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내가 할 말이군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꼬박 하루를 달렸다.
배설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 동안만 멈췄을 뿐.
먹지도 않고 달렸다.
수분 보충은 허리춤에 달린 물통으로만 했다.
그렇게 달리고 달리고 달렸다.
정말로 전력을 다했다.
저놈에게서 도망칠 때는 이리 해야 했다.
정말로 목숨을 걸고 달려야 했다.
죽기 직전까지 달려야 비로소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려 세 번이나 겪었다.
이번이 네 번째.
도문위는 이번에도 하무백에게서 벗어날 수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력을 다해 달렸으니까.
어느덧 해가 졌다.
밤이 깊어졌다.
긴긴밤이 지나고 다시 동녘 하늘이 밝아왔다.
하룻밤 사이에 얼마나 멀리 왔을까.
기분 탓일까, 실제일까.
점점 추워지는 느낌이었다.
쉬지 않았다.
단전의 내공을 끊임없이 두 다리로 보냈다.
내공이 모두 바닥날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려야 한다.
극성으로 경공을 펼쳤다.
그렇게 계속해서 달려 이윽고 열두 시진, 만 하루가 지나려 하고 있었다.
도문위의 단전에 자리한 내공도 슬슬 바닥을 보이려 할 시점.
"헉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다.
도문위는 털썩 주저앉아 바로 운기조식에 빠졌다.
탈진 직전의 상태였기에 빨리 내공을 조금이라도 회복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달려야 한다.
저 악귀 같은 괴물 놈이 얼마나 집요하고 끈질긴지.
혈교가 지난 전쟁에서 패한 원인의 절반은 하무백 저놈에게 있다고, 도문위는 생각하고 있었다.
도문위는 가부좌를 튼 채 서서히 내부로 침잠해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달릴 수 있을 최소한의 내공을 회복한 도문위가 두 눈을 떴다.
이제 다시 가야지 생각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헉!"
깜짝 놀라며 두 눈을 부릅뜨는 도문위.
그의 맞은편에서 바닥에 주저앉아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던 남자가 반가이 손을 흔들었다.
절대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이.
하무백.
그가 빙그레 웃고 있었다.
"어, 어떻게······."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하루를 꼬박 전력으로 달렸건만.
운기조식에 소모한 시간은 반 시진 정도였다.
그런데 고작 그동안에 따라 잡혔다고.
도문위가 알고 있는 하무백의 경공 실력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인정한다.
하무백의 경공도 빠르기는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제법 빠른 것이다.
자신처럼 극도로 빠른 것이 아니다.
심지어 무려 하루를 전력으로 달렸건만.
"뭘 그런 얼굴을 해. 언제까지 도망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줄 알았어, 혈비영."
"어떻게 알았지?"
"내 앞에서 그렇게 꽁지에 불나게 도망치는 인간이 혈비영 너 말고 누가 있지? 세 번 성공했다고 날 너무 우습게 봤어."
하무백이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먼지가 일어 바람을 타고 도문위의 얼굴로 날아갔다.
도문위가 인상을 찡그렸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도문위.
"아무리 그래도 느려터진 네놈의 경공으로······."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
하무백이 빙그레 웃었다.
"너, 하오문에 숨어 있으면서 감이 상당히 떨어진 모양이다. 그간 지난 세월이 얼마인데, 내가 그때 그 실력 그대로일 거라 여긴 거냐?"
서서히 주변을 장악해 가는 하무백의 기운.
진득한 살기가 도문위의 주변에 내려앉았다.
그의 등이 땀으로 축축이 젖어 들었다.
"왜? 다시 한번 도망쳐 보려고?"
하무백이 가소롭다는 듯 도문위를 바라보며 물었다.
"내공은 남아 있고? 전력으로 얼마나 달릴 수 있으려나?"
도문위를 조롱하는 듯한 말투.
그의 얼굴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그의 장기인 경공을 가지고 도발을 당한 탓이다.
"네놈이 아무리 강해도 내가 전력으로 달리면···."
"이렇게 잡혔지."
도문위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하무백이 끼어들었다.
"정녕 자신 있으면 다시 한번 쫓아와 보는 게···."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그랬기에 하무백이 조롱한 것을 이용하려 하였건만.
"내가 왜? 잡은 물고기를 놔줄까? 그런 멍청한 짓을 할 이유가 없지. 더군다나 혈교 새끼를 잡았는데."
살기 가득하게 이를 드러내고 웃는 하무백.
그 모습에 도문위는 절망했다. 저놈이 저리 말했으니, 자신은 이곳에서 끝을 볼 듯했다.
"훗. 기회를 주면 정말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도문위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저 흉신악살 놈이 웬일이란 말인가.
"무얼 하면 되지?"
분명 의도가 있겠지만, 일단 어울려 준 후 살아남는 것이 중요했다.
"한 시진 정도 운기조식, 그리고 반 시진의 기다림. 어떨 것 같아?"
도문위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저 말의 의미는 자신에게 운기조식할 시간을 한 시진이나 주고, 또 반 시진을 기다린 후에 쫓아오겠다는 것 아닌가?
도문위는 속으로 쾌재를 질렀다.
놈이 빨라졌다고는 하지만 열두 시진을 꼬박 달려서 겨우 한 시진 차이로 따라잡았다. 그것도 거의 동시에 출발한 상태에서.
그런데 자신보다 반 시진이나 늦게 출발하겠다니.
하지만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자신에게만 너무 유리한 조건이었기에.
'빌어먹을 놈, 무슨 생각이야······.'
자신보다 느린 놈이 저렇게 여유롭게 불리한 조건을 걸다니. 하무백이 어떤 인간인지 알았기에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하지만 불안감보다 자신의 경공에 대한 자신감이 더 강했다.
'이번에는 운이 좋아 나를 따라잡았는지 몰라도, 다시 하면 다를 거다. 그리고 나에게도 비장의 한 수는 있다.'
이미 감숙성에 들어와 있는 상황.
도문위가 비장의 한 수로 생각하는 것은 감숙성 곳곳에 준비해둔 은신처였다. 어지간해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곳.
당장 가장 가까운 곳이 반나절 거리에 있었다.
그 안에 하무백은 절대 자신을 따라잡지 못할 터.
눈을 데룩데룩 굴리는 도문위를 향해 하무백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영소향. 뭐냐?"
놈은 혼자서 도망쳤다면 진작에 도망쳤다. 영소향이라는 혹을 달고 있었기에 느리게 움직였을 뿐.
그렇다면 그녀에게 무언가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 하무백이다.
도문위는 고민했다. 하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목숨. 일단 살아있어야 후일을 도모하지 않겠는가.
"···예초아의 체질 때문이다."
"체질?"
"그년의 체질이 멸공의 저주에 어느 정도 저항력을 가진 체질이다. 그것이 두 딸에게 전해졌고."
그 대답에 하무백이 눈살을 찌푸렸다.
"주작혈령지체(朱崔穴靈之體)라는 체질이다."
"딱히 뛰어나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당연하지. 오로지 멸공의 저주에 저항력을 가진 것이 전부인 체질이니까."
그 대답에서 모든 것을 파악한 하무백.
결국 놈은 멸공을 연구하고 개량하는 데 예초아와 영소향 모녀를 이용하려 한 것이다.
"그럼 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그것은 멸공이 아니라, 신멸공이라 부르는 그것의 비급이겠군."
"······."
도문위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멸공의 저주를 알면서도 그렇게 집착하다니, 어리석어."
하무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놈 때문이다. 우리 혈교의 불구대천의 원수."
"내가 할 말인데, 그건."
하무백이 살기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교주님이 네놈에게 패한 순간. 혈교의 모든 혈공이 네놈에게는 무용지물임이 증명되었다."
"죽어라 도망만 친 놈이."
하무백의 비아냥에도 도문위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그의 관심은 모조리 살아남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으니.
"내가 네놈에게 복수를 하려면 더 강한 힘을 손에 넣어야 했고, 눈을 돌린 것이 멸공이다. 저주가 내리기 전까지의 엄청난 위력에. 그게 독인 줄 알면서도 마신 거야. 네놈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저주만 없다면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무공일지도 모르는 것이 멸공이다.
십일 성에 이를 때까지의 그 상상을 초월한 성장이란.
하무백이 같잖다는 듯 도문위를 바라보았다.
"고작 그이유라. 가능할 것 같은가?"
도문위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그 후 입을 열어 물었다.
"이제 되었나? 가도···."
도문위의 물음에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놈들은 어디에 있지?"
"누구?"
"살아남은 혈교 잔당들. 십로 네놈들도 몇 놈은 놓쳤었으니."
"······."
하무백의 물음에 도문위는 일순 입을 닫았다.
"모른다."
잠시간의 틈을 두고 나온 대답. 당연히 하무백이 믿을 리 없었다.
"뭐, 좋아. 네놈을 찾았으니 다른 놈들도 찾을 수 있겠지. 그럼 마지막 질문, 지금 네놈이 지껄인 사실을 아는 사람은?"
"······."
다시 입을 닫은 도문위.
"이번에는 제대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이어진 하무백의 말.
"어, 없다. 정말로. 아직은 알릴 단계가 아니었다. 반대가 많았기에."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대답에서 몇 가지 사실을 더 알아냈으니.
"이, 이제 가도 되나?"
하무백이 고개를 저었다.
"뭐, 뭐라! 네놈이 분명······."
발작적으로 외치는 도문위를 보며 하무백이 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운기조식 한 시진. 그것부터 해야지. 난 약속한 건 지킨다."
하무백의 말에 도문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설마 운기조식 하는 중에 허튼짓하는 건······."
"정말로 그렇게 해줄까?"
으르렁거리는 듯한 하무백의 물음.
그 말에 도문위는 곧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조식에 빠져들었다.
하무백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아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눈에 무극명륜안을 운용한 채로.
놈의 내공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눈으로 보았다.
'아직 저놈이 신멸공이라 부른 멸공은 다른 놈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모양이군. 비급도 혈비영 저놈 혼자만 가지고 있고.'
그리 생각하며 도문위의 무공에 집중했다. 운기조식 중 내공의 흐름에서 놈이 익힌 신멸공에 관해 알아내기 위해서.
한 시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도문위가 딱 맞춰 두 눈을 떴다.
"시간은 잘 지키는군."
하무백이 턱을 괸 채로 말했다.
도문위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 시진. 반 시진이다! 약속은 지켜라!"
"난, 한 말은 지킨다니까."
하무백이 짜증 어린 표정으로 말하는 순간. 도문위가 땅을 박찼다.
붉은 그림자를 남기며 멀어져 가는 도문위.
그는 이번에야말로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쏟아부어 달렸다.
하무백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전히 빠르긴 빨라."
피식 웃는 하무백.
"그런데 나는 더 빨라졌어."
사실 극성으로 능광만리행을 펼치고서야 알았다.
더 빨리 달릴 수 있음을.
장안으로 달려오는 동안 최고 속도로 달린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혈비영을 쫓는다는 생각에 오로지 경공에만 집중하고 전력을 다하니,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길이 보였다. 아니, 새로운 경지에 들어섰다.
혈비영 덕이다.
열두 시진을 꼬박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치는 데 집중하니 새로운 경공의 영역이 보인 것이다.
이전에는 아무리 치열하게 놈을 쫓더라도 들어설 수 없었지만.
벽을 넘어 얻은 깨달음이 있었기에 이번에는 달랐다.
열한 시진을 꼬박 달리니 찾아온 더 높은 경지였다.
그랬기에 놈이 운기조식을 하고 일 각 정도 지났을 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반 시진의 여유를 준 이유는 간단했다.
'잡을 수 있다.'
잡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놈에게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어야 최대한 자세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말할 것이었기에.
결코 살려줄 생각은 없었지만, 놈이 확실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정한 반 시진이었다.
운기조식 한 시진 역시 그런 목적에 더해 놈의 무공을 살펴보기 위함이었고.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
놈의 내공의 움직임을 복기하는 사이 반 시진이 흘렀다.
하무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슬 가볼까?"
하무백이 땅을 박찼다.
빛을 능가해 만 리를 간다는 능광만리행.
그 이름의 의미대로 하무백의 신형이 사라졌다.
분명한 것은 도문위가 사라졌을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한 시진 후.
도문위는 두 눈을 부릅떴다.
순식간에 자신을 지나쳐서 앞을 막은 인영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반 시진 뒤에 출발했다면, 불과 반 시진 만에 자신을 추월한 것.
그 말은 최소 자신보다 두 배는 빠르게 달렸다는 것인데, 그런 경공이 있을 리가.
도문위의 자부심 하나는 자신의 경공이 천하에서 가장 빠르다는 것이었다.
정파, 사파, 마교, 혈교를 통틀어서.
그런데 지금 그게 깨졌다.
"난 분명히 약속 지켰다. 네놈이 느린 거야."
"거, 거짓······, 커헉."
무언가 외치려 했지만 도문위는 그럴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날아온 하무백의 검이 그의 목을 베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