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하제일 무공교관-162화 (162/312)

162화. 집에 가려고?

"넌 나랑 좀 걷자."

하무백이 백리평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단목운뢰와 연하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 말의 의미를 아는 탓이다.

자신들 역시 하무백과 함께 걸었었고, 그 덕에 인생의 큰 장애물을 해결할 수 있었다.

백리평에게서는 그런 기색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에 두 사람은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복잡미묘한 표정.

지금까지 지은 적 없던 표정이다.

헌데 교관님이 돌아오자 얼굴 위로 훤히 감정이 드러났다.

'무슨 일이 있구나.'

'큰일이 생겼구나.'

단목운뢰와 연하민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교관님이 백리평에게 걷자고 할 만한 일이 있음을.

"너희들은 휴관기인데 적당히 하고 쉬어라."

하무백은 간단한 말을 건네고는 걸음을 옮겼다.

백리평이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남은 생도들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지?"

당진산의 물음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교관님이 어떻게든 해 주실 거야."

연하민의 작은 음성에는 커다란 믿음이 담겨 있었다.

"맞아."

신의가 가득한 목소리로 단목운뢰도 맞장구를 쳤다.

휴관기답다고 할까.

교룡관은 조용했다.

그럼에도 하무백은 늘 걷던 그 길로 향했다.

익숙한 곳.

자연스레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뭔 일이야?"

그의 퉁명스러운 듯, 귀찮은 듯한 물음.

"퇴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짤막한 백리평의 대답이 돌아왔다.

"집에 가려고?"

담담한 물음.

"네."

짧은 대답.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그러면 가면 될 것이지. 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관칙이 그러합니다."

돌아온 대답에 하무백이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관칙을 떠올렸다.

"내 승인이 필요해서 기다렸구만."

담당 교관의 승인을 득한 후, 관주의 재가가 있어야 퇴관할 수 있다.

물론 무단 퇴관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고지식한 정파의 전형인 이 녀석이 그럴 리 없었다.

"집에 가라고 할 때는 안 가더니만. 그때 같으면 내 승인 기다릴 필요도 없었잖아."

당시는 교관이 가라 했으니, 이미 승인을 한 상황이나 마찬가지였었다.

"지금도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백리평의 솔직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하무백은 그 말 속에 담긴 진심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백리평은 지금 하무백에게 가지 않도록 잡아 달라 말하고 있었다.

"그럼 안 가면 될 일이지. 내가 가라할 때도 안 간 것처럼."

간단한 문제를 풀듯 이야기하는 하무백의 모습에 백리평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본파에서 내려온 장문인의 명인지라. 제자인 저는 따를 수밖에 없지요."

먹먹한 목소리.

"지금까지는 담당 교관의 부재로 승인을 받지 못했기에 관주님께서도 재가를 보류하고 계셨습니다만, 이제 교관님이 오셨으니······."

하무백은 가만히 들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퇴관 신청서에 담당 교관의 승인을 받아서 관주에게 제출하여 재가를 받는다. 그러면 퇴관이 완료된다는 게 관칙이었지?"

"맹룡대의 경우는 그간 받은 월봉을 모두 반납해야 합니다."

"좀 쓰지 않았나?"

"본파에서 전표도 함께 보냈습니다."

"염치는 있네."

"훗날 갚으라 하더군요."

이어진 대답에 하무백이 인상을 찡그렸다.

"염치도 없었구만."

말을 바꾸는 하무백.

"여기 있습니다."

백리평이 품에 보관하고 있던 퇴관 신청서를 하무백에게 공손히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하무백.

잠시 물끄러미 퇴관 신청서가 들어있는 봉투를 보았다.

안에서 신청서를 꺼내서 읽고는.

화르르르륵.

삼매진화를 일으켜 태워 버렸다.

"무, 무슨······."

백리평이 깜짝 놀랐다.

"가기 싫다며?"

"······네."

"근데 본파의 명령이라 가야 한다고?"

"네에······."

"그러려면 내 승인이 필요하고?"

"그, 그렇습니다."

짤막하게 오가는 문답.

이윽고 하무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간단한 문제네. 내가 승인을 안 해 주면 되잖아."

백리평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방법이!

늘 자신들에게 집에 가라던 교관이다.

산월마림의 무서움을 이야기하며.

언제든 집에 가도 좋다고 하던 교관 아니던가.

그래서 자신이 종남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하면 당연히 보내줄 줄 알았다.

지금 퇴관 신청서를 건네면 바로 승인하고.

지필묵을 찾아다가 자신의 수결을 휘갈겨 쓰든지, 도장을 찍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삼매진화로 신청서를 재로 만들어 버리고는 승인을 안 해주겠다니.

"대체 왜······."

"가기 싫다는 놈, 내가 등 떠밀어서 가게 할 수야 있지."

백리평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수없이 그리 말했으니까.

그래서 당연히 가게 될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데 다른 놈이 하는 건 안 돼. 그건 나만 되는 거야."

하무백이 두 눈이 활활 타올랐다.

백리평이 멍한 얼굴로 그런 하무백을 바라보았다.

"조, 종남의 장문인의 명령입니다."

"그게 왜? 관칙에는 내 승인이 우선한다."

"그래도 종남인데······."

"여기는 종남이 아니고 교룡관이야. 크게 보면 정천맹이고."

맞는 말이다.

틀린 곳이 없는, 지극히 이치에 합당한 말.

"정천맹에서 압박이 들어올 겁니다."

장문인의 성정을 알고 있는 백리평이다.

하니 다음 수순이 자연스레 그려졌다.

당장 정천맹의 장로 중에도 종남파의 제자가 있음이니.

장로의 한마디면, 교룡관 관주도 어쩔 수가 없을 터였다.

맹의 서열로만 따져도 장로가 더 높을 터.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압박? 누가? 누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짓는 하무백.

왜인지 모르겠지만 백리평은 그 모습이 더없이 믿음직스러웠다.

"종남이 섬서성에 있었지?"

"네. 섬서성 종남산에 있습니다."

하무백이 머리를 긁적였다.

"다시 가려면 귀찮은데."

"네?"

"아, 장안 쪽에 볼일 좀 보고 온 길이라."

장안은 종남산에서 지척이었다.

설마 하무백이 그곳을 다녀왔을 줄은.

"아무튼 난 네 녀석 퇴관 승인해 줄 생각 없으니까, 돌아가라."

하무백이 손을 휘휘 저으며 덧붙였다.

"백리 영감님,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종남의 긍지는 그런 게 아닐 거다."

막 돌아서던 백리평이 우뚝 멈춰 섰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예전에 삼재심법을 익히는 걸로 번뇌할 때,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무백과 나눈 적이 있긴 했지만.

"종남의 긍지······."

백리평이 작게 중얼거렸다.

종남이라는 이름 앞에 당당하라던 할아버지의 말씀.

백리평이 생각에 잠겼다.

하무백은 그런 백리평을 남겨두고 먼저 떠났다. 귀찮게 교룡관까지 자신을 따라온 중년 문사에게 가기 위함이다.

적당히 기유찬에게 떨궈 놨었는데, 지금 무얼 하고 있을지.

***

팽도율은 차향을 즐기다가 갑자기 찾아온 손님을 맞았다.

하무백이다.

"오, 돌아왔구만. 어디를 그리 바쁘게 다닌 겐가?"

팽도율이 하무백을 반겼다.

"팽가 문제 때, 미처 처리하지 못한 거. 마저 처리하고 왔소이다."

하무백의 말에 팽도율의 얼굴에 그늘이 생겼다.

이제 조금 수습이 되어가던 차에 그때 일이 다시 언급되었으니.

"구양 문사는 그것 때문에 자네를 따라온 모양이구만."

벌써 구양명원에 대한 보고까지 팽도율에게 전해져 있었다.

적어도 교룡관 내의 상황에 한해서는 그가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기유찬인가, 그 친구 솜씨겠지.'

하무백은 부관주 연백진의 얼굴을 퀭하게 만든 장본인을 떠올렸다.

"하면 자네 혼자서 움직인 모양이군. 천목각 소속의 구양 문사가 자네에게 붙은 것을 보면."

천목각이 어떤 곳인지 잘 아는 팽도율이다.

멸공 사건에 대한 조사를 위해 팽가를 찾은 정천맹 인물들 중 천목각 소속의 문사와 무인들도 있었고.

천목각의 인물이 하무백에게 붙었다는 것은 그들이 모르는 것을 하무백이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공손 영감이 사람 귀찮게 만드는 데는 재주가 좀 있는 편이오."

하무백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이 었던가?"

"하오문 놈들이 꼴에 넘치는 욕심을 부린 거 말이오. 혈비영 놈의 수작이었소이다."

별거 아니라는 듯한 하무백의 말.

그 말에 팽도율이 두 눈을 부릅떴다.

혈비영이 누구인지는 그도 잘 알았다.

혈교십로 중의 십로.

설마 그놈의 수작이 하오문을 거쳐 팽가에까지 미친 것이었다니.

"전 팽가주가 멸공을 익힌 것은 본인의 의지였지만. 팽군호, 그놈을 꼬신 것부터는 하오문 놈들의 수작이었으니."

팽도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실을 나에게 말해줘도 되는가?"

"공손 영감도 다 아는 건데, 뭘."

그렇다면 다른 게 더 있다는 이야기지만 하무백은 거기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아, 백리평 생도 이야기는 들었는가?"

팽도율은 구태여 더 캐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하무백이 자신을 찾은 이유도 백리평 때문일 테니.

"똥 씹은 얼굴로 있다 싶더니, 사정 이야기를 하더이다."

"그래? 그럼 수결한 신청서를 주게나."

팽도율의 말에 하무백이 피식 웃었다.

"나를 모르오?"

그리고 던진 질문.

질문을 받은 팽도율이 빙그레 웃었다.

"알지. 알다마다."

"그런데 그걸 달라고 하는 거요?"

"혹시나 해서 말일세."

"태워 버렸소이다."

하무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팽도율.

예상했다는 얼굴이다.

그랬기에 하무백이 돌아올 때까지 관칙을 핑계로 백리평을 교룡관에 묶어 두었던 것이고.

"종남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팽도율의 물음에 하무백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음을 지었다.

그 특유의 사나운 웃음.

"가만히 안 있으면?"

"그러게나 말일세."

팽도율의 맞장구.

"현 종남의 장문인도 지난 전쟁 때 참전하지 않고 본파에만 머물렀던 인물이네."

그리고 이어진 설명.

하무백이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종남의 장문인이라면 내 기억에는 백리단. 그 분인데."

전장에서 서로의 등을 맡겼던 전우였다.

"그러니 현 장문인은 자네를 모를 테고. 무지가 오판을 낳을 수도 있네."

팽도율의 조언.

"그러든 말든."

피식 웃는 하무백.

"종남에 태풍이 불겠구만."

그리 말하는 팽도율을 보며 하무백이 한마디 보탰다.

"어째 즐거운 것 같소?"

하무백의 말에 팽도율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네의 오해인 것 같군. 난 그저 소인배가 싫을 뿐이라네."

그 말을 끝으로 하무백은 관주각을 나섰다.

그리고 향한 곳은 자신의 숙소.

이제 본격적으로 쉬어야 할 때다.

설란은 여전히 수련 삼매경인 듯하여 바로 찾지 않았다.

지난 동투제 이후 기감이 몰라보게 발달한 터라 근처에만 가도 수련을 방해할 것 같았기에.

***

교룡관에서 지급으로 날아든 전서를 받아 든 공손단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무백에게 붙인 구양명원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알아내라는 것은 못 알아내고 이런 소식을 전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겐가, 구양 문사."

한탄 같은 중얼거림.

그럴 수밖에.

하무백이 종남을 뒤집어엎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으니.

그리고 전서에는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이유.

대체 왜 하무백이 종남을 뒤집으려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빠져 있었다.

이것을 알아내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었다.

집무실에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서가.

그곳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서류들.

공손단경은 그중 종남파에 관한 내용에 손을 뻗었다.

최근의 서류를 살피는 공손단경.

"분명 주재승 장문인 때문일 것 같은데."

정천맹의 군사이자 천목각의 각주로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신진팔문의 주인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바.

하무백과 종남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 하면, 그 원인은 분명 종남의 장문인에게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최근 정보 중에 특이한 것은 없었다.

기억이 잘못됐나 하고 확인차 서류를 다시 검토했지만, 공손단경의 기억이 맞았다.

'그러면 아직 보고가 안 올라온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겠군.'

공손단경은 서탁 앞에 있는 무수한 줄 중 하나를 당겨 수하를 불렀다.

"종남에 대한 최신 정보. 바로 올리게나."

그렇게 명을 전하고 일 각 후 받아 든 서류.

그곳에 이 사달의 원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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