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161화 (161/312)

161화. 직접 오라고 해

"타핫!"

커다란 기합성과 함께 찔러오는 무수한 검.

단목운뢰는 그 검을 막지 못했다.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았음이니.

"후아. 졌다. 무슨 일 있어? 요즘 들어 검이 더욱 날카로워진 것 같아."

단목운뢰의 물음에 백리평은 그저 웃음 지을 뿐이었다.

백리평의 시선이 연무장 가장자리로 향했다.

그곳에 교관이 한 명 서 있었다.

장이걸.

종남에서 교룡관으로 파견한 잠룡대 교관이었다.

아마도 장문인의 명 때문에 자신을 감시하는 것이리라.

백리평은 그렇게 생각했다.

교룡관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만큼 백리평은 더욱 치열하게 수련에 빠져들었다.

'오늘로 마지막이군.'

장이걸은 조금 아쉬웠다.

우연히 이곳으로 걸음하여 이들의 수련을 보았던 날.

그날 이후 고작 사흘이지만 매일 같이 이곳을 찾아 잠시 동안 이들의 수련을 구경했다.

일신우일신.

매일같이 조금씩 발전하고 있는 백리평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기분이 좋았던 탓이다.

하지만 오늘은 종남으로 떠나야 한다.

대부분의 교관들이 휴관기는 본파에서 보냈기에.

짧은 기간이지만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오니 백리평이 장이걸의 존재를 눈치채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곱지 않은 시선이군.'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장문인의 명 때문에 자신이 찾아왔다 여기는 것일 터.

장이걸은 쓴웃음을 지으며 연무장을 떠났다.

백리평이 힐끗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내일도 이렇게 수련할 거야?"

당진산이 생도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 무슨 날인 줄은 알고?"

다시 한번 묻는 당진산.

생도들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아, 난 오늘 집으로 가봐야 해. 내일은 오후 늦게나 나올 수 있을 것 같아."

그제야 단목운뢰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내일이 원단이다."

당진산의 말에 나머지 생도들은 그제야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운뢰야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니까, 우리는 우리끼리 다 같이 식사나 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

"좋아. 그렇게 하자."

당진산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리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백리평의 빠른 대답에 당진산이 씨익 웃으며 나머지 생도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오늘이 일 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런 줄 미처 모를 정도로 수련에 매진했던 나날.

맹룡대 칠 조의 생도들은 올 한 해를 정말로 치열하게 보냈다.

다가올 이 년차는 더욱 치열하게 보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

깊은 밤.

강바람은 차가웠다.

섣달그믐.

달도 뜨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다.

그럼에도 갑판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곧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시각.

이제 한 해가 저물고 새해가 시작되는 때였다.

그리고.

자정이 되었다.

"쏩니다!"

커다란 외침과 함께 선원 누군가가 하늘을 향해 폭죽을 쏘아 올렸다.

펑! 퍼펑!

불꽃이 어두운 하늘을 수놓았다.

"우와아아아!"

새해를 맞이한 승객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하무백은 갑판 적당한 곳 난간에 기대어 서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다가 수로채의 수적들이 몰려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허허. 섣달그믐날과 원단은 수적들도 쉰다오."

하무백의 혼잣말에 대꾸하는 중년 문사.

그를 힐끗 본 하무백.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러시는지?"

"공손 영감이 보낸 건가?"

정천맹의 총군사 공손단경.

하무백을 맹룡대로 보낸 장본인이 바로 그였다. 맹주의 재가를 받은 명령서였다고는 하지만.

하무백에게는 그런 인물도 그저 영감에 지나지 않았다.

하무백의 물음에 중년 문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 아셨습니까? 군사께서는 저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 하셨는데."

제법 놀란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는 정말로 그냥 문사였다.

몸 안에 내공이라고는 한 톨도 없었다.

하무백의 기감이나 무극명륜안으로 알아볼 방도가 없는 이였다.

정천맹이 정파 무림의 연합체라 하지만, 무림인들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아니, 그 거대한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무림인이 아닌 이들이 더욱 많은 곳이다.

정천맹에서 천하의 온갖 정보를 다루고, 맹의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는 등 가장 핵심적인 곳이 천목각이다.

그리고 그 업무는 무공 수련에만 열중하는 무림인들 대부분이 할 수 없는 영역이었고.

그러니 천목각에서 그 어렵고 복잡한 업무들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문사들이 필요했다.

이 중년인은 그런 문사들 중 하나일 터.

"천목각 쥐새끼들 기척이 몇 번 맴돌다가, 오늘 낮부터 내 주위를 배회하던 중년 문사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건다? 천목각에서 나온 거지, 뭐."

하무백의 설명에 중년 문사를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하무백에게 접근할까 때를 보며 자신이 계속 주변에 있던 것이 원인이었다.

그냥 멀찍이서 모른 척하고 있다가 말을 걸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텐데.

"다음부터는 참고토록 하지요."

"하오문 때문에?"

하무백의 물음에 중년 문사는 고개를 저었다.

"혈교 때문입니다."

돌아온 대답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하무백.

"제법 귀를 열어두고 있네, 그래."

"뭐, 서로서로 알면서도 그냥 두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중년 문사가 빙그레 웃었다.

저 말의 의미는 간단했다.

하오문과 사해련에 심어둔 세작에게서 정보를 얻었다는 것이다.

"제법 잘 심어뒀나 보군.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중년 문사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왜 알려줘야 하지?"

"혈교의 잔당을 처단하는 데 혼자서는 힘드실 거라 하셨습니다."

군사 공손단경의 전언이었다.

"지랄."

그 말에 대한 짤막한 하무백의 대답.

그럼에도 중년 문사는 웃고 있었다. 애초에 하무백의 성격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눈앞에 있는 잔당도 그냥 두면서 숨어 있는 놈들을 잘도 처단하겠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산월마림."

"아······!"

작은 탄성 후 중년 문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말이 맞았기에.

산월마림에 혈교의 잔당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장성을 쌓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반대 때문이었다.

강호의 평화를 위해 그리 두고 마물들을 관리하는 것이 더 낫다는 궤변.

그들은 그 궤변을 정론으로 바꿀 힘을 지녔고, 결국 그들의 의견대로 되었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천맹주도, 군사 공손단경도 하무백에게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중년 문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니 그냥 가봐."

하무백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럼에도 중년 문사는 발을 뗄 수 없었다.

"내가 간다."

하무백이 난간에서 몸을 떼고는 걸음을 옮겼다. 중년 문사는 그 뒤를 따를 수가 없었다.

하무백의 등이 따라오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하무백은 자신의 선실로 사라졌다.

"말씀하신 대로 어렵군. 허허. 무창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

아무래도 중년 문사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차가운 공기.

맑고 푸른 하늘.

푸르른 강물.

새해 첫날 아침, 원단의 풍경이었다.

하무백은 하얀 입김을 뿜으며 선수에 서서 배가 가르는 물살을 내려다보았다.

"하하, 좋은 아침입니다. 간밤은 편안하셨습니까?"

중년 문사가 웃으며 하무백에게 다가왔다.

하무백이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방글방글 넉살 좋게 웃고 있는 중년 문사.

"무얼 알고 싶은 거지?"

하무백의 물음에 그는 잠깐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순순히 군사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할까, 아니면 살짝 양념을 쳐서 적당히 이야기할까.

찰나의 고민이었지만,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아무런 수작도 부리지 말라 하셨지.'

공손단경이 신신당부한 것이었다. 중년 문사는 상관의 명에 충실했다.

"살아남은 십로의 행방과 혈비영이 멸공을 연구한 이유, 그리고 그 성과. 그렇게 알아 오라 하셨습니다."

그 외의 것은 다 알고 있다는 말이다.

벌써 혈비영이라는 별호가 흘러나왔으니.

'누군 발바닥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고 있는데, 누구는 편하게 앉아서 낼름낼름 잘도 받아먹는군.'

하무백이 정천맹이 있는 방향을 잠시 슬쩍 바라보았다.

순순히 어울려 주고 싶지는 않았다.

"대가는?"

"무엇을 바라십니까?"

중년 문사는 여유로운 얼굴로 물었다. 하무백이 무엇을 바라든 어지간한 것은 들어줄 수 있다는 태도였다.

아마도 공손단경의 언질을 받고, 상당 부분의 권한을 위임받아 왔으리라.

뻔했다.

공손 영감의 심계야 여러 번 겪어 봤으니.

자신의 성정을 잘 파악하고 있는 그라면 세세하게 지시를 내렸을 것이다.

그러니 중년 문사가 이리도 조심스럽고 고분고분한 것이다.

"직접 오라고 해."

그 말을 남기고 하무백은 다시 선실로 들어갔다.

중년 문사는 난감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직접 오라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들은 까닭이다.

총군사 공손단경에게 직접 오라 하다니.

'어찌 군사의 말씀에 틀린 곳이 없단 말인가.'

공손단경에게 이 말을 들을 때만 해도 설마 설마 했었다.

천목각에 있으면서 하무백의 막 나가는 성질머리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이 있기는 했었지만.

눈앞에서 직접 겪으니.

그보다 더했다.

"괜한 꼬장이니 천천히 한번 더 찔러 보라 하셨지······."

나직이 홀로 중얼거리는 중년 문사.

공손단경이 자신을 찾을 때 그리 대응하라 이른 말이었다.

시간은 빨랐다.

배도 장강을 따라 빠르게 내달렸다.

원단으로부터 사흘 후.

배는 무창에 도착했다.

하무백은 배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의 일 년 가까이 지낸 곳이라고,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니 반가웠다.

교룡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중년 문사가 빠른 걸음으로 따라붙었다.

"안 가냐?"

하무백이 귀찮다는 듯 물었다.

"아직 답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원단 아침 이후 사흘.

하루에 한 번씩 중년 문사가 하무백을 찔러 보았으나,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배에서 함께 내려 교룡관까지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별거 없다니까. 귀찮게 구네."

"별거 없으니 그냥 알려주시지요."

빙그레 웃으며 대꾸하는 중년 문사.

하무백은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귀찮은 인간을 보냈다.

하무백의 심기를 자극하지 않을 정도로 예를 갖추지만, 그렇다고 하무백의 기세에 겁을 먹지도 않았다.

유들유들한 저 모습.

하무백을 상대하기에 최적인 사람을 공손단경이 보낸 것이다.

하무백은 그것이 더욱 기분 나빴다.

공손단경이 '이봐라, 난 이만큼 너를 파악하고 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괜스레 기분이 나빠지는 하무백.

손에 내공이 모였다.

오른손을 쥐었다가 폈다.

'그냥 확 엎어버려?'

순간적인 충동이 일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이유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경멸하지 않았던가.

남들이 보기에는 하무백이 기분 내키는 대로 막 나가는 것 같았지만, 거기에는 전부 나름의 이유와 명분이 있었다.

중년 문사도 그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겁도 없이 이렇게 하무백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서.

교룡관에는 금세 도착했다.

정문을 넘어선 하무백의 표정이 묘했다.

또 다른 귀찮음을 마주한 표정.

그 표정을 읽은 중년 문사는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길래 저러는 것일까.

따라가 보면 알 일이다.

하무백은 곧장 맹룡대 칠 조의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수련이 한창이었다.

"너희들 뭐하냐? 휴관기인데?"

"교관님!"

갑자기 나타난 하무백.

생도들은 모두 자신들의 교관을 반겼다. 하무백의 생도가 아닌 주우명까지도.

한 사람.

백리평만은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이제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얼굴.

하무백은 그 기색을 알아차렸다.

두 시진 후.

중년 문사, 구양명원은 대체 이걸 어찌해야 하나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무백의 물음 때문이다.

"무얼 바라냐고 했지? 종남파 뒤집어엎어도 덮어줄 수 있어?"

종남파.

위세가 조금 처진다고 할지라도 구파일방 중 한 곳이다.

게다가 지난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장렬히 전사한 은하검협의 사문.

그곳을 뒤집어엎겠다는데, 무슨 말을 할까.

눈앞의 인간은 그걸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성정을 지니고 있음이니.

'군사님. 이건 제게 너무 어려운 문제입니다.'

난감하고도 난감했다.

"뭐, 사실 내가 그런 거 신경 쓴 적은 없지."

하무백이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켜 사라졌다.

구양명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다급히 천목각에 소식을 전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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