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어떻게 할 건데?
장이걸.
종남파의 일대제자로, 종남에서 교룡관에 파견한 잠룡대 교관 중 한 사람이다.
지금 그가 교룡관주 팽도율을 찾았다.
그 본의로 찾은 것이 아니다.
본파에서의 압박 때문이다.
정확히는 사숙인 장문인 주재승의 압박.
그도 원치 않는 곳을 찾아와 관주 팽도율을 대면하고 있었다.
"장 교관, 그래. 무슨 일인가."
"본파의 요청 때문에 찾아왔습니다."
"응? 나한테 전해진 요청은 없었는데?"
팽도율의 물음에 장이걸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저게 절차에 맞는 방법이었다.
요청할 것이 있으면, 종남파에서 직접 교룡관으로 요청서를 보내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교관을 통해 말을 전한다라.
이건 교룡관과 관주를 무시한 처사였다.
"송구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장이걸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아닐세.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래, 무슨 요청인가?"
"···백리평 생도를 삘리 퇴관 처리해달라고 합니다."
"거기에 관해서는 백리 생도가 종남에 자세한 사정을 설명해서 보냈다고 들었네만?"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재촉이 들어온 것이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낯이 뜨거웠다.
그도 그럴 것이 집법원에 있는 동기가 은밀히 소식을 전한 탓이다.
백리평을 잡아 오라며 장문인이 집법원을 한번 뒤집었다고.
물론 집법원주가 잘 다독여 보냈다고는 했지만.
이게 정파를 대표하는 구파일방 중 한 곳인 종남이 맞는지 의문일 지경이었다.
"담당 교관이 부재중이라 승인이 늦어지는 만큼, 관주님의 권한으로 퇴관 처리를 해주시길 바란다는 요청입니다."
장이걸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 말에 팽도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묵묵히 있었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장 교관."
"네."
"휴관기이니, 자네도 곧 본파로 돌아가겠지?"
"네. 사흘 뒤에 돌아갈 예정입니다. 가급적 그때 백리평 생도와 함께 돌아올 수 있도록 하라고 본파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그도 난감한 상황이라는 것을 은연중 팽도율에게 알린 것이다.
"헌데 만약 자네가 종남파에 가 있는 동안 자네 담당 생도가 나에게 와서 퇴관을 요청했네. 자네가 본파에 돌아가 있으니 휴관기가 끝나야 승인이 가능할 테고. 그런데 내가 관주의 권한으로 퇴관을 승인해준다면, 자네는 어떠하겠는가?"
지극히 합당한 물음이다.
자신 역시 교관을 담당하고 있는 생도.
자신의 승인 없이 불쑥 담당 생도가 퇴관한다면.
아마.
무척이나 섭섭할 듯했다.
지금까지 동고동락한 시간이 얼마이던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본파에는 잘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해해주니 고맙구만."
장이걸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관주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렇게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려던 장이걸은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다른 곳을 향해 걸었다.
맹룡대의 연무장.
텅텅 비어 있었다.
일 년차 생도에게는 휴관기이고, 이 년차 생도들은 곧 산월마림으로 떠난다.
그 전 마지막 훈련을 대연무장에서 제갈명 교관에게 받고 있을 테니.
고요했다.
아니 고요해야 했다. 그런데 작은 소음이 들렸다.
소음이 들리는 곳을 향해 가니 점점 커지는 소리.
칠 조의 연무장이었다.
그곳에는 생도 여섯 명이 구슬땀을 흘리며 수련에 한창이었다.
장이걸은 감탄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았다.
동투제의 결과는 요행도 우연도 아니었다.
과연 필연이었다.
현재 교룡관에서 자발적으로 수련하고 있는 생도는 이들이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니.
장이걸의 시선은 자연스레 백리평에게로 향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본파의 이대제자이니 장이걸에게는 사질뻘인 아이였으니.
가만히 보았다.
수련하고 있는 것은 삼재검법.
허나 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맹룡대 칠 조의 아이들이 삼재검법을 주로 사용하는 것은 이미 동투제에서 보아 알고 있었다.
'백리 사숙이 항상 말씀하셨지. 검의 시작도 기본이요, 끝도 기본이라고.'
왜일까.
저 삼재검법이 백리 사숙이 그토록 강조하던 검의 기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섯 생도는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수련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장이걸은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런 아이의 재능을 죽이기 위해 다시 본파로 불러들이겠다니.
'종남은 어디로 가려는 걸까. 겨우 찾은 평화에 너무 빨리 젖어드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워.'
장이걸의 얼굴이 어두웠다.
***
"헉. 헉. 헉. 십호법님. 대체 얼마나 더 달려야 하나요?"
청색 무복을 입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십호법이라 불린 노인은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대공녀. 가능한 멀리, 가능한 빠르게 가야 합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요?"
"괴물이 쫓아올지도 모릅니다. 문주께서는 훗날을 대비해 대공녀를 탈출시킨 겁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이다.
장안은 여전히 평화로웠다. 강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훗날을 대비한 탈출이라니.
지금 자신이 어머니와 십호법, 이 둘과 같은 강호에 살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 그래도 잠깐만 쉬어요. 도저히 더 못 달리겠어요."
대공녀의 말에 십호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일 각만 쉬어가겠습니다."
급하게 장안을 빠져나오느라 말도 구하지 않았다.
그저 경공을 최대한으로 펼칠 뿐이었다.
하오문주의 절기인 유유미종보는 보법이자 경공으로, 그 속도가 매우 빨랐기에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
"이쪽으로 가면 감숙성으로 가는 건가요?"
하오문의 대공녀 영소향이 멀리 풍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일단 새외로 피해야 할 듯합니다."
침통한 얼굴로 말하는 십호법.
그는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곳에 마지막 희망이 담겨 있었다.
문주도, 이호법도 모르는.
오직 자신만이 아는.
그랬기에 대공녀를 수행할 호법을 뽑을 때 자원한 것이다.
"고릉까지만 가면 됩니다. 그곳에서는 말을 구할 생각이니 그 뒤로는 좀 편하실 겁니다."
생각에 잠긴 얼굴로 영소향이 묵묵히 들었다.
잠시 후 입을 열었다.
"역시 신공 때문인 거죠?"
훗날을 대비한 탈출의 이유가 될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없었다.
신공이라 칭하지만, 아직은 신공이 아닌.
그 근본이 멸공이라는 것은 영소향도 알고 있었으니까.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어쩌다 죽었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순간 영소향은 깜짝 놀랐다.
하나의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다.
멸공과 동생, 그리고 탈출.
"설마 그가 장안에 온 건가요?"
하오문이 그의 도착 소식을 접했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영소향을 탈출시키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그녀는 그의 도착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한 것이다.
그 뒤로는 그저 십호법의 재촉에 묵묵히 경공을 펼쳐 달렸을 뿐이니.
"그렇습니다."
십호법이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하오문의 불구대천의 원수.
허나, 하오문의 힘으로는 아직 복수를 할 수 없는 적, 하무백.
사실 영소향은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하무백은 자신의 동생을 죽인 원수가 맞다.
하지만 그 전에 하오문에서 멸공에 손을 댄 것도 맞다.
정사가 한뜻으로 합의한 전 강호의 금기에 하오문이 손을 댄 것이다.
그 정도 일을 저지를 때 그 정도의 각오도 없었을까.
애초에 영소향은 멸공의 연구를 반대했다.
그랬기에 일선의 일에 영소혜가 나선 것이다. 동생은 강한 하오문을 만든다는 이상에 찬성하였으니.
"대공녀. 우리는 반드시 돌아와서 복수해야 합니다."
십호법은 눈시울이 붉어져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소향과 대화를 하는 동안 감정이 복받친 듯했다.
"어떻게 할 건데? 고작 둘이서?"
그때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두 사람은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가 있었다.
하무백.
대체 어떻게.
그가 지금 여기에 있단 말인가.
아니, 저 자가 여기에 있다는 말은 곧······.
"어, 어머니는 어떻게 한 거죠?"
영소향이 다급히 물었다.
하무백이 하오문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는 순간, 그의 초상화를 수없이 보며 얼굴을 익혔기에 보자마자 알았음이니.
"어떻게 됐을까?"
하무백이 되물었다.
그 물음에 영소향은 불안한 듯 눈을 세차게 떨었다.
온갖 안 좋은 상상들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무백의 시선이 십호법에게로 돌아갔다.
"그보다 내가 관심이 있는 건 조금 전 네가 한 말이야. '반드시 돌아와 복수를 하겠다'라. 뭔가 믿는구석이 있나 봐?"
사나운 눈빛이다.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소리.
영소향은 자신을 향한 말이 아님에도 오금이 저려 왔다.
"보아하니, 둘 모두 멸공을 익히지는 않았는데."
무극명륜안에 멸공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뭐, 한 번 더 확인해 봐야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사람을 향해 각기 날아가는 하무백의 왼 주먹과 오른 주먹.
"크윽."
"이익."
두 사람은 허겁지겁 몸을 움직여 그 주먹을 피했다.
그러나 한 번이 끝이 아니었다.
집요하게 쫓아오는 권영(奉影).
두 사람은 검을 뽑아 하무백의 주먹에 대항했다.
십여 초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공방이 진행되면 될수록 점점 더 상대하기가 힘겨워지고 있었다.
순간 영소향은 의구심이 들었다.
대체 왜?
하무백이라면 일 초에 자신들의 목을 벨 수 있는 강자다.
이렇게 공방을 주고받는 것 정도는 장난질에 불과할지도 모를.
게다가 처음부터 강하게 나온 것도 아니다.
적당히 피하고 적당히 상대할 수 있을 정도에서 서서히 그 위력을 올려 가고 있었다.
점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럼에도 영소향은 이를 악물고 대항했다.
"꺄악!"
결국은 하무백의 일 권을 감당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여기까지 십육 초. 확실히 익히지 않았군."
하무백이 중얼거렸다.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였지만, 그녀가 사용한 내공은 오직 유유환영공뿐이었으니.
무극명륜안으로는 일 성이라도 멸공을 익혔다면 그 흔적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 살폈을 때 두 사람 모두 멸공의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두 눈이 파랗게 빛났던 예초아 때문이다.
하오문은 미약하게나마 멸공에 변화를 주는 데 성공했다.
저주를 없애지는 못했지만.
그렇다면, 혹시 숨기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에.
상대를 극한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만약 멸공을 익혔다면, 멸공이 발현될 수밖에 없도록.
영소향은 끝까지 아무런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깨끗했다.
'하지만 이쪽은······.'
영소향보다 훨씬 더 높은 경지로 하무백의 공격을 잘 버텨내고 있는 십호법.
벌써 이십 초를 버텼다.
그의 옷이 잔뜩 부풀고 얼굴은 붉게 변했다.
영소향이 나가떨어진 후 더욱 몰아붙이자.
마침내.
그의 두 눈이 파랗게 빛나기 시작했다.
"익혔군."
차갑고도 서늘한 한마디.
"어, 어떻게!"
그 모습에 놀라기는 영소향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 하오문에서 신공을 익힌 이는 오직 어머니 한 사람뿐인 것으로 알고 있었으니.
십호법이 신공의 연구를 책임지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공을 연구하는 이들은 절대 신공을 익히지 않았다.
저주에 빠져서는 앞으로의 연구가 불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익혔다니.
게다가 어머니보다 경지가 높아 보였다.
그것은 하무백 역시 느끼고 있었다.
"네놈이 예초아보다 경지가 높아."
예초아의 멸공의 경지는 십일 성.
암혈강시가 되기 직전까지 최고 경지로 올린 상태였다.
하지만, 하오문에서 개량하려고 연구하던 멸공.
그것의 경지는 십 일성이 아니었다.
예초아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익혔기에, 그것들이 혼종처럼 변형이 되어 작용했다.
헌데 십호법은 달랐다.
이놈은 멸공은 익히지 않았다.
대신 자신들이 연구하던 그 신멸공을 익혔다.
예초아보다 훨씬 높은 경지로.
하무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운용하지 않으면, 무극명륜안으로도 찾을 수 없는 멸공이라니.
'내가 하오문을 너무 과소평가했군······. 아니, 잠깐.'
그때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
설마 싶었다.
아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