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찾고 있는 중입니다
절명한 혈비영 도문위.
하무백은 담담한 얼굴로 그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피 냄새는 싫지만, 그게 혈교 새끼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작은 중얼거림.
동생 하설란 때문에라도 최근 살생을 자제하고 있었다.
사부도 피 냄새를 빼라고 항시 말씀하셨으니.
다만 혈교와 마교 놈들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도문위에게도 말했지만, 불구대천의 원수였으니.
자신과 란이가 거지가 되어 천하를 떠돌게 만든 원흉들이었다.
자신도 어리디어린 나이에, 더 어린 란이를 품에 안고 천하를 떠돌 때.
그때 사부를 만나지 못했다면, 틀림없이 란이는 죽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오래지 않아 죽었으리라.
하무백 남매에게 위지군은 사부였고, 은인이었으며, 어버이였다.
천천히 도문위의 시신에 다가가 그의 품을 뒤지는 하무백.
별다른 건 없었다.
약간의 돈과 도주에 필요한 물품들, 그리고 멸공의 비급.
"신멸공이라고?"
하무백은 비급을 펼쳐서 천천히 넘겼다. 이미 도문위의 내력의 움직임을 본 터다.
놈은 빠른 회복을 위해 멸공을 사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비급의 내용과 내공의 움직임을 맞춰 보니, 얼추 이해가 되었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따위 걸로 저주를 벗어날 수 없지."
머릿속으로 대강 그려 보아도 틀림없이 십이 성 극성에서 저주는 찾아온다.
다만 멸공에 비해 느릴 뿐.
익히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이 하무백의 재능이었다.
"술법이 걸려있는 무공이다. 이건 무공의 이론만 가지고는 절대 해결 못 해."
하무백은 삼매진화를 일으켜 멸공의 비급을 태워 없앴다.
술법.
아무리 혈교의 무공이라 할지라도 무공만으로 멀쩡한 사람을 강시로 만들 수는 없다.
무공을 넘어선 어떠한 힘이 간섭한 것이다.
하무백은 그것이 술법이라 생각했다.
"정확히는 사술, 아니 저주라고 하는 게 맞겠군."
말 그대로 저주다.
멸공에 대해 잠시 생각한 하무백은 걸음을 돌렸다.
이제 교룡관으로 돌아갈 때였다.
하무백은 올 때와는 달리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근처 마을에서 적당한 말을 사서 달렸다.
처음 도문위와 조우했던 곳에는 사흘 가까이 걸려 도착했다.
"역시 없나?"
영소향은 없었다.
아마 하오문으로 돌아갔으리라.
하무백은 무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제 하오문에 볼 일은 없었다.
멸공과 관련된 모든 일을 정리했으니.
자잘한 일이 남아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사해련에서 알아서 처리할 터.
지금부터 진짜 휴관기의 시작이었다.
***
영소향은 형편없는 몰골로 하오문의 총타에 도착했다.
그냥 걸었다.
무작정 걸었다.
해가 지면 걸음을 멈춘 곳에서 자고, 해가 뜨면 걸었다.
그러니 하오문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그냥 거지였다.
그럼에도 미모는 가릴 수가 없었기에 알아보는 문도가 있었다.
"대공녀!"
누군가의 외침에 문도들이 모여들었다.
현재 하오문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는 상황.
이호법 배운산.
아니, 이제는 하오문주 배운산이다.
갑자기 문주가 바뀌고, 사해련에서 나온 열화문이 하오문을 뒤집어엎었다.
하오문의 문도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럼에도 감히 반항하지는 못했다.
이미 예초아가 무공을 잃고 열화문에 잡힌 상태였고, 호법들 역시 배운산을 문주로 인정하고 있었으니.
혼돈 그 자체였다.
영소향이 하오문에 도착한 시점이 딱 그때였다.
그녀의 도착 소식은 즉시 배운산에게 전해졌고, 영소향은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호법님, 아니 이제 문주님이시죠.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가요?"
목욕을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영소향이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공녀께서는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그런 몰골로 돌아오시다니."
두 사람은 서로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
먼저 입을 연 것은 배운산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영소향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서로의 사정을 모두 이야기한 후.
두 사람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마주 보고 있었다.
"하무백······."
"하무백······."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온 이름.
결국 이 사달의 시작도 하무백이요, 끝도 하무백이었다.
아니, 정확히 따지자면 시작은 십호법. 혈교에서 하오문에 잠입한 그 빌어먹을 잡것이었다.
"그놈은 아마 혈교십로 중 십로인 혈비영 도문위일 겁니다."
"어찌 아시는 건가요?"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을 때, 붉은 그림자 같은 기운이 남는 것이 놈의 독문 무공이니까요. 지난 전쟁에서 그걸로 여러 고수들을 닭 쫓던 개 꼴로 만들었지요."
영소향의 이야기 중 붉은 기운이 남았다는 말에 대번에 그 정체를 짐작한 배운산이다.
그는 지난 전쟁을 겪었기에 곧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혈교······."
뿌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영소향의 두 눈은 분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문주님."
영소향이 배운산을 불렀다.
그 호칭이 이호법이 아닌 문주.
이제 그를 새로운 하오문의 문주로 완전히 인정하겠다는 의미였다.
"네. 대공녀."
그럼에도 배운산은 대공녀라는 호칭을 유지했다.
그는 부인도 자식도 없었다.
하오문의 호법으로 살다가 생을 다할 생각이었는데.
상황이 흘러가다 보니 어쩌다 자신이 문주가 되었을 뿐이라 생각했다.
"제가 혈해귀사장을 익힐 수 있도록 허락해주세요."
영소향의 부탁에 배운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십시오. 그리고 훗날 문주가 되셔야지요."
하오문주 배운산은 자신이 잠시만 문주의 자리를 맡겠노라 생각기로 했다.
대공녀 영소향마저 사해련으로 끌려간다면 방법이 없겠지만.
십호법으로 위장하여 잠입한 혈교의 십로 혈비영 도문위의 수작임이 밝혀진 이상, 그녀가 사해련으로 갈 일은 없을 듯했다.
더욱이 그것을 밝혀낸 이가 하무백이라면.
"일단 그의 행적을 먼저 찾아야겠군요. 그가 사해련에 대공녀의 이야기를 전해주어야 대공녀께서 이곳에 있으실 수 있습니다."
배운산의 말에 영소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문주님. 그리고 저는 더 이상 대공녀가 아니니, 예를 거두어 주세요."
이미 사해련이 어떻게 하오문에 간섭을 하게 되었는지 모두 아는 상황.
영소향은 배운산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하면 소문주로 임명토록 하지요."
문주의 자리를 영소향에게 넘기겠다는 배운산의 의지는 확고했다.
"흐음. 그렇단 말인가?"
배운산과 마주한 화유군이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습니다. 하니 영소향은 이곳에 남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화유군이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그럴듯한 말이네만, 증거가 없지 않은가? 영소향 그 아이가 거짓말하는 것인지 어찌 알겠나?"
"그 아이는 혈비영의 월야혈영신법을 모릅니다. 그런데도 그 특성을 정확히 이야기했지요."
화유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 친구가 일단 영소향을 보고 판단하겠다고 떠난 뒤.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았네."
하무백에게로 결정 권한을 교묘히 넘겼다.
이럴 것이라 예상한 배운산.
그럼에도 답답했다.
사해련이 고작 무인 한 명의 눈치를 보다니.
대체 그는 어떤 인물인가.
하오문에서 파악한 그의 정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함을 절실히 느꼈다.
"찾고 있는 중입니다."
배운산의 말에 화유군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때 다시 이야기하지. 그 일만 마무리되면 우리는 사해련으로 귀환하겠네."
그 말을 끝으로 화유군이 자리를 떠났다.
"빌어먹을."
홀로 남은 배운산의 입에서 작은 욕설이 흘러나왔다.
***
하오문 총타에서 수많은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목적은 단 하나.
하무백의 소재 파악이었다.
그렇게 하오문에서 필사적으로 찾고 있는 하무백은, 장강삼협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수로를 통해 무창까지 갈 생각이었다.
"편하게 가야지. 이제."
수로를 이용하는 것이 육로로 말을 달리는 것보다 빠르고 편했다.
일단 비용을 치르면 선실 하나를 온전히 이용할 수 있었으니.
지금까지의 강행군에 제법 지친 상태였다.
휴관기니 늘어지게 쉴 것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쉬엄쉬엄 움직인 하무백은 호북성의 경계에서 장강삼협의 선착장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만 바로 배를 알아보지는 않았다.
번화한 곳에 오자마자 자신에게로 향하는 수많은 시선을 느낀 탓이다.
'이놈들이 왜 아직?'
대번에 그 시선이 하오문의 것임을 알아차린 하무백.
근처에 있던 노인에게 다가갔다.
"어이. 배수 영감."
하무백의 부름에 노인은 화들짝 놀랐다.
"배수라니, 당치도 않는 소리 말게."
배수.
소매치기를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니 노인이 깜짝 놀란 것이다.
사람들이 잔뜩 있는 곳에서 자신을 소매치기라고 불렀으니.
"나 알지?"
대뜸 묻는 하무백. 노인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제 대강 당신네들이랑은 끝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귀찮게 굴어?"
그 목소리가 사나웠다. 그랬기에 노인은 움찔 몸을 떨었다.
"고, 문에서 대협을 찾고 있습니다."
"왜?"
"저 같은 아랫것이 뭘 알겠습니까?"
하무백이 인상을 찡그렸다.
노인의 말에는 틀린 곳이 없었다. 그는 정말 평범한 소매치기였고, 아는 게 없을 테니.
그저 하오문에 소속되어 그들의 눈과 귀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귀찮게."
하무백은 짜증 어린 중얼거림을 뱉은 후 근처에서 가장 큰 기루로 향했다.
그의 기감에 하오문의 내공이 그곳에서 느껴졌으니.
하무백이 들어가자 어여쁘게 차려입은 기녀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는 그녀들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귀찮다. 루주 나오라 그래라."
하무백의 말에 막 손님을 맞으러 나오던 기녀들이 딱딱하게 굳었다.
몇몇은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그때 마침 하무백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지, 총관으로 보이는 중년 미부가 나와 그를 안내했다.
"귀빈께서는 저를 따라오시지요."
기루의 최상층.
루주의 방으로 보이는 곳에 미색이 출중한 중년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대협의 심기를 어지럽히게 되어 죄송합니다. 헌데 문에서 지급으로 대협의 소재를 파악하라는 명이 내려와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루주는 공손했다.
"왜?"
짧은 물음.
"그것이··· 소문주님의 거취 때문인 걸로."
"소문주?"
하무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알기로 하오문에는 소문주가 될 이는 아직은 없었기에.
"아, 대공녀셨던 분입니다."
이어진 설명에 그제야 하무백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거취를 왜 자신에게······.
"아."
작은 탄성.
도문위 놈을 처리한다고 깜빡했다.
게다가 그녀가 기다리지 않고 하오문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였기에 다 끝냈다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자신이 그녀를 잡고 난 후 어찌할지 정하겠다고 했었지.
"괜찮아.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지내라고 해. 그럼 난 간다."
간단하게 결론만 말해주고 하무백은 곧 기루를 떠났다.
그리고 막 무창을 향해 출발하려는 배에 올랐다.
마친 빈 선실이 하나 있다 했기에.
딱 사람 한 명이 쓸 수 있는 크기의 선실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기에 하무백은 셈을 치르고 선실의 침상에 몸을 뉘었다.
이렇게 편하게 눕는 것이 얼마 만인가.
배는 장강의 흐름을 따라 무창을 향해 거대한 몸을 움직였다.
교룡관에서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 채, 하무백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괜찮다고 답변이 왔습니다."
배운산은 장강삼협의 지부에서 지급으로 날아온 전서를 화유군에게 내밀었다.
화유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우리도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 원단은 하오문 문도들끼리 즐거이 맞도록 하게나."
이미 떠날 채비는 마쳤다.
떠날 때 영소향이 함께 가느냐 아니냐만 남았을 뿐.
그렇게 사해련은 하오문에서 물러갔다.
영소향은 눈물을 흘리며 초췌한 모습의 예초아를 떠나보냈다.
그리고 돌아선 그녀의 손에는 혈해귀사장 비급의 필사본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곧장 폐관수련실로 향했다.
"내일이 원단인데, 오늘 들어가려는 게냐?"
이제는 문주의 직위에 어느 정도 적응한 배운산이 물었다.
"저에게는 똑같은 하루일 뿐이에요. 한시라도 빨리 익힐 겁니다."
차가운 목소리.
영소향은 그 말을 남기고 폐관수련실에 들었다.
문이 굳게 닫혔다.
저 문이 다시 열렸을 때, 영소향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