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상관 안 한다며?
훌쩍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신형.
백발, 백염의 인자한 인상을 한 노인이었다.
그의 모습을 본 송호신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다.
그리고 장안에 있을 리 없는 인물이었다.
"여, 염사(炎邪) 어르신······."
염사 화유군.
사파십대고수 중 일 인으로 현재 사해련의 호법 중 한 사람이었다.
"영감이 여긴 어쩐 일이야?"
하무백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요 근처 사해련 소속 문파들 좀 챙기러 다니고 있었지. 헌데 자네가 온다고 급히 좀 가보라고 해서 말이야. 거, 문인 군사가 어찌나 재촉을 하던지. 얼마 전에 겨우 장안에 도착했다네."
"상관 안 한다며? 근데 애들 잔뜩 몰고 왔네. 뭐, 쟤가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기에 따라오는 녀석들이 있을 줄은 알았지만."
송호신이 찔끔했다. 하무백을 따라 움직이면서 표식을 남겼는데, 역시나 저 인간은 알면서 모른 척한 것이었다.
화유군은 열화문이라는 문파의 문주이기도 했다.
"나이가 드니, 혼자 다니기는 힘들어서 애들이랑 같이 다니고 있었지. 자네 만나러 간다고 하니 부득불 따라온 걸세. 헐헐."
화유군의 너스레에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말은 잘한다."
"그런 거 아니겠나. 자네가 보통 예측이 어려운 인물이어야지. 우리야 상관 안 한다고는 했지만, 자네가 기분 상해서 덤벼들면 이쪽도 곤란하거든."
"누굴 미친놈 취급하는구만."
하무백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송호신과 하오문의 이호법은 더 어이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맞는 것 같은데······.'
'미친놈 맞잖아!'
두 사람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속마음이었다.
"아무튼, 온 김에 일 좀 하지?"
하무백의 말에 화유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답했다.
"하오문의 처리 말인가?"
"너희 소속이잖아. 멸공을 처리하는 것도 너희 일이고."
맞는 말이다.
정천맹과 사해련 사이의 협정이었다.
각자 정파와 사파에서 멸공으로 인한 사고가 터졌을 때는 각자가 책임지고 수습하는 걸로.
그랬기에 지난번 팽가의 일도 정천맹에서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번에는 사해련 차례인 것이다.
"맞는 말이긴 하네만, 그러려고 온 건 아닌데······."
"그럼 그냥 내가 다 죽여?"
하무백의 물음.
"사실 그래도 딱히 상관없긴 하지."
화유군이 빙그레 웃는 얼굴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인자한 인상으로 웃음 짓고 있어도 그의 본질은 사파.
잔인한 성정이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무백의 시선이 예초아와 이호법에게로 향했다.
"들었지? 나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사해련에서 너희 버렸네."
하무백은 더 볼일 없다는 듯 화유군에게서 시선을 뗐다.
그리고 예초아와 이호법을 바라보며 섰다.
"오늘. 하오문은 강호에서 지워진다."
선언과도 같은 하무백의 말.
그 말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조금 전에 분명 멸공을 본 이들만 죽인다고 했었다. 그마저도 경고를 어기지 않았기에 행하지 않겠다 했고.
그런데 이렇게 순식간에 말을 바꾸다니.
그것도 정파 놈이.
저놈은 미친놈이 맞았다.
"자, 잠깐!"
그때 끼어든 것은 화유군이었다.
저놈은 하오문을 지운다고 하면 정말 그렇게 할 놈이었기에.
"왜? 나보고 알아서 하라며?"
하무백이 귀찮다는 얼굴로 화유군을 쳐다보았다.
"아니, 이건 말이 다르지 않은가? 내 아까 듣기로는 멸공을 보거나 접한 이들만 죽이겠다고······."
화유군의 말에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미친놈이 말 바꾸는 게 대수일까."
"아니, 자네가 왜 미친놈인가!"
화유군이 놀라서 외쳤다.
그러나 하무백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방금 미친놈 취급했잖아."
화유군은 하무백이 조금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러니 미친놈이 되어 줘야지."
그리 말하는 하무백의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곤란했다.
심히 곤란했다.
화유군은 이러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사해련주가 그에게 지시한 일은 따로 있었다.
하무백의 손에 하오문주가 제거되거든, 적당한 이를 하오문주로 삼아 적당한 무공 비급을 전해주라는것.
그런데 저놈이 하오문을 없애버린다면?
하무백의 손을 빌려 귀찮은 일을 해결하려던 그의 술책에 큰 차질이 생겨버린다.
저놈은 한다면 한다.
그게 어떤 일이든.
지난 전쟁에서 숱하게 겪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도 해냈고, 모두가 미쳤다고 한 것도 해냈다.
그래서 저놈은 미친놈이다.
"아, 알겠네. 뒷일은 우리가 정리하도록 하지."
결국 화유군이 항복했다.
송호신은 이제는 더 놀랄 것도 없다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화유군이 어떤 인물인가.
염사라는 별호가 말해주듯, 그야말로 화염같이 뜨거운 성정을 지닌 이다.
인자한 척 허허 웃고 있지만, 본성은 그게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하무백 앞에서는 그저 한없이 푸근한 노인네로 보였다.
그의 성정이라면 불같이 화를 내야 정상인데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전전긍긍.
대체 저 미친놈은 뭘까?
"진작에 그러지 그랬어. 멀쩡한 사람 미친놈 만들지 말고."
하무백이 그리 말하며 한쪽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눈짓했다.
처리하라는 의미다.
"후우."
화유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미친놈하고 엮이면 아무튼 피곤해.'
그의 짜증 어린 시선이 예초아와 이호법에게로 향했다.
"예초아. 넌 본련으로 압송한다. 지은 죄가 크니 앞으로 햇빛은 못 볼 거다."
"강해지려 한 게 뭐가 잘못이라고!"
예초아가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그래, 그건 잘못이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이야, 걸리지 말았어야지. 그것도 특히 저 인간에게는. 그게 네 죄다."
멸공을 대하는 사해련의 태도를 알 수 있는 말이었다.
하무백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저들에게 넘긴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들어 와라."
화유군의 말에 그의 수하들이 속속들이 떨어져 내렸다.
다섯 명만 있던 공간이 금세 십수 명의 사람으로 가득 찼다.
"알아보라 한 건?"
"여기 있습니다."
열화문의 수하 중 한 사람이 작은 책자를 화유군에게 내밀었다.
"이게 여기 흑무대 지부에서 조사한 건가?"
"네."
화유군이 종이를 넘기며 묻는 말에 수하가 답했다.
책자가 작고 얇았기에 그는 그것을 금세 다 보았다.
그리고는 마뜩잖은 얼굴로 이호법을 바라보았다.
"쯧."
가볍게 혀를 차는 화유군.
"사람이 없네. 너."
"네? 네."
갑자기 돌변하는 상황에 적응을 못 하고 있던 이호법이, 화유군의 부름에 놀라서 답했다.
"이제부터 네가 하오문주다."
"네?"
이호법이 다시 한번 놀랐다.
예초아 역시 마찬가지.
"뭘 놀래? 하오문주는 사해련 뇌옥에서 평생을 썩을 건데. 문주 없이 그냥 그대로 있으려고?"
"이익. 문주를 왜 사해련에서······!"
예초아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얼굴로 외쳤다.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자신의 후계자가 남아 있었다.
장안 밖으로 피신한 큰딸.
"저, 대공녀가 계시······."
이호법이 무언가 말하려 할 때, 화유군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저 인간이 쫓아간다며. 어찌 될지 모르잖아. 혹시라도 그 대공녀가 멸공을 익혔다면 역시나 이 꼴이 돼서 뇌옥에 갇혀 썩겠지."
그 말에 예초아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사하실 수도······."
이호법의 말에 화유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설혹 무사하다 해도. 멸공을 익힌 죄인의 딸이야. 사해련에서 문주로 인정할 리 없지 않은가. 이 답답한 친구. 남들은 서로 문주 하겠다고 난리일 텐데. 왜 자네는 안 하려고 난리야. 그냥 해."
"내정간섭이야! 아무리 사해련이라지만 도가 지나치다!"
예초아가 악을 썼다.
내공을 모두 잃었기에 그저 고함만 치는 것이다.
이제 목소리도 다 쉬었다.
"예초아는 멸공을 소지했고, 익혔다. 그래서 그 죄를 벌하는 과정이니. 내정간섭이 아닐세."
화유군의 말은 궤변이었다.
하오문주를 벌한다 할지라도 차기 문주는 하오문에서 정해야 했다.
사해련이 아닌.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고. 련이 하오문의 운영에 간섭할 여력은 없으니까. 그저 적당한 인물을 찾아줄 뿐인 거야. 우리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저 친구가 가장 적당한 인물이라는 거. 그게 전부다."
그러면서 화유군이 예초아에게 자신이 보던 책자를 던졌다.
"직접 확인해 보든지."
예초아는 그 책자를 집어 들었다.
빠르게 넘기는 그녀의 표정이 각양각색으로 변했다.
설마 사해련에서 하오문의 정보를 이 정도로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정보에 있어서는 자신들이 사파 제일이라는 자부심이 무색했다.
그리고 체념한 얼굴로 책자를 내렸다.
"어때? 내 말이 맞지 않은가?"
화유군의 물음에 예초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화유군이 품에서 또 다른 책자 하나를 꺼냈다.
그것을 이호법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문주가 된 걸 축하하는 선물일세."
얼떨떨한 얼굴로 일단 책자를 받아 드는 이호법.
그리고 표지에 적힌 제목을 보고는 책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혀, 혈해귀사장(血海鬼死掌)……
그 목소리에 예초아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가만히 있던 하무백도 반응했다.
그럴 수밖에.
혈해귀사장.
사파오대장법 중 하나로 꼽히는 절기 중의 절기였으니까.
혈해귀사장은 혈해파라는 문파의 독문절기였으나, 지난 마교와의 전쟁 때 혈해파가 멸문하면서 실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혈해파는 사파 서열 십오 위의 거대 문파였었다.
그런 절기의 비급이 남아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것을 하오문에게 그냥 제공했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이러려고 와놓고는. 누구한테 귀찮을 일을 떠넘기려고."
하무백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결국 화유군이 이곳에 온 것은 새로운 하오문주를 앉히고, 저 무공을 전해주기 위함이었다.
이 생각은 아마도 문인백송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리라.
하오문이 강함을 갈구하며, 약함에 대한 한으로 멸공에 손을 대는 사고를 쳤으니.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혈해귀사장 정도로 만족하고.
무려 사파오대장법 중 하나인 혈해귀사장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같은 사고를 친다면?
아마 공야장천이 직접 하오문을 지울지도 몰랐다.
사해련도 천하의 정보를 수집하는 데 하오문을 이용했기에 한 번 더 기회를 준 것이다.
직접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하기에는 들어가는 비용과 노고가 너무 컸으니.
차라리 하오문을 집중 감시하면서, 하오문이 얻어오는 정보를 이용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아무튼 여우 같은 인간. 그런데 이거 소문나서 너도 나도 멸공 익히겠다고 덤비면? 난그러면 하나도 안 봐준다?"
하무백의 말에 화유군은 여전히 헐헐거리며 웃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잊었나? 하오문 아닌가. 제일 잘하는 것이 정보를 모으고 소문을 퍼트리는 건데, 적당히 잘하겠지. 안 그런가? 응? 그런데 자네 손에 든 그건 뭔가? 허. 혈해귀사장이라니. 지난 전쟁에서 혈해파가 멸문되면서 실전되었을 텐데······. 어디서 그리 귀한 비급을 얻었는가?"
능청스러운 화유군의 모르쇠에 하무백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예초아는 원망 가득한 눈으로 화유군을 바라보았다.
"왜, 왜 이제야······ 진작에 이랬었으면······."
"자네의 그 한과 몸부림 덕에 이제라도 이걸 얻은 게야. 멸공에 손을 댄 것이 자네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 아니라 정녕 하오문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렇게라도 강해지게 된 것을 기뻐해야지. 자네의 희생이 있었네만."
화유군의 말에 예초아는 복잡한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난 이제 간다."
그때 하무백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 말에 예초아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어디로 간다는 것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몰라! 그, 그러니 제발······."
"그건 일단 보고 판단하지."
하무백이 몸을 훌쩍 날리며 말했다.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