기 위해서 연구를 멈추고 바로 멸공을 익혔다.
연구는 살아남은 다음을 기약하며.
그런데 이게 뭔가.
단전이 파괴되고.
내공이 사라졌다.
멸공은 빼앗긴다.
예초아의 두 눈에서 통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무백의 시선이 이호법에게로 향했다.
"필사본은?"
"여기 있소."
이호법은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품에서 필사본을 꺼내서 건넸다.
애초에 그는 멸공의 연구를 반대하던 쪽이었다. 문의 결정과 흐름에 따라 여기까지 떠밀려 왔을 뿐.
오히려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하무백은 펼쳐서 내용을 살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삼매진화로 불태웠다.
"다른 건?"
"그게 마지막이요. 연구에 사용한 것은 우리가 폐기했소이다."
하무백이 물끄러미 이호법을 바라보았다.
협조적이었다.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는 하오문주 예초아와는 다르게.
그의 신색에서 그가 완전히 포기하고 굴복했음을 알 수 있었지만.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물은 푸르고 하늘도 푸르다. 물은 깊고 하늘은 높다. 푸르름은 같으나 그 방향이 반대이니."
갑자기 흘러나온 하무백의 말.
이호법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오? 그건?"
그 모습에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멸공의 비급을 본 적이 없는 게 맞군."
이호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예초아의 반응은 달랐다.
흘리던 눈물이 순식간에 멎었다. 대신 두 눈을 부릅뜬 채 하무백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네, 네, 네놈도 익혔구나! 그렇지! 이 빌어먹을 놈! 제 놈도 익혀놓고 비급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그렇게 잔인하게 굴어! 이 천하에 벼락 맞아 죽을 놈이!"
예초아의 입에서 온갖 욕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방금 하무백이 이호법을 향해 중얼거린 말은 멸공의 구결 중 일부였기 때문이다.
하무백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예초아를 바라보았다.
"내가 익혔을 것 같으냐? 단전이 깨졌으면 멸공의 기운도 사라졌을 텐데, 사리 판단이 안 되는가?"
하무백이 싸늘하게 물었다.
"허면 네놈이 그 구결을 어떻게 안단 말이냐!!"
"일부만, 아주 일부만 몇 개 봐뒀다. 그래야 읽어보거나 익힌 놈년들을 찾아내지. 구결의 일부만 들어도, 익힌 것들은 지금 네가 보인 것과 같은 반응을 보이거든."
하무백의 말에 이호법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도가의 경전에나 나올 법한 말이, 설마 멸공의 구결 중 일부였다니.
"이제 어떻게 하실 거요?"
이호법이 물었다.
어쨌든 하오문은 하무백에게 패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나는 일단 너희 대공녀를 확인하러 가보긴 해야 하는데. 멸공의 뒤처리를 나 혼자 하는 건 솔직히 버겁기는 해. 뭐, 너희 덕분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뭐요?"
이호법이 되물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만 내려오는 게 어때?"
하무백이 자신이 뚫어놓은 곳을 향해 말했다.
"헐헐. 오랜만일세."
하무백의 말이 끝나자마자 위쪽에서 창로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